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0화 (420/446)

외전 - 공략 [2]

[53]

쩌저적!!

화이트타워가 붕괴한다.

반물질 폭격에 노출됐음에도 스페라는 쉽사리 화이트타워를 붕괴시켰다.

스페라가 무너져내린 화이트타워에 발을 디디자, 지평선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 또다른 화이트타워에서 반물질 폭격이 시작됐다.

폭심지와 가까운 거리에 대도시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

섬광과 열기가 스페라를 뒤덮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물질을 활용한 폭격이 중단되었다.

저장되어 있던 반물질이 전부 소모된 탓이었다.

몇 년간 루나가 축적해두었던 반물질이 오직 시간을 잠깐 끌기 위해 전부 소모되었다.

화이트타워는 다시 영맥의 마나를 활용한 포격을 재개했으나, 스페라에겐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스페라는 포격을 무시한 채 달구어진 잿더미 위에 서서 표정을 굳혔다.

츠즈즉-!

"..."

스페라는 초월적인 존재들의 축복이 아무 전조 없이 더욱 강렬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스페라가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더욱 강대해졌다는 의미였으나, 스페라는 즐거워할 수 없었다.

초월적인 존재들이 지금보다도 출혈을 감수해가며 축복을 더해준다? 그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스페라가 성검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라멘타는 인지할 수 있었다.

중첩되던 공간이 어둠에 휩쓸려 괴리되었다가 시간을 역행하듯 복구되었던 그 일련의 과정을, 라멘타는 세계수의 품에서 정확히 인지했다.

완성되어가는 공간의 중첩 속에서.

레멘타는 세계수의 선택과 그 선택의 도박성을 온전히 이해했다.

'...오판했군.'

힘의 크기, 혹은 경지의 문제와는 달랐다.

루나라는 존재는, 필멸자가 감히 꿈꿔서도 안 될 초월로 향하는 잠재성을 품고 있었다.

닿을 수 없어야만 했던 별빛 너머를 침해할 수 있는 초월의 편린이 그녀에게서 너울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멘타는 스페라가 상황을 오판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라에겐 시간이 필요했었다.

안소니우스가 완전히 타락할 시간이, 그리고 대륙에 치명적인 분열을 야기할 시간이 스페라에겐 필요했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대륙에 본격적으로 칼날을 드러낼 때까지 약간의 유예를 두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100년의 세월이 필요한 진보가 누군가에겐 하루 만에 이룰 성취에 불과했다.

스페라는 자신의 '시간'이 더 가치 있으리라 판단했다.

비록 루나가 지닌 '가능성'이 불가해한 수준이라 해도, 별빛 너머 초월적인 존재의 지원을 받는 자신의 시간이 루나의 시간보다 더욱 가치 있으리라고 스페라는 착각했다.

그게 스페라의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비록 준비가 부족하다 해도 스페라는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어야만 했다.

앞뒤 안 가리고 개처럼 물어뜯어 루나에게 시간의 틈새를 앗아갔어야 했다.

허나 스페라는 그리하지 않았다.

스페라는 어쭙잖은 여유를 부렸고, 그것이 결국 스페라가 바라지 않던 결과를 초래했다.

쩌엉!!!!

공간의 중첩이 완성됐다.

중첩된 공간에 들어서 있던 이들의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서로 다른 풍경이 뒤섞여 물감처럼 번졌다.

경험해보지 못 한 감각의 혼란 탓에 중첩된 공간에서 제정신을 유지 가능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물론, 라멘타는 뒤섞여 번지는 풍경을 너무나 쉽사리 건너서 전장에 발을 내디뎠다.

"..."

전장에 섰지만, 라멘타는 여전히 어머니의 품속에 있었다.

본디 어머니의 품속에서 라멘타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범접 못 할 절대자였다.

세계가 라멘타와 함께 호흡한다. 라멘타가 바라는 대로 대지가 감응하여 스스로 변화한다.

