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4화 (424/446)

외전 - 결전 [3]

[57]

대륙 전역엔 음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예견된 멸절과 투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성 또한 분위기가 침전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나, 아직 천진난만한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모두가 함께 우울한 공기를 밀어내고 활기를 머금었다.

"황제 폐하! 목걸이 예뻐요!"

레아 곁에 붙어 있던 카니아가 레아가 새롭게 찬 목걸이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엘리 또한 레아와 가까이 붙어 앉아 목걸이를 구경했다.

세 사람이 함께 붙어 있는 건 황성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이젠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엘리와 카니아는 날이 갈수록 레아와 붙어있기를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이 차가 적은 편이기도 했고, 또한 레아만큼 '예쁜 언니'도 찾기 힘들었던지라 엘리와 카니아는 자연히 레아에게 이끌렸다.

황제 폐하라 해도 아빠의 동생이라 하니 대하기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레아가 두 사람을 항상 살갑게 대해준 덕분에, 근래 들어 엘리와 카니아는 툭하면 레아를 찾아다니고는 했다.

"..."

맞은 편에 앉은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렌이 담담하게 웃었다.

비록 이 자리에 레이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광경은 카렌이 꿈꾸었던 미래와 닮아 있었다.

카렌은 씁쓸한 행복감을 곱씹으며 두 아이가 레아에게 너무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한편, 알레시아는 묘하게 언짢은 표정으로 자기 딸을 바라보았다.

"엘리."

"응?"

"너희 엄마도 미인이란다?"

알레시아는 자기 딸내미가 다른 사람한테만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게 언짢았는지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턱선을 드러내 보였다.

카렌에 비해선 쬐~금 모자랐고 레아에 비해서는 상큼함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알레시아는 자기 미모가 기본 이상은 간다고 자부했다.

엘리가 두 눈을 깜박이다 엄마한테 한 마디 툭 던졌다.

"아줌마."

"..."

카렌이나 요하나보다 연상이었던 탓에 두 사람보다 먼저 30대에 진입하게 된 알레시아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딸내미의 선 넘은 도발에 분개한 알레시아가 벌떡 일어나 엘리의 뺨을 움켜쥐려고 했다.

엘리는 당연히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하필 문앞에 서 있던 세리아에게 잡혀 그대로 알레시아에게 인계되었다.

알레시아가 엘리의 뺨을 움켜쥐며 한마디 했다.

"귀족답게 품위를 지키라고 하질 않았더냐! 누굴 닮아서 이리 말썽인지 모르겠구나!"

물론 알레시아도 자기 딸이 자기 닮은 건 알고 있었다.

레이와 필립스 백작이 알레시아가 일으킨 사건 사고 탓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잠시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가진 알레시아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슬그머니 흘려보낸 뒤 엘리를 놓아주었다.

엘리는 다시 레아 곁에 딱 달라붙어 않은 뒤 카니아와 함께 자잘한 이야기들을 조잘댔다.

"..."

레아는 자신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엘리와 카니아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자신이 두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런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레아는 엘리와 카니아를 향해 항상 따뜻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엘리와 카니아는 레아의 미소가 좋았다.

그렇게 잔잔한 시간을 보내던 중.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엘리가 알레시아를 휙 돌아보았다.

"엄마!"

"왜 부르느냐?"

삐쳤는지 삐딱한 표정으로 음료를 입에 대는 알레시아를 향해 엘리가 흥분이 가득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아빠랑 첫날밤 얘기해줘!"

"푸흡...!"

알레시아가 마시던 음료를 입에서 주르륵 쏟아냈다.

그꼴을 보고도 엘리는 '첫날밤!'을 연거푸 외치며 기대감을 잔뜩 내비쳤고, 카니아 또한 대놓고 동조를 안 할 뿐이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손수건을 꺼내 흘린 음료를 닦아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디서 또 이상한 책이라도 보고 와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 터다.

알레시아가 작정하고 훈계를 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엘리! 내가 네 나이 때는...!"

알레시아가 딱 엘리의 나이 정도 되었을 때.

그때쯤부터 슬슬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따위의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었다.

집안 서재를 전부 뒤적이며 보물을 찾아 헤매던 추억이 알레시아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

알레시아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 후 자신의 딸내미가 나름 건전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레이와의 첫날밤에 대해 어찌 묘사를 해주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레이와 첫날밤이라...!"

"첫날밤...!"

엘리와 카니아가 흥분 어린 기색으로 알레시아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했다.

그 둘 사이에 낀 레아는 나름 위엄을 유지하겠다고 무심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알레시아를 힐끔거렸다.

모두의 기대 속에서,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준 채 입을 열었다.

"레이와의 첫날밤은 참으로 로맨틱했단다!"

"...?"

이번엔 카렌이 알레시아를 돌아보며 눈가를 좁혔다.

레이와의 첫날밤이 로맨틱했다고...? 솔직히, 첫날밤의 또 다른 관계자인 카렌이 생각하기에 그날의 정사는 로맨틱하기보다 개판에 가까웠다.

허나 카렌이 눈치를 주든 말든 알레시아는 자기 할 말을 이었다.

"네 아빠는 사실 숙맥 같은 면이 있었단다."

"숙맥? 아빠가?"

"부끄러움이 많았다는 의미니라. 그래도 네 아빠 역시 남자는 남자이더구나."

