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혈전 [8]
[51]
지평선 너머에서 어둠이 너울진다.
죽음을 형상화한 듯한 그 너울짐을 마주하며 군단이 몸을 떨었다.
홀로 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마왕은 더는 단신조차 아니었다.
악신의 추종자들과, 원념만이 남아 움직이는 사체와, 악의에 의해 변질된 마물들이 어둠과 함께 너울지고 있었다.
마왕이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별빛 너머 악신들의 요구에 감응한 그들이 마왕에 이끌려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이제 제국의 군단은, 마왕의 군단과 맞서야만 했다.
너울지는 어둠이 지평선을 완전히 넘어서기 전, 제국군이 선공을 시작했다.
콰아아앙!!!!!
어둠이 너울지던 대지가 굉음과 함께 뒤집어졌다.
제국의 군단이든 마왕을 따르는 군단이든 급조된 병력임은 마찬가지였다.
급조된 군단일수록 병력 간의 연계는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전열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물결과는 다르게, 제국의 군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막대한 화력을 적에게 집중시켰다.
화이트타워.
루나가 계획하고 완성시킨 제국의 새로운 방위 시설이 급조된 병력을 정예 군단처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화이트타워는 적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군단의 지휘를 보조했다.
그에 더해 다수의 마법사들이 효율적인 화력 투사를 가능케 하는 중계기의 역할 또한 수행하고 있었다.
병력은 급조되었으며 사기는 바닥을 기는 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군단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부정한 존재들을 불태웠다.
쫘아아아악!!!!!
화이트타워의 요격 기능이 활성화되며 탑의 중심부로부터 샛노란 광선이 발사됐다.
아찔하게 느껴질 만큼의 열기가 제국군의 머리 위를 지나 지평선을 불태웠다.
인근 영맥의 마나를 동력으로 활용한 공격인 만큼 그 화력 또한 절륜했다.
우러나온 제국군의 함성이 전장을 달구었다.
"저 역겨운 새끼들이 감히 우릴 우습게 보고...!"
"다 태워버려!!"
부정한 존재들이 막강한 화력에 휩쓸려 쉽사리 무너져나가자 제국병들은 잠시 잠깐 용맹을 되찾았다.
허나 그 건방진 자만은 오래가지 못 했다.
제국의 군단은 급조되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우수했으나, 이제까지 패퇴했던 제국의 군단들 또한 마찬가지로 강대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패퇴했던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 때문이었다.
마왕. 단신으로 제국의 군단과 요새를 무의미하게 만든 악신의 사도.
그 존재를 저지하지 못 한다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
잠시잠깐 들떴던 제국병들은 이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제국의 군단이 쉬지 않고 화력을 쏟아부어 대지를 불태웠으나, 그럼에도 저 너머의 어둠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뭣...?"
아무리 화력을 집중시켜도 너울지는 어둠은 느려지기는커녕 더욱 거쎄게 요동치며 밀려들어 왔다.
용맹을 드러냈던 제국병들이 하나둘 공포에 질려 몸을 굳혔다.
어둠이 가까워질수록 군단의 여기저기서 거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악...!!"
"히익!!!"
죽은 사체가 일어선다.
끔찍한 환영이 눈앞을 가린다.
믿고 있던 병장기가 빛을 잃고 문드러졌으며.
어둠에 노출된 육신은 잿가루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템플러!!"
"신성 결계를 전개해라!!"
지휘관들은 반사적으로 성직자를 찾는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성직자의 신성력은 그 어떤 괴이한 힘과 맞닥뜨렸을 때도 위력을 발하는 축복이었다.
허나 이 전장 위에서만큼은.
성직자가 발하는 신성은 다가오는 어둠 앞에서 촛불보다 무력했다.
그들의 신성은 꺼질 것 처럼 흔들렸으며,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엘-람은 끝내 그들에게 기적을 선물하지 않았다.
쫘아악!!
아직 생존해있던 악신의 추종자들이 마왕의 어둠을 덮어쓰고 제국의 군단을 헤집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어둠 속에서 의미 없는 신성을 찾으며 악의와 맞서야만 했다.
"..."
