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6]
[60]
소드마스터.
대다수의 범재는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주어져도 닿지 못 할 불가해한 영역.
하지만 범접 못 할 불세출의 재능이 초월적인 존재들의 축복에 의해 가속된 결과, 스페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비록 초월적인 존재들의 축복이 있었다고는 하나 필멸자로서 정점이라 여겨지는 영역을 개척한 것은 결국 스페라 본인이었다.
20대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은 대륙 역사상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설적인 영웅인 하르시아와, 제국과 함께 공멸한 미련한 찬탈자, 레이.
그리고 이제...
스페라가 그들의 위업을 이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스페라가 요하나를 마주 보았다.
"흠..."
스페라는 본래 루나와의 전투에 대비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감추는 것 또한 고려했었다.
루나가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인 이상 스페라의 절대권역은 루나에게도 치명적인 위력을 발할 터였다.
일반적인 마법사처럼 맥도 못 추지는 않겠지만, 비장의 한 수가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절대권역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했다면 루나에게 확실한 타격을 가할 기회가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허나 이제 와서 그런 식의 수 싸움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으리라고, 스페라는 결론 내렸다.
뒤가 없는 총력전을 감행한 이상 머뭇거려봤자 얻을 게 없었다.
결전이 될 전장에 발을 들인 스페라는, 더는 거리낌 없이 힘을 드러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요하나, 난 충분히 경고했어?"
"...!"
요하나가 긴장이 가득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며 검을 억세게 말아쥐었다.
소울웨폰.
그 영혼을 동력으로 하는 힘은 절대권역의 영향력 내에서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절대권역의 진정한 두려움은 단지 타인이 다루는 마나를 교란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절대권역 내에서 마나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이미 검의 극의에 달한 소드마스터가 마나에 기반한 대부분의 힘들을 극도로 정밀하게 제어해낼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그리고 스페라가 다루는 어두운 광휘 또한, 일단은 마나가 융합되어 있는 힘이었다.
츠즈즉!
본래도 극도로 정제되어 있던 힘인 어두운 광휘가 절대권역 내에서 스페라의 제어에 의해 얇은 실처럼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스페라는 미세하게 응축되어 너울지는 어두운 광휘를 가볍게 횡으로 움직였다.
그 찰나 요하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낮게 숙였다.
그와 동시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굉음이 귓가를 덮쳤다.
쩌억!!!!!
일대가 초토화된다.
절대권역을 드러내기 이전보다 훨씬 정밀하게 구축된 어두운 광휘의 가닥은 끊어질 기색조차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짓뭉개버렸다.
스페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검을 중심으로 어두운 광휘의 가닥을 응축시켰다.
성검을 감싼 어두운 광휘의 물결을 보고 요하나가 찰나의 순간 주춤거렸다.
이전에도 스페라는 어두운 광휘로 검강을 구축하여 사용했었다.
하지만 지금 스페라가 발현한 검강은, 과거의 검강에 비해 힘의 밀도와 구조의 견고함이 격이 달랐다.
스페라가 가볍게 성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스페가가 그려낸 성검의 궤적에 따라 풍경이 찢어졌다.
!!!!!!!
대기가 통째로 밀려나며 소리가 사라진다.
요하나는 스페라와 감히 검을 맞댈 수가 없었다.
검술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힘의 격차가 어느 정도는 좁혀져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스페라가 그려내는 성검의 궤적은 요하나조차도 정말로 막아설 엄두가 안 날 만큼 파괴적이었다.
그 때문에 요하나가 고작 몇 걸음 물러서는 동안.
요하나의 지원과 오벨리스크의 방위를 위해 인근에서 대기하던 제국군이 찢겨 나가는 풍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
요하나가 턱에 힘을 주었다.
물러설 수 있다면 물러서는 게 맞지만, 이곳에서 물러서면 더는 갈 곳이 없었다.
더군다나 스페라의 절대권역 내에서 전력을 발할 수 있는 건 오직 요하나뿐이었다.
절대적인 힘의 격차는 구역질이 나올 수준이었으나 요하나는 결국 스페라를 향해 나아갔다.
촤악!!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궤적을 숨기며 가속했다.
요하나는 스페라와 정면에서 정직하게 검을 맞대는 건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았다.
요하나는 자신이 유일하게 우세한 속도를 앞세워 스페라의 허리 아래를 기습적으로 파고들었다.
절대권역이 전개된 후, 스페라의 주위에는 어두운 광휘로 구축된 듯한 얇은 기둥 형태의 구조물이 회전하고 있었다.
요하나는 얇은 구조물쯤은 어렵지 않게 뚫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단정짓고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건 요하나의 착각이었다.
우득!!!
요하나는 자신이 구현 가능한 검강 중 가장 파괴적인 성질의 검강을 발해서 공격을 가했다.
헌데 요하나가 발현한 검강이 어두운 광휘의 구조물을 파고든 직후.
검강에 담긴 파괴력이 급격히 떨어지다 못 해 끝내 소실되어버렸다.
"...!"
요하나는 어째서 검강의 위력이 급감한 것인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두운 광휘의 구조물 내부는 '단절'을 일으키는 악신의 권능과 어두운 광휘가 얇게 교차되어 있었다.
단절을 일으키는 권능이 외부에서 침입한 힘을 여러 갈래로 쪼개서 난반사시키고, 그 반사된 힘의 조각들을 어두운 광휘가 집어삼킨다.
그 원리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매우 정밀한 힘의 가공을 요하는 기술이었다.
헌데 스페라는 어두운 광휘로 이루어진 구조물을 동시에 여러 개씩 구축하여 손쉽게 다뤄내고 있었다.
"윽...!"