이 '영역'은, 라멘타에게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을 상회하는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설령 마왕으로부터 너울지는 어둠이라 해도, 감히 날뛰어댈 수는 없었다.

쩌저적!!!!!

요동치던 어둠의 기류가 상쇄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마왕의 어둠조차도 라멘타의 영역을 제대로 침범하지 못 하고 정체되었다.

이제는 유불리가 역전될 때가 찾아왔다.

마왕의 그 끔찍한 악의는 더는 절대적이지 못 했으며, 마왕이 들어선 영역 속에서 마왕의 아군은 전무했다.

그에 반해 제국의 군단은 아직 붕괴하지 않았으며 루나 또한 상처 하나 없이 전장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공세가 역전되어야만 했다.

분명 그랬어야 했지만.

쯔즈즈즈즉!

"..."

마왕을 지켜보던 라멘타가 잠시 호흡을 늦추었다.

어둠에 담겨 있는 악의의 농도가 계속해서 짙어진다.

안개처럼 번져 나왔던 마왕의 어둠이 이제는 끈적이는 액체처럼 흘러내려 지면을 적셔 갔다.

루나. 그 한낱 필멸자가 드러낸 초월의 편린을 목격한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어쩌면 공포에 가까운 무언가를 쏟아내며 안소니우스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쯔즈즉!!!!!

흐르기 시작한 어둠이 세계수의 축복이 어린 대지를 침범한다.

그와 동시에 라멘타를 둘러싼 대지의 생기가 한층 짙어지며 따스한 섬광을 발했다.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세계수의 축복이 라멘타에게 집약되었다.

이건 이미 필멸자들의 전쟁이 아니었다.

별빛 너머 초월자들의 격양이 서린 대리전이었다.

이 전장은, 더는 평범한 필멸자가 간섭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버렸다.

중첩된 공간 속에 발을 들이고 있던 인간과 엘프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루나와 라멘타가 후퇴하라는 지시를 짧게 전달했다.

그 직후.

수많은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이 뒤엉켜 폭발했다.

!!!!!!!

인간의 지각으론 결코 이해하지 못 할 힘의 격류가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지면에서 솟아난 거대한 나무뿌리가 방파제가 되어 어둠의 물결과 충돌했다.

이미 뒤섞여 번지던 풍경이 그 여파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 허공을 유영했다.

라멘타는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풍경 속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연산을 수백 개 병행했다.

!!!!!!!

마법진을 휘감은 나무뿌리와 어둠의 물결이 연거푸 충돌한다.

얼핏 마왕과 라멘타의 충돌은 단순한 힘 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라멘타는 마왕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어둠의 물결에 맞서기 위해 무수한 술식의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측은하구나."

라멘타는 담담하게 안소니우스를 그리 평했다.

안소니우스는 이지를 잃고 악의에 매몰된 악신의 흉기와 같았다.

스스로 타락을 택했다면 훨씬 치명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안소니우스는 끝끝내 스스로 타락을 택하지 않았다.

결국 악의에 매몰된 악신의 흉기는 불리한 전장에 서길 자초했으며 하찮은 존재들에게도 힘을 남발하였다.

그 덕분에...

루나는 안소니우스가 품고 있는 수많은 힘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라멘타는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리 안소니우스의 악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만약 미리 대비하지 못 했다면 흘러넘치는 어둠에 지금처럼 신속하게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학살 당한 제국군의 희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대비는 충분했고 계획은 성공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스러웠다.

"..."

이제껏 존재치 않았던 악신들의 격양이 끊임없이 안소니우스에게 투영됐다.

수많은 악신의 유물에 이끌린 안소니우스의 육신이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츠즉-!

사령검이 휘둘러진다.

과거와 같은 이지는 없다고 하나 육신에 새겨진 투쟁의 기억이 극의와 맞닿은 궤적을 그려낸다.

악신의 유물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그 무구한 사도의 역사가 극의와 맞닿아 있는 궤적을 한 단계 더 진보시켰다.

비록 악의에 매몰된 악신의 흉기가 그려낸 궤적이라 해도.

