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5]
[59]
필립스 백작.
그는 현재 필립스 백작령을 비롯해 인근의 제국령을 통솔하는 제국 측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과거에 비해선 필립스 백작가의 영향력은 비할 수 없이 거대해졌으나 필립스 백작에게 그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
필립스 백작은 자신의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필립스 백작은 여전히 과거를 되돌아볼 때마다 후회와 죄악감을 느꼈다.그때 결단을 내렸어야 했는데.
그러한 미련은 지워지지 않고 필립스 백작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필립스 백작은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일지도 몰랐다.
"..."
필립스 백작은 습관적으로 한숨을 삼킨 후 자신의 딸아이를 떠올렸다.
알레시아는 온갖 굴욕을 감내하며 육탄 돌격을 하더니 결국 자기 닮은 딸내미를 얻는 데 성공했다.
얼마 전 자기 딸내미가 너무 유별나다고 투덜대던 알레시아의 연락을 상기한 필립스 백작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업보로구나."
알레시아에게 들리지 않을 핀잔을 중얼거린 필립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장을 갖춘 모하메드가 집무실에 들어와 필립스 백작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보고를 들은 필립스 백작이 덤덤하게 자신의 무장을 챙겼다.
대륙 전역에, 특히 요충지라 불릴만한 지점에 동시다발적인 공세가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경고는 이미 전해 들었었다.
그리고 제국 황성에서 전달된 경고대로, 부정한 자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필립스 백작령과 오시리스 백작령은 물론이고 인근에 위치한 모든 제국령의 병력들이 적들의 공세에 대비해 연합하고 있었다.
루비하 왕국에서 파병된 병력 또한 필립스 백작령에 합세했다.
물론 미리 단단히 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자들의 간악한 공세를 견디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항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필립스 백작이 투구를 착용한 후 모하메드와 함께 집무실을 떠났다.
*
쨍그랑!!
바닥에 던져진 유리잔이 깨져나갔다.
마티아스 후작은 연이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창틀에 집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화를 주체 못 하는 마티아스 후작을 향해 수하가 입을 열었다.
"길게 버틸 수 없습니다. 물러나셔야..."
"빌어먹을!! 물러나긴 어디로 물러나!! 물러난다 해도 저놈들이 우리가 달아나는 걸 손가락 빨며 기다려준다더냐?!"
마티아스 후작은 지금 상황이 참 지랄맞았다.
마티아스 후작이 현재 위치한 곳은 제국의 요충지 중 한 곳이었다.
화이트타워가 세워져 있었고, 규모가 큰 영맥이 하나 붙어 있었으며, 내륙으로 흐르는 큰 강도 옆에 하나 끼고 있었다.
이곳을 버리는 순간 인근 지역을 사수하는 건 불가능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은 핵심적인 수로와 수자원의 공급처를 상실하게 된다.
그 요충지를 향해 악신의 추종자들이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마족과 마물, 그리고 흑마법사와 같은 부류들은 마티아스 후작에게도 이제는 익숙했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악신의 축복을 뚝뚝 흘리며 전진하는 거대한 점액질의 괴물이 발견됐다.
작은 산 하나를 감쌀 수 있는 크기를 지닌 점액질의 괴물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꼴을 보며 마티아스 후작이 발작했다.
"저런 괴물은 대체 어디서 기어나오는 것이냐!!"
본래 마경에서나 활개쳐야 할 괴물이었다.
헌데 대륙의 대지가 점점 더 악신의 축복에 잠식된 탓에 이제는 마경의 괴물들이 대륙에서도 날뛰어댔다.
퍽!!
째앵!!!
마티아스 후작은 연거푸 책상의 장식물을 벽으로 던져댔다.
악신의 추종자들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제국의 군단은 열세에 처했다.
이대로는 길게 버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티아스 후작의 수하는 퇴각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티아스 후작에게 물러서기를 권했다.
물론 마티아스 후작은 듣지 않았다.
"황성에 있는 놈들에게 대가리가 달려 있다면 우릴 지원할 것이다!!"
마티아스 후작의 주장대로 이곳은 제국에 있어 사수해야만 하는 요충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곧 지원이 당도할 것이다.
