외전 - 결전 [7]
[61]
로얄가드.
파울라는 여전히 스스로를 그리 칭하고 있었다.
한때 찬란한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었던 로얄가드는 제국과 함께 몰락하였다.
몰락한 영광을 뒤집어쓰길 자처한 파울라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의무뿐이었다.
"...그날을 떠올리게 만드는군."
파울라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너무나 거대한 힘의 기류가 지평선 너머에서 번져나오고 있었다.
스페라가 오벨리스크로 향하며 만들어내는 파괴의 폭풍이 파울라가 선 대지까지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스페라의 진격은 거칠 게 없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그 무엇도 스페라의 진격을 막아설 수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자랑하는 그 무엇도 레이의 걸음을 막아 세울 수 없었다.
레이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짓누르고 황좌에 도달했었다.그리고 거기서 죽었다.
"하..."
파울라가 가볍게 웃었다.
마음 속에 비릿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파울라는 그 비열한 감정이 가슴을 두드리는 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꼴 좋군."
짧게 빈정거림을 입에 담은 파울라가 마음속의 갈 길을 찾기 힘든 악의를 억누르며 황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야 끝자락에 황도가 보였다.
로얄가드인 파울라는 순식간에 주파 가능한 거리였다.
아티펙트나 정령을 조력을 받는다면 더욱 단축할 수 있었다.
물론 대놓고 달려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을 위해 미리부터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단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황도에 들어서기 전에 발각된다 해도, 물러설 계획은 없었다.
파울라에게 이건 마지막 도박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집결한 모두에게 이건 마지막이 될 도박이자 전투였다.
"헌데... 아직인가."
계획이 일그러져 황도에 들어서기도 전에 대군에 포위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허나 아무리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일단 가능성이란 게 존재해야 준비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파울라에게 있어 이 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루나가 황성을 비운다'였다.
루나가 황성에 남아있는데 황성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자살 행위였다.
"이상한데."
파울라를 비롯해 이곳에 집결한 인원들은 루나가 반드시 황성을 비울 것이라 확신했었다.
스페라를 요격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대륙 각지에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막아서기 위해서든, 지금은 루나가 직접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헌데 여전히 루나의 움직임은 보고되지 않았다.
스페라가 오벨리스크에 근접했으며 대륙 각지의 요충지가 붕괴 직전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분명 의아한 상황이었다.
"..."
과연 루나가 준비한 책략이 무엇일까.
어쩌면 루나는 이미 황성을 떠나 역습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정말로 황성에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현재로선 과연 무엇이 정답일지 이곳의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던 파울라가, 결국 단념했다.
"...어쩔 수 없군."
루나가 황성에 남아있다면 지금 움직이는 건 개죽음이 될 테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결전이 결말을 맞기 전 파울라는 황성에 들어서야 했다.
모든 게 끝나고 나서 황성에 들어서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파울라가 자기주장을 내비쳤다.
가까이 서 있던 티르피츠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울라의 주장대로, 아직 루나의 위치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지만 더 이상은 계획을 미룰 수는 없었다.
티르피츠가 집결해 있던 병력의 중앙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티르피츠가 수호해야만 하는 존재가 긴장이 가득한 기색으로 꼿꼿이 굳어있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티르피츠가 그 소년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불충한 저희가 감히 황자 전하를 모셔도 되겠습니까?"
소년이 멈추라고 한다면 멈출 것이다.
소년이 죽음이 두려워 의미 없는 약간의 연명을 원한다면, 따를 것이다.
모두가 겸허하게 소년의 답을 기다렸다.
소년은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티르피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피츠가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린 후 몸을 일으켰다.
무너졌던 제국의 마지막 잔재로서, 티르피츠가 검을 뽑았다.
"...제국에게 영광을."
*
절대권역.
스페라의 절대권역이, 요하나를 중심으로 조금씩 중화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스페라는 원치 않는 웃음을 머금었다.
스페라와 요하나.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난 두 천재는 서로에게 마중물과 같은 존재였다.
서로가 서로의 발전을 가속시킨다.
초월적인 존재의 축복, 영육의 합일, 끊임없는 혈전...
그러한 요소들 또한 무시할 수는 없었으나, 결국 서로의 존재가 없었다면 두 사람 모두 이토록 빠르게 정점이라 불리는 영역에 손을 뻗지는 못 했을 것이다.
분명...
굳이 살의를 품지 않아도 서로에게 좋은 경쟁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리 지옥 같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따뜻한 태양 빛 아래 서로의 존재를 찬란히 빛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스페라는 참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은 아마도, 이미 죽어 얼어붙어 버린 레이를 향한 원망일 터다.
벌써 수 년이 지났지만 스페라는 여전히 레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마다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여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요하나는 언제나 스페라에게 레이라는 존재를 멋대로 상기하게 만들었다.
스페라는 이제는 확실히, 그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다.
쯔즈즉 스페라가 펼쳐낸 절대권역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본래 루나와 대적하기 위해 준비해둔 마지막 수였다.
그 기술은, 요하나와 루나를 비롯한 제국의 핵심적인 전력에게 합공을 당할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스페라가 개의치 않고 오벨리스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쯔즈즈즈즉-!!!
절대권역과 어두운 광휘가 뒤섞여 간다.
필멸자가 정점에 이르러 자아낸 권능과 별빛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가 내린 권능이 융화되어 간다.
