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공략 [1]
[52]
아주 잠시.
전장에 선 이들은 푸른 하늘을 보았다.
단지 서클을 활성화시킨 반동만으로 붉게 물들었던 하늘의 색이 바랬다.
온몸을 저릿하게 굳히는 무언가의 존재감에 전장에 선 이들이 호흡을 멈추었다.
마치 그림처럼 얼어붙은 전장의 풍경을,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
마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감히 하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 했다.
시선을 피해야한다는 본능을 이겨내지 못 했다.
본디, 로드 급이란 그런 존재였다.
힘의 형상을 서로 다를지라도, 홀로 국가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존재를 대륙은 로드 급이라 칭했다.
특히, 저 하늘 위에 나타난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제국을 전복시킨 두 축 중 하나였다.
가장 어린 나이에 로드 급에 이르렀다고 평가받으며, 또한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의 손실을 초래한 절대자였다.
츠즈즈즉-!
루나를 감싼 4개의 서클 위로 하나의 흐릿한 서클이 형태를 갖추며 공명을 이룬다.
다섯 개의 서클로부터 발해지는 위압감이 전장을 짓누르며 군단을 무력감에 빠뜨렸다.
"..."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루나를 향했다.
악신들의 챔피언이자 대륙 역사상 최악의 사도라 여겨지는 재앙이 제국을 찬탈한 학살자를 바라보았다.
루나도 마왕도, 이제까지 로드 급으로 구분되었던 존재들의 평균적인 역량을 명백히 상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신의 추종자들은 전장에 출현한 루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그건 자의가 아니었다. 그들이 떠받드는 존재들의 강압에 의한 질주였다.
루나가 비루하고 하찮은 존재들의 질주를 내려보며 서클을 회전시켰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마왕의 어둠을 뒤집어쓴 부정한 존재들은 쉽사리 죽일 수가 없었다.
허나 루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국의 군단이 필사적으로 베어내고 태워버려도 끈적하게 달라붙었던 그 부정한 존재들을 향해...
비가 내렸다.
투두두둑!!
소나기가 쏟아진다.
플라스마 덩어리로 이루어진 소나기가 부정한 존재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부정한 존재들의 육신이 완전히 녹아내려 빗물과 함께 흐를 때까지, 소나기는 그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재생하던 마족의 육체조차 이미 녹아내린 다른 것들과 뒤섞여 지면에 고였다.
깊게 파인 드넓은 웅덩이 속에 용암처럼 녹아내린 액체가 들끓는다.
그 들끓는 호수 위에서, 오직 마왕만이 온전했다.
마왕이 어둠을 품고 루나를 향해 육신을 기울였다.
*
센티아.
그녀는 엘프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서클을 타고난 개체였다.
루나의 출현 이후 센티아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제국이 계획한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헤이든과 협력했다.
제국의 계획은 단순히 화이트타워와 오벨리스크를 잇는 워프게이트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제국은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세 지점의 공간을 일시적으로 중첩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엄두도 못 낼 시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계획의 중추가 바로 오벨리스크였다.
쿠우웅---!!!
지난 몇 년 간.
제국은 황도에 흐르는 영맥의 마나를 오벨리스크로 전송하기 위한 시설을 구축했다.
지금 이 순간 오벨리스크는 황도 아래 흐르던 영맥의 마나를 탐욕스럽게 삼키며 진동하고 있었다.
마나를 전송하기 위한 시설이 과부하되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오벨리스크는 계속해서 영맥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결국 급격한 마나의 고갈로 인해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에 손상이 발생했다.
영맥이 뒤엉키며, 영맥을 동력으로 삼던 황성의 시설 중 상당수가 기능을 상실했다.
가장 먼저, 황도를 수호하기 위한 결계가 동력이 끊겨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트드득!
"...!"
황성에 도착한 요하나는 깨져나가는 결계를 두눈으로 확인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루나에게 언질을 받기는 했으나, 항상 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황도의 방위 설비가 하나둘 정지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황성과 황도의 모든 설비가 정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맥이 손상된 이상 과거와 같은 수준의 방위는 결코 구축할 수 없었다.
영맥이 다시 복구 가능할지, 복구 가능하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미지수였다.
루나와 헤이든을 비롯해 이 계획을 주도한 핵심 인물들은, 이 계획을 실행할 시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의 손상을 피할 수 없으리란 걸 예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획을 강행했다. 이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
화이트타워에 있던 센티아는 '어머니의 기운'이 강해짐을 느꼈다.
센티아는 제국이 무엇 때문에 이런 무리한 계획을 진행했는지 확실하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현 시점에서.
'전력을 드러낸' 루나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안소니우스를 맞상대 가능한 강자는 유일했다.
바로 세계수의 수호자, 라멘타였다.
라멘타는 마경 원정에도 참전했던 로드 급에 이르는 강자였다.
허나 아무리 라멘타가 로드 급에 이르는 강자라 하더라도 세계수의 영역을 벗어난다면 안소니우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의 안소니우스는 평균적인 역량을 지닌 로드 급으론 결코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영역 안에서의 라멘타라면, 마왕이라 칭해지는 안소니우스에 비견되는기적을 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스페라나 안소니우스 같은 규격 외 강자들을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느냐는 것이었다.
스페라는 결코 아무 준비 없이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들어설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충분한 준비를 거쳐 세계수의 축복 자체를 확실히 약화시킨 다음에야 세계수의 영역에 들어서도 들어설 것이다.
