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결전 [2]
[56]
마왕이 봉인된 후 약 2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대륙이 처한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상황의 악화는 전투에서의 승패 여부와 조금 별개의 문제였다.
과거에는 세계수와 엘-람이 협력하여 마경이 대륙을 침식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마경과 대륙의 경계선은 긴 세월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대륙민들과 악신의 추종자들 간의 투쟁은 어느 쪽에게든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 했었다.
간간이 대륙의 국가 몇이 패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었으나 그럼에도 끝내 경계선은 유지되었다.
결국 마경과 대륙의 경계선을 결정짓는 가장 중대한 요소는 '별빛 너머 초월자들이 지상에 내리는 권능'이었다.
이 초월적인 존재들의 권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륙민들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해도 마경의 확장을 영구적으로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교황청의 붕괴와 성녀의 죽음 이후, 엘-람의 축복은 더는 지상을 유의미하게 정화해주지 않았다.
지상을 정화해주던 두 축 중 하나가 무너지고 이젠 세계수가 홀로 마경이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 하도록 저지하고 있었다.
헌데 마왕을 봉인하기 위한 작전이 이루어지던 당시.
세계수는 라멘타를 지원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권능을 쏟아부어야 했다.
악신들의 무수한 축복을 홀로 휘감고 전진하는 안소니우스를 라멘타가 막아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대륙을 정화하던 세계수의 영향력이 더욱 감소했고, 필연적으로 이전에 비해 마경의 확장을 저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대륙이 전선을 틀어막는 데 성공해도 마경의 침식이 자꾸만 내륙을 침범했다.
아무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이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갈수록 많은 이들이 알아채 갔다.
좌절한 이들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제국이 대륙민들을 통제하는 것도 어려워져 갔다.
지상은 점점 붉은 하늘에 걸맞은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스페라는 계속해서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었다.
스페라는 과거 안소니우스가 화이트타워를 붕괴시켜 발생시킨 대륙 방위 체계의 틈새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파고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때때로 스페라는 화이트타워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감수하고 전장을 헤집어대기도 했다.
스페라와 무기를 맞댈 수 있는 존재는 대륙 전부를 뒤져도 손에 꼽혔다.
요하나, 울트, 데런 등 제국의 핵심적인 전력은 스페라를 요격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요하나와 울트는 죽을 위기를 수십 번씩 넘겼고, 다행히 현재까지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데런이 창출해냈던 변수가 몇 번이고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데런 또한 아직은 무사했다.
하지만, 스페라를 요격하기 위한 제국의 모든 시도는 단 한 번의 성공도 거두지 못 했다.
요하나도 데런도 울트도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 한 채, 일방적으로 패퇴하기만 했다.
기껏해야 스페라의 움직임을 조금 지연시켰던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도 제국이 구축한 전선은 계속해서 붕괴하였으며, 제국 각지의 화이트타워 또한 상당수 무너졌다.
전선을 밀어내는 스페라의 표적은 명확해 보였다.
오벨리스크.
제국이 대륙을 방위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전략 시설이며, 동시에 이동도 대체도 불가한 시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오벨리스크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
스페라가 무너진 화이트타워 앞에 선 채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오벨리스크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선 아직 몇 가지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무시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
스페라는 2년 동안 오벨리스크를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과거처럼 오만을 떨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며, 결국 2년만에 결전을 앞둘 수 있었다.
이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루나에게 시간을 더 주기 전에 말이다.
*
오벨리스크.
그 제국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 시설의 심부에서, 요하나가 침묵한 채 얼마 전 패퇴를 곱씹었다.
요하나는 홀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울트, 데런, 화이트타워, 그리고 대륙의 무수한 군단들.
그들의 지원을 전부 등에 업고도 요하나는 다시 한 번 패퇴했다.
패배가 익숙하다. 그 어처구니 없는 감상에 요하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스페라. 어두운 광휘를 다루는 변절자.
스페라가 다루는 어두운 광휘는 힘의 형태가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이는 파괴력은 마왕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건 멍청한 착각에 불과했다.
스페라가 지닌 강함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마왕과 필적했다.
더군다나 이지 없는 흉기에 불과했던 마왕에 비해 스페라는 분명 더욱 위협적인 존재였다.
2년 간 패퇴를 거듭하는 동안 요하나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스페라의 진격을 잠시 지연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스페라가 루나의 존재를 의식하며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면, 또한 무수한 대륙민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달성할 수 없었던 성과였다.
그리고 이제... 요하나는 스페라로부터 오벨리스크를 지켜내야 했다.
오벨리스크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방어 시설들은 여럿 존재했으나 스페라를 상대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게 끝이었다.
루나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오벨리스크를 지켜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루나는 요하나에게 스페라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요하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오벨리스크를 포기하고 퇴각할 수도 없었다.
오벨리스크는 최후의 보루였다.
지켜내야만 했다.
"..."
츠즉!
