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5화 (425/446)

외전 - 결전 [4]

[58]

"..."

루나가 다가온다.

로필렌이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루나에게 예를 갖췄다.

헤이든 또한 자세를 바로잡고서 정중하게 루나를 맞았다.

루나는 무심하게 두 사람을 지나친 후, 허공을 바라보며 데런이 확실하게 제압되었는지 확인했다.

"..."

도박의 신이 분개한다.

대장장이의 검으로부터 발해지는 격정이 텅 비어있을 허공을 울렸다.

초월적인 존재의 사도를 죽이지 않고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는 건 루나에게도 무척이나 까탈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도박을 사랑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수작을 부리기 전 선수를 친 덕분에, 데런을 무사히 제압하여 공간의 틈새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임시에 가까운 조치였다. 데런을 가둘 수 있는 시간은 한시적이었고, 봉인이 풀리는 순간 초월적인 존재는 데런의 정신부터 완전히 장악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런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해지니 결국 데런을 죽여야 했다.

"..."

츠즈즉-!

루나는 데런이 사라진 허공을 중심으로 결계를 하나 더 구축한 뒤 겉으로 드러나 있던 다섯 개의 서클을 감추었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된 후.

로필렌이 루나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사실 당장의 전황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루나가 필립스 백작령에 있던 로필렌을 호출한 것은, 믿고 써먹을 수 있는 인물이 주변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 컸다.

마왕이 봉인된 후 제국은 2년 가까이 패퇴를 반복했다.

반복된 패전으로 인해 과거보다 대륙의 세력들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륙의 멸절이 정말로 가시화되어가자 종말론을 믿는 변절한 광신도들 또한 속출했다.

시도 때도 없이 광신도들이 튀어나와 뒤통수를 노려대는 탓에 대륙민들 간에 불신과 증오는 나날이 팽배해졌다.

서로를 의지하며 힘을 합쳐도 힘겨울 판에 분열과 갈등만 잦아지고 있었다.

이 힘겨운 시기를 견뎌내는 대륙민들의 정신적인 피로도는, 이제 한계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벨리스크가 무너지면 끝이겠군.'

오벨리스크는 수많은 대륙민들에게 하나의 '희망'과 다를 게 없었다.

거기에 더해 오벨리스크는 마왕의 봉인을 매개하고 있으며, 화이트타워의 컨트롤타워였고, 우주 지도의 데이터를 담고 있었다.

그 오벨리스크가 무너진다면 더는 제국도 국가 단위의 체계를 유지하지 못 하고 와해될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되기 전, 루나가 적절하게 전황을 개선하리라고 로필렌과 헤이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나라면 분명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전황을 역전시킬 계획을 이미 완성해두었을 것이다.

'비책이 있으시겠지.'

로필렌과 헤이든은 루나가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비책을 이제는 공유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허나 두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게.

루나는 짧은 당부만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이전에 지시했던 사안들, 확실하게 끝맺어 놓도록 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루나는 두 사람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로필렌과 헤이든은 잠깐 당혹스러워했다가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다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루나의 추가적인 지시가 전달될 것이다.

로필렌과 헤이든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본 후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레아가 황좌를 찾았다.

자신에게 허락된 황좌가 아닌, 오빠가 앉아 있는 황좌를 찾아갔다.

레아가 복도를 지나 황좌에 다가서자, 긴 시간 잠들어 있는 오빠가 조금도 변함 없는 모습으로 레아를 맞아주었다.

"..."

레아는 찬찬히 오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변한 곳은 없었다.

몇 년 전, 루나는 레이를 보호하기 위해 황좌의 시스템 일부를 황성과도 분리하여 독립시켰다.

그 덕분에 레이는 황성이나 황도의 영맥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도 무사히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레아는 한 주에 한 번쯤 자신의 오빠를 찾아오고 있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죄악감과 음울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으나, 그럼에도 그 감정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레아는 오빠를 바라보며 상처를 입고, 또 그만큼이나 위안을 얻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을 찾기만 하면 벙어리가 된다.

레아가 언제나처럼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

루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아는 근 몇 년 외관이 거의 변치 않은 루나를 바라보다 침을 한 번 삼켰다.

평소 묻기 힘들어했던 질문을, 레아는 오늘따라 입에 담았다.

"오빠를... 구할 수 있을까요...?"

누가 보아도 레이는 그저 죽은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살아 숨쉬는 게 아닌 이미 죽은 사람의 사체를 얼음 관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레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레이의 생환에 회의적인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정말 가끔씩 레아는 루나에게 오빠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루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레아에겐 루나의 그 짧은 끄덕임이 위로처럼 느껴졌다.

헌데 오늘만큼은, 루나가 고개를 끄덕여주는 대신 반문했다.

"...레이를 구할 수 없었다면."

"...?"

