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1화 (421/446)

외전 - 공략 [3]

[54]

정적.

전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인간과 엘프들이 화이트타워가 세워져 있던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더는 화이트타워는 존재하지 않았다.

"..."

화이트타워를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의 공간이 산산이 조각나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허나 정말로 공간이 조각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단지 '흔적'일 뿐이었다.

세계수의 영역과 중첩되었던 공간은 현실의 차원과 완전히 유리되어 세상 너머로 침전했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세상 너머로 침전한 공간의 잔흔이 공허 속을 떠돌며 만들어낸 물결일 뿐이었다.

공허를 향해 손을 뻗는다 해도 세상 너머로 침전한 공간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마왕은, 확실하게 봉인되었다.

"..."

화이트타워, 화이트타워 인근의 영맥, 세계수의 영역 일부, 세계수의 신기, 세계수의 수호자 라멘타.

그 외에도 수많은 대가를 치른 끝에 마왕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환호성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전장은 그저 고요했다.

필멸자의 인지를 한참 벗어난 초월적인 권능의 충돌을 목격한 이들은... 무력감, 어쩌면 허탈함이나 회의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슴에 품고서 침묵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생존이나 승리의 기쁨이 마음 한편에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

어느새 모두의 시선은 루나에게 옮겨가 있었다.

저것이... 과연 인간일까. 그러한 의문이 입가를 맴돌다 사라진다.

루나는 언제나와 같이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지면에 내려섰다.

전투는 끝났으나 대지에는 여전히 죽음과 열기가 가득했다.

그 불쾌한 풍경을 무표정하게 확인한 루나가 등을 돌렸다.

스페라를 묶어두던 화이트타워 또한 붕괴했으니 그만 황성으로 돌아가봐야 했다.

"..."

이제 거의 다 왔다.

본래의 계획대로, 어그러짐 없이 나아갔기에.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결말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나는 담담한 슬픔을 입가에 머금고서 전장을 떠났다.

모두가 루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성국이 붕괴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마왕이 봉인됐다.

두 사건이 벌어진 짧은 기간 사이에 대륙은 숫자로 환산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물적, 인적 손실을 입었다.

마왕을 봉인한 것을 승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대륙민들에게 그 승전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와 다를 게 없었다.

희열을 느끼기엔 여전히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찌됐든, 전쟁으로 인해 손실이 발생했으니 응당 복구 작업이 뒤따라야 했다.

허나 유의미한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요충지 한두 곳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 했다.

제국을 비롯한 대륙의 세력들은 잃어버린 것을 복구할 여력이 없었다.

대전쟁이 시작된 후부터 대륙은 무너져 내리고만 있었다.

단지 무너져 내리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모두가 발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붕괴 속도를 늦추었다는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마왕을 봉인한 것은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그대로 두었다면 한 달도 되지 못 해 제국이 반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허나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제국이 진행한 작전으로 인해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이 손상되었다.

영맥이 손상되었기에 황도의 방위 기능 또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마왕이 봉인당한 이후 기습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마족들을 선별하여 언제든 황성을 타격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영맥이 손상된 이상 스페라가 선별한 마족들의 습격을 확실하게 막아내기 위해선 루나, 혹은 요하나 정도는 되는 전력이 황성에 상주해야 했다.

스페라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대놓고 빈집을 털겠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침으로써 제국의 핵심 전력 하나를 확실하게 황성에 묶어버릴 수 있었다.

제국 내부에선 황도를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대두되었다.

실리적으로 따졌을 때 꽤 설득력 있는 의견이긴 했다.

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징성이나 명분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성에는 레이가 잠들어 있었다. 황도를 포기하자는 것은 레이를 포기하자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황도를 포기하자는 건 결코 성사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

스페라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고육지책에 가깝기는 하나 어쨌든 루나의 행동반경을 황성으로 제약할 수는 있었다.

허나 고작해야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남은 패가 몇 개 없네."

안소니우스는 봉인 당했다.

철저하게 준비되었던 계획인 만큼 안소니우스가 자력으로 봉인을 탈출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는 스페라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허나 스페라는 화이트타워에 의해 쉽사리 위치가 발각될 수 있었다.

스페라가 직접 움직여 게릴라 전술로 타격을 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정직한 힘 싸움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 그 역시 스페라가 우세했으나, 마냥 대륙을 압도하는 것은 어려울 확률이 높았다.

"...어딜 쳐야 하려나?"

세계수. 혹은 제국.

둘 중 한 곳에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

세계수의 영역 내부에서 엘프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대지 위에 뿌리내린 세계수의 영향력을 먼저 약화시키기 않는 이상, 스페라가 직접 나선다고 해도 엘프들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몇 년만 더 기다리면 대륙을 건넌 마경의 침식이 세계수의 영역조차 무력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 몇 년을 기다릴 여유가 스페라에게 없었다.

"..."