마티아스 후작은 자신의 장담이 들어맞기를 바라며 충혈된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
"큭..."
은십자 기사단장, 길란트가 신음을 흘렸다.
길란트는 현재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동부전선은 본래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몇몇 정체를 알기 힘든 부정한 존재들이 예고 없이 출현해 전선을 헤집어 놓았고, 길란트는 격렬히 항전하다 부상을 입었다.
길란트는 본래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었다.
헌데 부상을 치료하려고 성직자를 호출했다가, 변절한 성직자의 급습을 받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후읍..."
길란트가 반으로 나누어진 변절한 성직자의 몸뚱이를 옆으로 밀쳐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은십자 기사단원 한 명이 황급히 다가와 길란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아... 잘 모르겠군."
길란트가 피로 적셔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주변의 공기가 매캐했다.
악신의 축복이 대지를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방증이었다.
숨을 몰아쉬던 길란트가 짧게 실소했다.
길란트는 본디 알리모의 국민이었으며 알리모의 기사였다.
그러나 이제 알리모는 국토를 전부 잃어버리고, 이름밖에 남지 않은 국가가 되었다.
나라까지 잃어버리고 여기서 왜 이리 필사적으로 투쟁하고 있는지, 길란트는 그것이 잠깐 회의적으로 느껴져 다리를 절었다.
그럼에도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길란트가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길란트가 정신을 차린 것 같자 기사단원이 위에서 하달된 지시 사항을 길란트에게 보고했다.
"전선을 뒤로 물리라는 지시입니다. 양익이 붕괴했습니다. 거기다 침식의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후방에서 재정비 후 전선을 재구축할 예정이랍니다."
"그게 가능할 것 같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혈전을 치르고 있지만 최전선이 붕괴한 이상 전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극히 어려울 것이다.
길란트가 비관적인 생각을 내비치자 기사단원이 억지로 웃음을 머금었다.
"지원이 오겠지요."
"...그래."
"메테오가 머리 위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빠르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기사단원이 반쯤 진담으로 그리 조언하자 길란트가 씁쓸한 웃음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변절한 광신도들.
들불처럼 번진 광신은 대륙 각지에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제는 변절한 광신도들을 확실히 적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는 제국의 주요한 군사 시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을 가려서 뽑아도 광신도들을 완전히 걸러낼 수는 없었다.
정체를 숨긴 그들은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문제를 일으켰다.
쫘악!
황실마탑의 중심에 존재하는 오벨리스크.
그 오벨리스크를 사수하기 위해 다수의 방어시설이 인근에 구축되었다.
헌데 그 방어시설의 중심부에 변절한 광신도들이 멋대로 성흔을 새겨넣었다.
성흔을 감지한 스페라는 축성된 성물을 활용해 지평선 너머 초장거리에서 오벨리스크 근방의 방어시설을 타격해 파괴했다.
선제타격을 가한 스페라는 거리낌 없이 오벨리스크를 향해 가속했다.
스페라가 지닌 역량은 2년 전에 비해서도 판이했다.
어두운 광휘가 그녀에게서 넘쳐흘렀고, 불완전했던 검의 기량 또한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쫘아악!!!
아직 가동하던 방어시설이 스페라를 요격하기 위해 공격을 쏟아냈다.
스페라는 머리 위에 쏟아지는 막대한 화력을 찰나의 순간 '단절'시킨 후, 방향을 되돌려 해방시켰다.
방어시설이 스페라를 향해 쏟아냈던 화력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되돌아왔다.
콰앙!!!
예기치 못 한 스페라의 대응에 제국이 구축한 방어시설들이 급격히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스페라는 계속해서 속도를 높이면서 어두운 광휘를 실처럼 얇게 짜내 횡으로 휘둘렀다.
흡사 검기처럼 보이는 어두운 광휘의 가닥이 휘둘러지자, 다음 순간 수백 미터 떨어져 있던 거대한 장벽이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2년 동안 루나의 존재를 의식해서 신중히 움직였던 스페라는 더는 거슬릴 게 없다는 듯 제국의 모든 저항을 짓뭉개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량으로 스페라를 막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더욱 그랬다.