"왜 제가 굳이 폐하를 보살폈을까요?"

너무나 오랜만에 레아는 루나에게서 노골적인 적의를 느꼈다.

레아는 잠시 당혹스러워했다가 이내 처연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때는 루나의 적의가 억울했지만, 이제는 레아도 루나의 적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황제 폐하."

"네...?"

"나는, 당신의 운명을 증오해요."

레아의 존재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레아의 운명을 증오한다.

루나는 이를 구분 지었다.

레아는 레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레이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결국 고통스럽고 씁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드는,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레아의 운명은 루나와도 맞닿아 있었다.

뒤틀 수 없는 운명의 변곡점.

그게 바로 레아였다.

"그러니 자신을 연민하지 마세요."

루나가 레아를 지나쳐 걸으며 잠들어 있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마지막까지 후회어린 사과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지 못 했던 그날의 레이를 떠올리며 루나가 말을 이었다.

"레이가 당신을 택한 것에, 자긍심을 가져요. 당신이 그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다는 뜻이니."

루나가 황좌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선 채 레아를 돌아보았다.

할말을 찾기 힘들어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는 레아를 향해 루나가 담담하게 웃었다.

"가서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이 전쟁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언니는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루나가 걱정되어 나온 질문이었다.

허나 루나의 대답은 레아의 예상을 많이 벗어나 있었다.

"쉴 거예요. 이곳에서."

"...네?"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 레아를 루나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페라는 곧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시작할 것이다.

그 스페라조차도 루나와 요하나에게 합공당하는 것은 원치 않을 터였다.

루나가 외부에 노출한 전력만 고려한다면 루나와 요하나의 합공을 가정해도 스페라에게 승산이 넘쳤지만...

스페라도 이제는 루나가 전력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루나나 요하나 둘 중 한 명은 다른 전장으로 떼어놓기 위해 필연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황성을 비롯한 대륙 각지의 요충지에 동시다발적인 공세가 시작된다면 제국 또한 대응해야 했다.

전쟁을 앞으로도 지속하려면 요충지를 포기한다는 선택은 할 수 없었다.

이미 수많은 요충지를 잃었기에, 더 이상의 손실을 내서는 안 됐다.

"..."

제국으로선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단 오벨리스크는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대륙 각지의 요충지에 행해질 공세도 막아내야만 했다.

변절한 광신도들이 암약하고 있었으며 군단의 사기는 음울했고 전세는 기울어버린 지 오래였다.

과연 어디부터 우선순위를 두고 얼마만큼의 전력을 움직여 대응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런 때에 루나는 요하나에게 오벨리스크의 방위를 위임했다.

이를 알고 있는 제국의 수뇌부는, 요하나가 스페라를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루나가 적의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방어한 후 요하나를 지원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레아, 저는 이제까지 희생을 최소화하며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어요."

레이가 부탁했던 대로 말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쯤은... 이기적인 선택을 고르려고요."

레아에게서 등을 돌린 루나가 황좌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마지막쯤은 함께 있으려고 해요."

루나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마냥 이기적인 선택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루나의 성장 속도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확신이 없었기에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느라 미적이고 있었지만,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었다.

특히 루나가 선수를 쳐서 데런을 가두어버린 것이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상황을 급변시킬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급변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을 소모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루나는, 이제는 외부와 단절한 채 이곳에서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택했다.

상황이 급변하기 전 마지막 계단을 올라 결말을 내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건 변명일 지도 몰랐다.

대륙 각지에서 죽어나갈 이들에게 아주 조금쯤은 힘을 빌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루나는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다.

루나가 외부와 단절한 사이 곧 결전이 될 전투가 발발하고 많은 죽음이 따를 것이다.

레이의 소중한 이들 중 몇몇이 결전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루나는 전쟁에서 벗어나... 레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택했다.

그 잠깐의 데이트가 루나의 마지막 이기심이었다.

"..."

레아가 루나의 저의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래도 루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레아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레아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다가... 무언가를 직감하고는 루나를 향해 어렵사리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루나가 레아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 직후 황좌로 향하는 문이 닫혔다.

*

혼란, 공포, 흥분.

전장을 달구는 인간의 격정이 서서히 공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결전이 될 순간이 찾아왔음을 인지한 요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하나의 서클이 요하나의 심장을 중심으로 푸르게 빛났다.

한편, 스페라 또한 요하나가 대기하던 오벨리스크를 멀리서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지 않는다...?"

루나는 황성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대기하고 있을 상황이 아님에도 루나는 대륙 각지의 전투에 개입하지 않고 황성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내게 집중할 생각인가?"

스페라가 피식 웃었다.

만약 루나가 스페라를 요격하기 위해 대륙 각지의 요충지를 전부 포기했다면 스페라는 여기서 굳이 무리하지 않고 물러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스페라는 성검을 움켜쥐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