제국을 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나의 발을 황성에 묶을 수 있다 해도 제국 측엔 울트나 요하나 같은 까다로운 전력이 존재했다.

거기에 더해 '데런'과 같은 불확정성 요소 또한 상당히 거슬렸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은 실시간으로 무너져내리며 더욱 많은 대지를 마경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넉넉하게 10년만 지나도 대륙은 물적, 인적 자원의 소모를 견디지 못 하고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시간은 스페라의 편이다. 한때, 스페라는 그리 오판했었다.

허나 스페라 또한 이제는 알고 있었다. 루나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책인지 말이다.

고민 끝에, 스페라가 결단을 내렸다.

"...오벨리스크."

스페라는 최우선 타격 목표를 수정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빠르게 '오벨리스크'를 붕괴시킨다.

오벨리스크는 루나가 메테오를 발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었으며, 또한 화이트타워의 컨트롤 타워였다.

거기에 더해... 마왕을 봉인할 때 서로 다른 두 공간의 중첩을 매개한 시설이 바로 오벨리스크였다.

오벨리스크가 황도의 영맥을 손상시키면서까지 막대한 마나를 끌어들여 서로 다른 두 공간의 중첩을 매개하고 유지시켰다.

만약 오벨리스크가 붕괴된다면, 공간의 중첩이 무너지며 마왕의 봉인 또한 더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젠 오벨리스크가 제국 방위의 중추이자 제국의 약점이었다.

오벨리스크가 붕괴되는 순간.

제국 또한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 또한 필사적으로 오벨리스크를 사수하고자 할 터였다.

"하..."

스페라가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전보다 더욱 충만해진 어두운 광휘가 스페라로부터 너울졌다.

스페라가 성검의 검신에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비춰보고는, 제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마왕이 봉인됐다.

그리고 대륙은 여전히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대륙민들은 마왕이 봉인되었음에도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며 좌절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범인의 좁은 시야로는 이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루나는 마왕이 봉인된 후 잠시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휴식을 가지는 사이.

루나는 레이를 보고 싶다는 레아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레아를 찾아갔다.

레아는 루나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자 약간 당황했다가, 루나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금방 웃음을 머금었다.

루나는 레아보다 앞서 걸으며 레이가 있는 곳으로 레아를 안내했다.

그리 침묵한 채 천천히 걷던 루나가, 참 드물게도 레아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폐하."

"네...?"

"벨라가 폐하를 회임하였을 때."

"...!"

예기치 못 한 화제에 레아가 덜컥 굳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레아를 향해 루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마주했던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서, 레이는 망설이지 않았어요."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레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을 내렸다.

"오직 벨라를 위해서... 레이는 우리를 전부 외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레이는 괴로워했다.

허나 고뇌하지는 않았다.

레이는 괴로워했을지언정 '선택'을 내리기를 주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선택의 기로가 찾아왔죠."

"..."

"기억나나요? 레이가 폐하를 걷어찼던 날."

"..."

레아는 괜히 가슴이 욱씩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루나는 그런 레아를 돌아보며, 미약한 비애감을 목소리에 품었다.

"레이는, 고뇌했어요."

매춘부 아들로 환생했다.

누군가에겐 우습게 느껴질 그 한 문장이, 레이의 삶을 함축했다.

레이의 삶의 시작과 끝에 벨라라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의 최초의 투쟁은 벨라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마지막 투쟁 또한 벨라의 바람과 맞닿아 있었다.

벨라는 그의 전부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레이는 벨라보다 다른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최초의 맹세만은 뚜렷한데, 점점 더 벨라의 존재가 그의 마음속에서 흐릿해졌다.

흐릿해진 기억과 희석되어버린 감정들, 그리고 새롭게 품게 된 애정 사이에서 레이는 방황했다.

마지막 선택을 앞둔 순간... 레이는 벨라에 대한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했다.

벨라의 얼굴, 벨라의 목소리, 벨라의 따스함, 벨라가 해주었던 식사들...

하다못해 벨라가 자신의 딸아이인 레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조차 기억 속에 흐릿했다.

하지만.

레이가 레아를 걷어찼을 때.

벨라가 오열하며 애원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레이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레아가 벨라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루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레이가 고뇌해야 할 만큼 우리의 존재가 레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기뻐해야 할지...

그럼에도 끝끝내 벨라를 향한 맹세를 저버리지 못 한 레이의 결단을 슬퍼해야 할지 루나 또한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그날의 기억을 곱씹으며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는 따스한 사람이었어요."

"..."

"폐하의 존재를 경계했지만, 그래도 레이는 폐하를 사랑했어요."

그렇기에 레아는 레이에게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날의 따스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폐하."

"..."

"구원은 이곳에 없어요."

루나는 그리 단정하면서도 미소지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마세요. 그리고... 언젠가 레이가 눈을 떴을 때, 어색하더라도 환히 웃어주세요."

과거에 레이가 그리했듯.

"따뜻하게, 레이를 맞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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