지친 표정으로 고뇌하고 있는 요하나의 앞에 리실로테의 환영이 나타났다.
리실로테가 암담해 보이는 요하나를 향해 빈정댔다.
[참으로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구나.]
"..."
요하나가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빈정대는 리실로테 덕분에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좌절하고 있어서는 안 됐다. 2년 간의 혈전이 정신을 깎아 먹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심기를 날카롭게 다스려야만 했다.
루나가 없더라도, 요하나 혼자서 스페라를 막아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조력자들을 잘 활용한다면 이 암담한 위기를 타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요하나가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때.
리실로테가 짓궂게 웃었다.
[데런, 그 아이는 오벨리스크 방위전에 참전하지 못 할 거야.]
"...?"
[언제 '변덕'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가 다가왔으니,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손발을 묶어야 하겠지.]
데런을 지원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마음을 바꾸는 순간 제국은 데런을 제압하거나 죽여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위험한 시점이 다가왔다.
이제는, 도박을 사랑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언제 마음을 바꾸어 배반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중요한 시점에 배반이 이루어져 데런이 불순한 행동을 보인다면, 사태를 수습하기도 힘들었고 데런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도 극히 어려워졌다.
그렇기에 데런을 위해서라도...
이변이 발생하기 전 미리 제압해 가두어 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세계수의 축복도 한계에 달했어. 그 엘프에 빠져 있는 아이도 더는 도움이 되지 못 할 거야.]
울트와 레시나는 게네시스의 힘을 대부분 소모했다.
세계수는 더는 게네시스에 축복을 나누어줄 여력이 없었다.
마경이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지 못 하게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정말로 대륙은 이제 소모될 대로 소모되어 있었다.
[그러니 네가 홀로 막아서야 할 거야.]
"..."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2년 동안 처절하게 싸워왔기에, 요하나는 더 이상 홀로 스페라를 죽여버릴 수 있다고 오만을 부릴 수 없었다.
루나와 합공하지 않는 이상 요하나가 스페라를 저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아니라면, 기적이 한 번 더 필요했다.
"...방법이 있어?"
[네 생각은 어떠니?]
"지금의 나라면..."
[허튼 망상을 품는구나.]
요하나의 생각을 꿰뚫어본 리실로테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영육의 합일을 이룬 네가 공간검의 구현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냐?]
영육의 합일을 이루었기에 도리어 요하나가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는 훨씬 비대해졌다.
공간검의 마나는 제대로 제어되지 못 하면 영혼까지 손상시킨다.
영육이 합일을 이루기 이전에는 그나마 육신에만 마나를 품을 수 있으니 리스크를 낮출 수 있었지만, 요하나는 현재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요하나가 공간검의 마나를 다루다 실수하면, 육신만 부서지는 게 아니라 영혼까지 확실히 부서진다.
육신의 치유는 비교적 쉬웠지만 영혼이 바스러지면 복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르시아조차 처음에는 애를 먹었던 힘이다. 네가 어찌 처음부터 완벽히 다루어 내겠느냐? 자멸할 테지.]
"..."
리실로테의 지적은 합당했기에 요하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육신의 합일을 택한 이상 요하나는 공간검을 익힐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공간검 정도를 제외하면 어두운 광휘에 정면에서 대적 가능한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상황에, 요하나가 결국 짜증을 드러내며 물었다.
"이죽거릴 시간에 답을 내놔, 리실로테."
[거칠어졌구나, 아이야.]
요하나는 10년 가까이 전장을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패색이 가득한 전장을 전전하며 무수한 혈전을 치렀다.
수많은 적들을 죽였고 수많은 전사자들을 보았다.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하나가 그토록 불운한 운명을 택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는 분명 리실로테였다.
리실로테는 섬뜩하게 두 눈동자를 빛내는 요하나를 담담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손아귀를 펼쳤다.
츠즉-!
하나의 서클이, 리실로테의 손아귀로부터 피어올랐다.
은은히 빛나는 푸른 빛의 서클을 피어내며 리실로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겠니?]
요하나가 침묵하자 리실로테의 환영이 답을 해주었다.
[리실로테가 남긴 최후의 강박이자... 원념이며... 영혼의 조각이야.]
"..."
[리실로테가 남긴 마지막 서클을, 오직 너에게 맞추어 조정하고 가공했어.]
그 서클은, 요하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환영'의 본질이었다.
리실로테의 환영은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전부를 요하나에게 건네며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공간검의 부하는 이 서클이 감당할 거야. 한시적이겠지. 기껏해야 몇 분이야.]
그 후에 서클은 붕괴한다.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요하나가 공간검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리실로테는 요하나의 손아귀에 자신에게 남은 전부를 망설임 없이 쥐여주었다.
[너의 천재성이라면 분명... 기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어볼게.]
요하나의 손아귀를 타고 흘러간 리실로테의 마지막 서클이 요하나의 심장을 감싸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굳힌 요하나를 향해 리실로테가 그 어느 때보다 환히 웃으며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