이를 매개하는 건 다름 아닌 두 번째 개안을 이룬 스페라의 눈동자였다.
공간의 일렁임, 그리고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눈.
스페라는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그 눈으로 절대권역과 어두운 광휘의 본질을 보다 깊게 이해하고 서로를 녹여냈다.
트드득-!
절대권역에 녹아든 어두운 광휘는 모든 것을 침식하는 힘이 된다.
그것은 심지어 요하나가 각성하기 시작한 절대권역조차 마찬가지였다.
"..."
요하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절대권역조차 침식해 들어오기 시작한, 그 이해할 수 없는 끈적한 물결을 보며 요하나는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런 요하나를 향해, 스페라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신 차려, 요하나."
"?!"
쩌억!!!
스페라가 가벼운 손짓으로 요하나를 밀어냈다.
요하나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스페라가 만들어낸 어둡게 빛나는 물결 속으로 빠져들었다.
스페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요하나에게 다가서며 이번엔 성검을 다시 쥐었다.
"나의 권역은 이제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해."
스페라가 펼쳐낸 권역은 이제 하나의 세상이 되어 외부의 간섭을 단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또한 본래 루나와의 일전을 위해 지향하였던 특성 중 하나였다.
"원군은 없어. 그러니까 희망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운명적인 대적자의 최후가 볼품없길 바라지 않는다.
그 숨겨두었던 바람을 드러내며 스페라가 성검을 움직였다.
요하나는 어둡게 빛나는 물결 속에서 영혼을 동력 삼아 두 자루의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저항도 의미 없이, 요하나는 더욱 깊이 물결 속으로 가라앉았다.
첨벙!!!
"..."
요하나는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알지 못 하는 목소리와 환영 따위가 파편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어두운 물결은 스페라가 만들어낸 본인의 세계와 같았다.
그리고 요하나는, 어둡게 빛나는 물결에 침식되며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가려 하고 있었다.
육체가, 영혼이, 정신이 어둡게 빛나는 물결에 침식되어 흐트러진다.
이대로 머뭇거린다면 곧 요하나를 이루던 모든 것들이 소멸할 것이다.
"...!!"
제대로 나오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요하나는 각성하기 시작한 절대권역을 다시 한번 전개했다.
그와 함께 '최후의 수단'을 결국 손아귀에 쥐려던 그 찰나.
요하나는 시야를 새롭게 스치는 환영을 보고 무심코 몸을 굳혔다.
"...?"
루나.
새롭게 스친 환영은 어린 시절의 루나였다.
아직 꼬마였던 루나.
요하나는 루나가 어렸을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략적으로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환영 속에서 아직 꼬마였던 루나는 로커스트에게 붙잡혀 있었다.
로커스트.
7서클에 이른 고위 마법사이자, 제국조차 심각하게 경계했던 암흑정령사.
로커스트는 루나를 붙잡은 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로커스트와 맞붙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세리아.
레이의 고모.
"...?"
요하나는 반사적으로 의문을 품었다 당시 필립스 백작은 로커스트를 토벌하기 위해 기사들을 이끌고 직접 나섰다.
세리아는 그들과 함께 로커스트를 토벌했다.
그녀는 결코 혼자서 로커스트와 맞서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당시 재능 넘치는 강자였지만 일반적인 그래듀에이트의 수준을 크게 상회하진 못 했다.
세리아 홀로 로커스트를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이를 증명하듯 환영 속에서 세리아는 로커스트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 하고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세리아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다.
허나 로커스트는, 세리아가 어디서 살아나왔는지 알지 못 했다.
세리아는 발레리우스의 미궁에 갇혀 10년을 투쟁했다.
그 긴 시간을 무너지지 않고 발악하며 결국 생존하였다.
세리아가 그 발레리우스의 미궁에서 개화한 투쟁심과 집중력은 단순히 수치화해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로커스트는 그걸 알지 못 했고, 그래서 방심했으며, 그게 결국 그의 사인(死因)이 되었다.
"..."
최후의 순간 세리아는 모든 아티펙트를 소모해 틈을 만들어냈고, 로커스트는 세리아의 일격에 목이 잘렸다.
전투 내내 완벽한 우세를 점했던 로커스트는 그리 허무하게 죽었다.
물론 세리아 또한 로커스트의 목을 자른 후 침묵했다.
로커스트의 목을 잘라냈을 때쯤, 이미 그녀의 심장 또한 멈추어 있었다.
루나는 그 전장 위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
요하나가 이해 못 할 환영을 보고 머뭇거린 순간.
그녀의 뒤에서 성검이 떨어져 내렸다.
쩌억!!!
성검을 막아낸 요하나가 균형을 잃고 지면을 굴렸다.
잠시 피를 쏟아내는 요하나를 향해 스페라가 피식 웃었다.
"어때? 흥미롭지 않아?"
"무슨... 소리를..."
"지금 네가 본 환영 말이야."
스페라가 성검을 툭툭 두드리며, 믿기 힘든 소리를 담담하게 입에 담았다.
"이게, 엘-람이 보았던 미래야."
"...?"
"성검을 통해 훔쳐보았어. 엘-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말이야."
요하나는 여전히 당혹감만을 스페라에게 내비쳤다.
그런 요하나에게 스페라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엘-람이 레이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내리지 않았다면 찾아왔을 미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