스페라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짓밟고 나아가다가 한쪽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쩌억!!!
마나가 담기지 않은 거대하고 날카로운 쇠막대기가 음속을 한참 넘어서는 속도로 스페라를 타격했다.
스페라는, 전자기력으로 가속되어 음속을 넘어섰던 쇠막대를 너무나 쉽사리 성검의 검자루로 찍어눌러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요하나가 스페라의 후방을 급습했다.
!!!!!
수십 번의 충격파가 하나로 겹쳐 대기를 울렸다.
가뿐히 요하나의 급습을 막아낸 스페라가 한 발 물러서며 입꼬리를 올렸다.
"모로스는 어디다 두고 왔어?"
요하나가 손에 쥔 두 자루의 검 중 모로스는 보이지가 않았다.
요하나는 스페라의 질문을 무시한 채 육신을 한계까지 가속시켰다.
스페라가 장난스럽게 혀를 차며 요하나의 움직임을 쫓았다.
여전히 속도만큼은 요하나가 스페라를 앞섰다.
허나 스페라는 여유롭게 성검을 고쳐잡았다.
애초에 스페라는 속도를 추구하는 검술을 다루지 않았다.
그녀가 다루는 검술의 궤적은 한없이 무거웠으며, 또한 예리했다.
쩌억!!!
요하나가 두 자루의 검으로 그려낸 궤적의 틈을 성검이 파고들어 제압한다.
한없이 무거운 성검의 일격이 요하나가 그려내던 궤적을 흩트렸다.
끄득!
요하나는 끊어지려던 검의 흐름을 기이한 궤적을 그려내며 연결했다.
스페라가 여전히 입 꼬리를 올린 채 요하나와 검을 맞부딪쳤다.
!!!!!!!
눈부신 검광이 일대를 가득 뒤덮었다.
스페라는 그리 어렵지 않게 요하나의 공세를 막아냈다.
2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스페라가 지닌 검술의 기량 또한 만개에 가까워져 있었다.
검을 맞부딪치는 것으로 인사를 나눈 스페라가 요하나를 뒤로 밀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이 될 순간까지 구차하게 굴 거야?
노림수가 있다면 먼저 꺼내.
아무것도 못 하고 죽기 전에."
"..."
잠깐 침묵한 요하나가, 두 자루의 검을 다시 쥐었다.
"걱정하지 마.
이번엔, 등을 보일 생각 없으니까."
"...정말 미련하기는."
스페라가 썩 진지하게 요하나를 향해 측은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 희생하지 못 해 안달이야? 레이를 위해 싸운다고? 레이가 너를 그리 특별하게 생각한 것도 아니잖아? 레이에게 정말 사랑받았던 이들은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에 숨어 보호받고 있을 텐데, 너는 억울하지도 않니?"
스페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며 가볍게 빈정댔다.
그 가벼운 빈정거림이 요하나의 표정을 잠시라도 짓누를 수 있으리라곤, 스페라 또한 기대하지 않았었다.
요하나는 잠시 울먹임을 참는 것처럼 턱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이내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그래서 일단 4위 결정전부터 이긴 다음, 그 개새끼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정말로, 미련하기는."
요하나의 그 맹목에 스페라가 다시 한 번 짧게 혀를 차고는 성검을 돌려 잡았다.
"좋아, 안 봐줄 테니까, 잘 쫓아와 봐."
쫘악!!!
두 사람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사이.
스페라를 향해 제국군의 포격이 쏟아졌다.
허나 마나를 머금은 빛줄기는 스페라에게 닿지도 못 하고 스스로 흩어졌다.
"..."
요하나가 침묵한 채 스페라를 응시했다.
포격을 쏟아부어 봤자 스페라를 해칠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은...
츠즈즈즈즉!!
스페라로부터 기이한 장막이 너울지며 일대를 뒤덮기 시작했다.
범접 못 할 불세출의 재능이 초월적인 존재들의 축복 속에 만개한다.
절대권역.
소드마스터에 이른 존재의 상징적인 권능이 공간을 뒤덮기 시작했다.
스페라가 성검을 휘두르기 전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숨겨둔 거 있으면, 망설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