그 궤적이 자아낸 유려함은 공간에 가득한 따스한 생기를 절단해냈다.

쫘아아아악!!!!!

갈라진 생기의 틈새로 안소니우스가 전진함과 동시에 악신의 유물들이 스스로 떠올라 라멘타를 겨누었다.

악신의 유물들이 가속했고, 라멘타가 허공에 새겨넣은 마법진이 악신의 유물들을 모조리 막아 세웠다.

미리 유물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어둠을 쏟아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기 시작한 마왕의 전진만큼은, 도저히 막아설 수가 없었다.

"..."

라멘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라멘타는 육신을 하나의 좌표에 고정시키는 걸 대가로 세계수의 축복을 극한까지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다가오는 안소니우스를 막아세우기에 충분하지 못 했다.

단순히 힘의 격차 때문만이 아니었다.

안소니우스의 영혼에 낙인찍힌, 이 세상을 향한 지워지지 않을 원망과 증오가 안소니우스의 육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마지막에 안소니우스를 움직이는 것은 안소니우스가 품은 좌절과 후회였다.

"..."

라멘타가 담담하게 호흡을 골랐다.

근거 없는 확신이긴 했으나 라멘타는 루나가 아직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허황된 가정이긴 하지만, 어쩌면 서클을 하나 더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든, 루나가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 라멘타와 협력한다면 이 전장에서 안소니우스를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라멘타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루나가 숨기고 있는 역량을 더는 드러내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라멘타는, 본래 루나와 합의한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특! 트드드드드득!

허공에서부터.

얼음으로 빚어진 나무의 줄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중첩된 공간의 경계선을 따라 피어난 얼음 줄기가 점점 더 빠르게 성장하며 조각난 풍경을 침식해 들어왔다.

중첩된 공간이 얼음 줄기로 인해 눌어붙는다.

그와 동시에 중첩된 공간 안에 몸을 들인 모든 존재들이 서서히 정지해가기 시작했다.

트드드드드드드득!!!

얼음 줄기가 가파르게 번져나간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가파른 속도로 안소니우스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라멘타가 얼음 줄기를 피워내기 위해 힘을 대거 분할한 탓에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결국 흘러넘치는 어둠이 라멘타의 발끝을 적셨다.

쫘아아아악!!!!!

라멘타가 그려내던 마법진이 사령검에 의해 바스러져 나간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럼에도 라멘타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차가웠다.

결국 안소니우스의 칼날이 지근거리에 다가온 찰나.

라멘타가 미약한 조소를 담아 중얼거렸다.

"...씁쓸한 일이군."

안소니우스가 라멘타에게 손아귀를 뻗기 직전.

안소니우스도 라멘타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의 힘이 전장에 개입했다.

그러자-

쩌즈즉-!

라멘타의 발밑을 적시던 어둠이 과거로 역행하듯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안소니우스의 움직임이 찰나 간 정지했다.

안소니우스가 정지했던 찰나의 시간 동안.

중첩된 공간을 뒤덮어 가던 얼음 줄기가 마침내 라멘타와 안소니우스에게 도달했다.

라멘타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우리의 운명을 위탁하는가."

고작 인간 하나.

또한, 별빛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공포를 드러내게 한 필멸자.

그 필멸자에게 우리의 운명을 위탁한다.

참으로 씁쓸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뒤틀어낸 라멘타가 안소니우스를 향해 얼음 줄기와 함께 손아귀를 뻗었다.

"잠시 함께 무대에서 내려가 있도록 하자꾸나."

마왕.

악신들의 흉기이자, 그들이 이 현실 차원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적인 파이프.

그 마왕을 아주 잠시 동안만 무대에서 끌어 내린다.

그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기대가, 되는군."

들리지 않는 악신들의 괴성을 음미하면서.

라멘타가 마법을 완성시켰다.

다음 순간.

서로 눌어붙은 채 얼어붙어 버린 중첩된 공간이 현실의 차원과 완전히 유리되어 세상 너머로 침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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