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2화 (422/446)

외전 - 결전 [1]

[55]

"..."

레아는 루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루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레아가 모르는 루나와 레이만의 추억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루나의 이야기에 그 어떤 힐난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레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옅은 처연함이 깃들어 있는 루나의 흐릿한 웃음을 바라보며, 레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만족한 듯 몸을 돌리고 얼마 남지 않은 복도를 걸었다.

"..."

복도 끝자락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저 문을 지나면, 황좌에 잠들어있는 레이와 만날 수 있었다.

레아는 자꾸만 가슴을 뛰게 하는 기대와 흥분을 억누르고자 호흡을 골랐다.

레이. 레아의 오빠. 레아는 오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금세 흐릿해져서, 레아는 이제 어렴풋한 오빠의 인상만을 간신히 떠올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황좌에는 오빠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늙지도 않고 부패하지도 않고, 그저 잠이 들었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 황좌에서 긴 꿈을 꾸고 있었다.

적어도, 레아는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오빠..."

흐릿해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과거의 추억은 언제나 오빠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었다.

오빠는 자주 틱틱댔다. 이해 못 할 착잡함을 가끔씩 머금기도 했다. 괴롭히기도 자주 괴롭혔다.

그럼에도 오빠는 따뜻한 웃음을 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었다.

사실, 레아는 어린 시절에 오빠와 떨어져 지내던 시간이 많았다.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시간보다 보지 못 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럼에도 레아에게는 오빠란 존재가 기억 속에 참 거대하게 남아있었다.

과거부터 레아를 사랑해주던 모두가 오빠를 사랑했기에, 레아에게 오빠의 존재감은 항상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벨라도, 지미도, 카렌도, 알레시아도...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의 모두가 오빠에게 의지했으며 오빠를 신뢰하고 사랑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레아는 '레이의 동생'이었다.

모두가 레아를 보며 레이를 입에 담았고, 레아를 쓰다듬어주며 레이를 추켜세웠다.

참 자랑스러운 오빠였지만, 레아는 때론 모두가 오빠를 추켜세우니 괜히 질투가 생겨 삐딱선을 타기도 했다.

나는 레아인데, 남들에게 레이의 동생으로 불리는 것이 가끔씩은 불만족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철없던 감정과는 별개로, '레이'는 레아에게 있어 분명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의지 되며 멋진 오빠였다.

그 어린 날의 감정만큼은 조금도 희석되지 않고 레아에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레아는 레이를 보고 싶었다.

비록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고 해도, 흐릿해졌던 레이의 얼굴을 마주 보고 과거의 추억을 곱씹으며 힘을 얻고 싶었다.

레아는 나름의 각오를 다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끼익-!

드디어, 황좌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레아를 위해 만들어진 두 번째 황좌가 아닌, 일천 년의 제국 역사를 계승한 진정한 황좌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레아는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며 괜히 자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

오빠를 만나는 자리였기에 황관도 내려놓고 찾아왔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잘 성장했다고 보여주기 위해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미리 예쁘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제자리에 있는지 꼬물거린 레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몇 년을 간절히 바라왔던 기다림을 끝맺을 순간이 다가왔다.

톡-

레아가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황좌가 보였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레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력을 강화하는 방법 같은 것은 이미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레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레이의 모습이 뚜렷해져갔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레아의 보폭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다.

루나는 서서히 멎어가는 레아의 걸음걸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레아에겐 안타깝게도, 루나가 레아에게 건넸던 경고는 심술 같은 게 아니었다.

레아가 꿈꾸었던 구원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

레아의 붉은 눈동자가 레이를 담아냈다.

구멍이 뚫리고 심장이 바스러져 피로 적셔진 가슴이 가장 먼저 눈동자에 담겼다.

거칠게 뜯겨져 나간 한쪽 팔이 그 뒤에 눈에 들어왔다.

레아가 황급히 시선을 움직였지만, 어디를 보아도 난잡하게 헤집어진 오빠의 육신은 오래 쓴 모포처럼 이리저리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차마 머물 곳을 찾지 못 한 레아의 눈동자가 긴 방황 끝에 오빠의 눈동자를 찾아갔다.

이미 생기가 바랜 오빠의... 레이의 눈동자를 레아가 바라보았다.

레이의 눈동자는 거의 감겨 있었다. 그럼에도 그날의 고통과 고뇌가 피로 물든 눈물과 함께 고스란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루나를 향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과 후회가 레이의 마지막 순간을 물들이고 있었다.

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준비해왔던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더 나아가지 못 하고 자리에서 멈춰 서버린 레아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

황성에서 보냈던 시간 동안 레아는 외로움을 떨치지 못 했었다.

뭐라 쉽사리 형용하기 힘든 거리감을 레아는 항상 모두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차마 내뱉지 못 한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 채 억지로 웃음 짓는 그들을 마주하는 게, 레아에겐 고역이었다.

레아가 편히 대할 수 있는 가족은 지미와 벨라 정도였다. 그 두 사람마저도 때때로 발작적으로 치미는 감정을 숨기지 못 하고 길게 침묵하고는 했다.

황성엔 레아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얼굴을 익히고 지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레아는 그 누구 앞에서도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아는 오빠와 재회했을 때 마음 편히 한번 웃어보고 싶었다.