안소니우스는 참 우직하게도 제국의 심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안소니우스가 전진하는 방향을 돌리려는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결국 현 시점에서 스페라나 안소니우스를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유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타락한 존재가 당장 발을 디디고 있는 전장을 강제로라도 세계수의 영역으로 개변시킨다.
그 망상처럼 느껴지는 계획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쯔즈즉!!
처음에 센티아는 제국이 세계수의 신기를 일회용 정화 장치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오판했다.
허나 제국이 세계수의 신기를 환원시킨 목적은 '정화'가 아닌 다른 것에 있었다.
화이트타워가 중심이 된 전장과 세계수가 존재하는 엘프의 영역.
그 두 지점을 중첩시키기 위한 대규모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오벨리스크가 황도 아래 영맥의 마나를 집어삼켰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서로 다른 좌표에 있는 공간을 접어 중첩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각 공간에 매개로 삼을 것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뿌리로 환원된 세계수의 신기였다.
쯔즈즈즈즈즉!!!
최초의 공명은 미약했다.
허나 공간의 중첩이 진행되어갈수록, 뿌리로 환원된 세계수의 신기는 더욱 강렬하게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신기와 공명을 이루는 존재는, 다름 아닌 엘프의 영역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본체였다.
"..."
점점 더 '어머니의 기운'이 강력해진다.
센티아는 고향 땅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길고 긴 세월 속에 수많은 진리와 경험을 축적한 센티아였으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몹시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저 망상으로 끝났을 아이디어를 제국은 실재로 구현시키고 있었다.
그건 마법사로서 순수히 감탄할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쩌엉!!!!!
하늘이 요동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의를 품은 마왕이 루나에게 향했다.
허공을 밝고 선 루나는 하늘 위의 태양을 어둡게 느껴지게 할 만큼 눈부신 섬광을 쏟아냈다.
구름을 밀어내는 화력이 대기를 달구며 어둠과 맞부딪쳤다.
루나는 번져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손아귀를 말아쥐었고, 그와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사방으로 흩뿌려진 화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
찰나 간 어둠을 떨쳐낸 빛줄기가 어둠의 중심에 닿는다.
전장에 있던 절대다수의 존재들은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의 향연을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몸을 떨었다.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은 하늘에서 번져오는 열기를 막아내기 위해 애를 썼으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차마 하늘을 올려보지 못 했다.
극소수의 인물만이 하늘에서의 공방을 어렵사리 인식했다.
제국의 대마법사가 발하는 마법은 일반적인 상리를 아득하게 벗어나 있었다.
저 하늘 위에선 응축된 화력이 폭발하며 폭풍이 터져 나왔고 그 극악의 환경 속에서도 정적으로 구축된 온갖 난해한 마법진들이 연속해서 발현되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안소니우스는 밀려나지 않았다.
루나가 발한 마법들은 안소니우스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지 못 했다.
간신히 어둠을 뚫어내고 타오르는 섬광과 얼어붙은 뇌전이 안소니우스에게 작렬했음에도, 안소니우스는 비틀거리지조차 않았다.
루나는 단지 안소니우스를 잠시잠깐 주춤거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조차도 경이로운 성과였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쫘아악!!!
안소니우스가 보유한 무장들이 루나를 꿰뚫기 위해 하늘로 치솟았다.
안소니우스의 무장들은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악신의 저주를 머금고 있었다.
루나는 공간을 뒤틀어내는 결계를 구축하여 잠깐의 시간을 확보한 뒤 정령의 도움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최고위 바람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루나는 그 기동성만큼은 마왕이라도 추적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나는 지금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황도 아래 영맥의 손상까지 감수하며 진행되는 공간의 중첩이 완성될 때까지 화이트타워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루나는 결국 정면에서 마왕을 저지하지 못 했다.
끼기긱!!
마왕을 중심으로 너울지는 어둠이 화이트타워에 닿았다.
아직 미약한 어둠이었으나 그 결과는 미약하지 않았다.
공간을 중첩시킨다는 고도의 대규모 마법은, 약간의 간섭만으로도 붕괴되기 쉬웠다.
제국이 준비한 마법이 극소량이라 해도 마왕의 악의에 간섭받기 시작한 순간 중첩되던 공간이 다시 괴리되기 시작했다.
센티아가 비관적인 예측대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담담히 물었다.
"...방법이 남아있나?"
센티아는 내심 방법이란 게 남아있기를 바랐다.
답을 요구하는 센티아에게 헤이든이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쉽게 되었군."
그래, 아쉽게 되었다.
기왕이면 이대로 성공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허나 흐릿하게나마 다섯 번째 서클을 드러낸 루나를 상대로도 마왕은 물러서지조차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드러내야 했다.
루나가 지닌 힘을 말이다.
드드득-
"...?"
마왕의 영향력에 의해 무너지던 마법을 지켜보던 센티아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이미 마왕의 악의에 의해 손상되어 복구하기 힘들었던 마법의 축이 전조 없이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되돌아... 간다?'
보강? 복구?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단어 그대로 되돌아간다.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마법 같은 게 아니다.
센티아 또한 고강한 마법사인 만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권능에 닿아있는 힘이었다.
이 권능에 닿아있는 힘의 주인은 하늘에 서 있었다.
손상된 마법의 축이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며.
공간의 중첩이 완성됐다.
쩌엉!!!!
일순.
전장에 선 모두의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그와 함께 센티아는 어머니의 축복이 진정 전장에 흘러넘치기 시작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직후.
중첩된 공간의 틈새를 넘어 세계수의 수호자인 라멘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