요하나가 인상을 찌푸릴 시간도 없이 검의 궤적을 바꾸었다.
눈앞의 구조물을 부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약간의 실수만 저질러도 검의 위력이 급감해 스페라에게 틈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요하나는 눈앞의 구조물을 경계하며 어떻게든 스페라의 남은 틈새를 공략하려 했다.
허나 그다지 의미 있는 시도는 아니었다.
쩌엉!!!
스치듯 서로의 검이 맞닿은 찰나, 요하나가 일방적으로 지면을 긁어대며 밀려났다.
물론 스페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크흑..."
요하나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힘의 편차가 너무 컸다.
고작 스치듯 검을 맞댔을 뿐인데 뼈가 몇 군데 부러졌다.
물론 요하나라면 뼈가 부러진 것쯤은 바로 회복할 수 있었지만, 스페라는 요하나가 재정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았다.
스페라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요하나에게 접근하자, 곧장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쩌억!!!!!
요하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국은 분명 오벨리스크 방위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비록 데런과 울트가 함께하지 못 했다고는 하나 제국의 얼마 남지 않은 정예 전력 중 다수가 이 전장에 투입됐다.
제국이 갖추어놓았던 방비가 스페라를 막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요하나를 돕기 위해 쏟아져 내렸다.
콰가각!!!!!
전자기력을 활용한 고강도 투사체.
항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아티펙트.
거대한 마법진으로부터 집약된 불길.
엘프 측과 연계하여 구축한 신식 결계.
혈전을 겪고 살아남은 기사들의 검기와 검강.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축성한, 신성력을 머금은 성물들.
그 모든 것들이 스페라가 선 대지를 헤집었다.
"..."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요하나는, 제국이 준비한 저 무수한 공격들 중 무엇 하나만이라도 스페라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불가능한 바람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요하나는 희망을 품었다.
물론 그런 망상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콰악!!!
스페라가 성검을 한 번 휘두르자 일대를 뒤덮었던 흙먼지가 단번에 분산됐다.
제국이 준비한 그 무엇도 스페라를 제대로 거슬리게 하지조차 못 했다.
기껏해야 요하나가 숨을 돌릴 찰나의 연막이 되었을 뿐이었다.
요하나는 암담함에 짓눌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결국 요하나가 성과를 내야만 했다.
전장에 선 이들이 좌절해서 무릎을 꿇기 전에, 요하나가 스페라를 저지해야만 했다.
쩌억!!!!
스페라는 미리 경고했던 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스페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요하나는 하염없이 부서지고 밀려나며 지면을 굴렀다.
짓뭉개진 사체들의 혈흔과 무너져 내린 건축물들의 잔해가 요하나가 밀려난 궤적을 따라 가득 쌓였다.
"..."
벌써 몇 번째일까.
요하나가 비틀거리며 또다시 몸을 일으키려다, 뒤늦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챘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 오벨리스크가 보였다.
요하나는 황실마탑의 영역에 이미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밀려났던 요하나는 그제야 자신이 이제 정말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거기에 더해.
요하나를 지원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제국의 병력은 괴멸하기 직전에 놓여 있었다.
스페라는 오벨리스크로 향하며 굳이 요하나를 죽이기 위해 집중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막아서려는 거슬리는 것들을 공평하게 휩쓸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요하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이제 요하나의 앞에는 폐허와 사체의 조각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
스페라가 요하나의 맹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 했듯, 요하나 또한 스페라의 악의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 했다.
이토록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고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드러내는 스페라를 보다가, 요하나가 안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사실, 요하나 또한 스페라의 악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 레이가 내린 '선택'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연인을, 가족을, 명예를, 가문을, 미래를 잃어버리고 격노하고 울부짖었다.
그 잃어버린 자들의 악의의 중심에 스페라가 서 있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다분히 감정적인 문제였고, 또한 필연적인 인과였다.
"하아..."
요하나는 레이를 지키기로 했다.
그렇기에 레이가 남긴 이 비극적인 업보 또한, 요하나가 감내해야할 것이 되었다.
그 무거운 업보를 대신 감내해야한다면, 감내할 것이다.
나는 레이를 지키기로 했으니까.
"..."
요하나가 스페라의 금안을 바라보며 검을 다시 쥐었다.
스페라는 오벨리스크를 앞두고 잠시 발을 멈추었다.
스페라는 이제까지 언제나 요하나보다 유리한 조건에 서 있었다.
나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항상 스페라는 요하나보다 유리한 조건에 서 있었다.
허나 스페라와 함께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난 요하나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언제나 아득바득 기어올라 스페라에게 다가서려고 했다.
혈전 속에서 요하나는 스페라에 맞서 성장했다.
유순함을 버리고, 전장을 전전하고, 혼의 역사를 받아들였다.
스페라 또한 요하나를 배제하기 위해 소홀히 했던 검을 다시 잡아야 했다.
두 천재는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고 서로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참으로 운명적인 대적자를 마주 보며, 스페라가 웃음을 머금은 채 탄식했다.
"얄밉기는."
츠즉-!
스페라가 전개한 절대권역이 아주 조금씩 중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화되어가는 절대권역의 중심에, 요하나가 검을 쥐고 서 있었다.
이미 기량이 만개에 가까워진 채 답을 몰라 방황하던 요하나는, 먼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스페라를 맞상대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고 자신 또한 그 영역 안으로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
"...짜증나네."
스페라는, 요하나와의 만남이 즐겁게 느껴졌기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이미 전개되어 있던 절대권역을 한 번 더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본래 루나와의 결전에서 활용하기 위해 안배해둔 마지막 기술을, 스페라가 요하나를 위해 드러냈다.
"이제 정말로... 그만 끝내자, 요하나."
이 질기고 빌어먹을 인연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