미리 연습도 몇 번 해보았다.

허나 레이와 마주하게 된 지금 이 순간.

레아는 도저히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오... 빠..."

때때로 레아는 억울했었다.

겉모습만 화려하게 치장된 채 마음 편히 웃어보지도 못 하는 시간들이 억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와 재회하고 나서야 레아는 그러한 감정이 자신에겐 과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차마 내뱉지 못 한 아픔과 원망을, 이제야 힘겹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레아는 위로와 구원을 바라며 이곳을 찾았다.

허나 이곳에 남은 것은 죄책과 비애감뿐이었다.

레아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가 붉은 눈가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얼마 못 가 서러운 흐느낌이 레아로부터 흘러나왔다.

레아와 루나를 따라왔던 벨라가,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레아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루나는 두 사람을 그곳에 둔 채 등을 돌렸다.

*

"..."

레아를 황좌로 안내해줬던 루나는 홀로 복도를 걷다가 데런과 마주쳤다.

우연한 마주침일 리는 없었기에, 데런은 루나가 볼일이 있어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자리에 선 채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루나는 침묵한 채 데런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데런이 결국 어색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 왜...?"

"...고생했어."

"...?"

고생이야 항상 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격려에 데런이 두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나는 데런을 지나치며 담담했던 표정을 조금 더 차갑게 굳혔다.

"..."

루나는 데런이 '배반'하지는 않을까 감시하고 있었으나 아직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데런을 택한 초월적인 존재는 아직까지는 대륙을 지원하고자 하는 듯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 동맹은 한시적이었다. 세계수를 제외하면, 종국에 별빛 너머의 모든 존재들이 루나를 적대할 것이다.

루나는 이번 전쟁에서 초월의 편린을 드러냈었다.

허나 데런을 택한 초월적인 존재는 루나가 초월의 편린을 드러냈음에도 여전히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아마도 그 도박을 사랑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이번 기회에 엘-람과 악신들의 출혈을 최대한 끌어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할 작정인듯 싶었다.

최대한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줄타기를 해야 이득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니 아직까지는 대륙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일 터다.

비단 데런을 택한 초월적인 존재 말고도, 비교적 약소한 힘을 지닌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루나가 지닌 위험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루나가 여섯 번째 서클을 드러내는 순간.

판도가 다시 한 번 바뀐다.

아무리 루나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별빛 너머의 존재들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변수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단번에 뛰어넘어야 했다.

루나가 다음에 세상에 드러내야 할 서클의 고리는 여섯 개가 되어서는 안 됐다.

다섯 개. 혹은 일곱 개여야만 했다.

다행히, 그리 긴 인내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루나가 데런과 헤어진 후 서클을 은폐한 채 긴 복도를 지나쳤다.

리실로테의 환영이 복도의 구석에 나타나 루나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

루나가 가장 우선하는 목표는 레이를 구하는 것이다.

현재 레이의 육신과 영혼을 붕괴시키고 있는 저주는 엘-람과 맺어진 영속하는 계약이다.

그 계약을 멈춰 세우고 레이를 구해내기 위해선, 반드시 엘-람이란 존재를 멸해야 했다.

더 나아가 되살아난 레이의 삶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 대륙을 침범한 모든 그릇된 존재들을 정화해야 했다.

[...]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실 리실로테도 확신할 수 없었다.

생전 리실로테가 지닌 역량으로는 별빛 너머의 영역을 재단할 수 없었으니, 당연히 확신 또한 불가능했다.

헌데 그와 별개로... 당장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너무 빨라.]

루나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단지 상리를 벗어난 재능 덕분이라 치부하고 수긍하기에는 도저히 납득하기 불가능할 만큼 빨랐다.

마법사는 기적을 함부로 믿지 않는다.

기적처럼 보이는 결과에도 언제나 원인이 뒤따랐다.

리실로테는 루나의 성장 속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깨닳은 듯 홀로 중얼거렸다.

[변곡점을... 뒤틀 수는 없지.]

결코.

운명의 변곡점을 뒤틀 수는 없다.

설령 시간에 개입할 수 있는 권능을 지녔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초월에 이르게 된 운명의 변곡점을 뒤트는 건 불가능했다.

결과로써 존재하는 존재가 결과를 뒤바꾸는 모순을 행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결코 운명의 변곡점을 뒤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줄기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운명을 맞이하는 시점을 앞당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건 모순이 아니었으니까.

리실로테는 이제야 루나의 성장 속도가 왜 이해를 한참 벗어나 있었는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미...]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거대한 운명, 혹은 거대한 서사의 줄기는 이미 결말이 났다.

그 결말을 맞이하는 시점이 언제인가는 아주 사소한 요소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를 이끈다.

[하...]

리실로테가 천천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600년 전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에, 처음으로 평온한 웃음이 찾아왔다.

리실로테의 원념은 한참을 담담하게 웃었다.

소망을 다한 원념은 이제야 길었던 비애를 내려놓고 떠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리실로테의 원념에겐 루나가 내린 역할이 남아있었다.

[...기꺼이 그 역할을 다하고 이 끔찍하게 길었던 저주를 끝내도록 하자꾸나.]

그로부터 약 2년 뒤.

모두에게 최후의 결전이 될 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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