알레시아가 자신의 몸매를 드러낼 수 있는 자세를 어설프게 잡아보며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첫날밤, 이 엄마가 요야한 복장을 갖추고 유혹하니 네 아빠도 정욕을 차마 추스르지 못 하고 거칠게 입을 맞춰오더구나...!"

"..."

카렌이 애들 앞에서 적당히 하라며 알레시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한편, 엘리와 카니아는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알레시아를 바라보다가 카렌을 향해 눈을 돌렸다.

진상규명을 강력히 요구하는 엘리와 카니아의 시선에 카렌이 잠깐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날.

갑자기 침실에 난입한 알레시아는 레이를 물고 늘어져 댔고, 그 이후엔 이제 자기 차례라며 레이에게 엉겨붙으려 했다.

알레시아는 미리 준비한 승부 속옷을 내보이며 레이를 유혹해보겠답시고 끙끙댔는데...

그 광경을 직접 관람했던 카렌의 솔직한 감상으론, 좀 추해 보이긴 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진짜로 못 봐줄 꼴이었단 건 아니었다.

알레시아가 예전부터 자주 무시당하긴 했지만 외모라든가 재능 같은 것이 남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외모든 두뇌든 손재주든 평균은 확실히 상회했다.

가까이 어울렸던 고아들 중 너무 잘난 애들이 많았던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어쨌든, 알레시아의 증언은 약간의 왜곡이 곁들여져 있긴 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카렌이 그날 보았던 레이의 하반신을 떠올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긴 섰으니까.'

세웠으면 성공한 거지. 다른 게 유혹인가.

카렌이 오랜만에 그날의 추억을 찬찬히 상기하며 환히 웃었다.

카렌이 알레시아의 증언을 반박하지 않고 긍정하자 엘리가 의외라는 기색으로 자기 엄마를 바라보았다.

알레시아는 자꾸만 까불어대는 엘리를 보다 결국 한 대 쥐어박았다.

레아는 알레시아를 피해 자신의 품으로 도망친 엘리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어린아이의 온기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 죄책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

황성의 지하시설.

데런은 루나의 호출을 받고 별생각 없이 황성의 지하로 발을 들였다.

황성의 지하도 구조가 꽤나 복잡하여 데런은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지하에 존재하는 광장 중 한 곳에 발을 들인 찰나, 이질감을 느낀 데런이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

쿠웅-!

데런이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광장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마법진이 활성화됐다.

공간을 점하며 얽혀들기 시작한 마법진을 향해 데런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데런이 휘두른 검엔 검강이 피어올라 있었다.

재능이 모자랐으나 천운이 따라주어 어린 나이에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발을 들인 강자가 데런이었다.

하지만 황성 지하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마법진은 데런의 저항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렀다.

데런의 저항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 하자, 데런이 쥐고 있던 대장장이의 검이 거칠게 요동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트드드득!

다음 순간.

데런을 옭아매던 마법진들이 서로 예기치 못 한 간섭을 일으키며 상쇄되기 시작했다.

극히 낮은 확률로 발생할 법한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며 데런의 구속을 무력화시켰다.

파드득!!!

수십의 마법진이 새롭게 전개되어 데런을 휘감았으나 데런은 믿기 힘든 행운을 계속해서 이어가며 마법진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실패할 수도 있었다.

황성 지하에서 마법진을 준비한 주축 중 한 명인 헤이든이 표정을 굳힌 찰나.

무너졌던 마법진 일부가, 누군가의 간섭에 의해 시간을 거스르듯 복구되어 다시 데런을 억눌렀다.

꾸드드드드득!!

결국 데런은 마법진 속에 가두어져 침묵했다.

고치처럼 데런을 뒤덮은 마법진은 푸르게 점멸하다 허공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후우."

황성 지하에 마법진을 준비한 또 다른 주축인 고위 마법사, 로필렌이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로필렌. 그녀는 과거 황실 마탑에서 재직했으며, 얼마 전까지는 필립스 백작령의 방위를 담당하던 마법사였다.

필립스 백작령 인근에는 제국과 루비하 왕국을 잇는 해로와 육로가 전부 존재했다.

루비하 왕국과 원활한 협력을 위해선 필립스 백작령과 그 인근을 사수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필립스 백작이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버티고 있었기에, 방치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루나는 로필렌에게 필립스 백작령과 그 인근 지역의 방위를 위임했다.

또한 제국이 루비하 왕국을 통제하기 위해 편성한 감시 부대의 통솔권 일부 또한 로필렌에게 부여했다.

로필렌은 이제까지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다 마왕이 봉인되고 얼마 안 가, 로필렌은 황성으로 호출되었다.

루나의 부름을 받고 황성에 들어섰던 로필렌은, 헤이든과의 첫 만남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했음을 직감했다.

딸랑이는 딸랑이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딸랑이 1호는 딸랑이 2호를 경계했다.

딸랑이 2호 또한 딸랑이 1호를 마뜩치 않아했다.

단순 이력만 비교하면 딸랑이 2호가 딸랑이 1호를 압도했다.

딸랑이 1호는 황실 마탑의 일개 교수였으며 딸랑이 2호는 황실 마탑의 최고 위원이었으니까 말이다.

허나 오랜 시간 루나를 보조하며 공동 연구를 진행했었던 딸랑이 1호는, 마법적 지식과 역량에 있어 딸랑이 2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순수 역량으론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보니 둘은 꽤 자주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물론, 어디까지나 루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야기였다.

"...!"

슬금슬금 눈싸움을 시작하려던 로필렌과 헤이든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루나가 차갑게 표정을 굳힌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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