전장에 참전한 엘프, 라파엘라는 대지를 변색시키는 어둠을 피해 물러나며 섬광을 쏘아냈다.
라파엘라가 쏘아낸 섬광이 부정한 존재들을 꿰뚫었으나 라파엘라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이건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라파엘라는 지금 이 전장이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인간이고 엘프고 도주하지 못 한다면 무력하게 죽을 것이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라파엘라가 거칠어진 호흡을 억누르지 못 하고 섬광을 쏘았다.
라파엘라가 쏘아낸 섬광은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부쉈다.
"..."
너무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마음에 이는 그러한 충동을, 대부분의 삶을 어머니의 품에서 보냈던 라파엘라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라파엘라는 섬광으로 이루어진 화살을 다시 한번 억지로 시위에 걸었다.
바로 그 찰나.
예기치 못 했던 변화가 찾아왔다.
츠즈즉!
"...?!"
라파엘라에게 익숙한 기운이 지면을 타고 흘렀다.
그와 함께 라파엘라가 시위에 걸었던 미약한 섬광이 급격히 밝기를 키웠다.
라파엘라는 온몸에 생명력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건 분명 긍정적인 변화였으나, 라파엘라는 도리어 분노부터 토해냈다.
"그 부산물들이 설마...!!"
*
화이트타워의 최하층 중심부.
그 중심부의 지면에는 라파엘라가 건넨 엘프의 신기가... 심어져 있었다.
헤이든은 단어 그대로 엘프의 신기를 지면에 심어 넣은 후 필요한 작업을 속행하기 시작했다.
센티아. 그런 이름을 지닌 엘프가 헤이든의 작업을 지켜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협조하라 하였으니 저지하지는 않겠지만."
동족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센티아는 감정이 매우 희박해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둔한 판단이다, 인간."
헤이든은 센티아가 왜 그런 평을 입에 담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센티아가 보기에, 헤이든을 비롯한 인간들은 세계수의 신기를 일회용 소모품처럼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센티아의 예상은 일부 옳았고 또 일부 틀렸다.
헤이든이 작업을 이어가며 입을 열었다.
"모든 인간이 우둔한 것은 아니오."
"..."
"엘프가 인간을 비루한 종족이라 무시하는 건 관심 없소만, 나를 우둔하다 무시하는 건 몹시 거슬리는군."
헤이든이 썩 진지하게 그리 중얼거리며 작업을 계속했다.
현재 헤이든과 센티아는 세계수의 신기를 '환원'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신기는 세계수가 세상에 내린 태초의 뿌리로 제작되었다.
즉, 세계수의 신기를 환원시킨다는 건 태초의 뿌리로 형상과 성질을 되돌리겠다는 의미였다.
태초의 형태로 되돌아간 세계수의 신기는 인근의 대지에 싱그러운 생명의 축복을 흩뿌릴 것이다.
그 축복은 분명 따뜻한 기적을 선사할 것이다.
허나 세계수의 신기가 축복을 흩뿌릴 수 있는 시간은 매우 한시적이었다.
엘프의 영역과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에서 신기를 환원시킨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세계수의 본체와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신기를 뿌리로 환원시켜봤자 홀로 괴리된 뿌리는 결코 긴 시간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한시적으로 일대의 정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신기를 단발성 축복을 위해 소모한다는 건 정말 너무나 비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더군다나 마왕으로부터 너울지는 악의라면... 환원된 세계수의 신기마저도 손쉽게 잡아먹을 수 있었다.
"..."
센티아와 함께 화이트타워에 들어선 다른 엘프들 또한 불만을 드러냈다.
허나 그럼에도 모든 엘프가 헤이든에게 협력했다. 그게 어머니의 뜻과 맞닿아 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화이트타워 바깥의 전장에선 혈전이 치러지는 동안.
인간과 엘프가 협력하여 세계수의 신기를 환원시킬 준비를 마쳤다.
츠즈즈즈즈즉!!!!
마침내.
환원이 시작된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지면으로 파고든 세계수의 신기가 따스한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부드러운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싱그러운 생명의 축복이 대지에 내려앉으며 부정한 어둠을 일시적으로 정화해냈다.
"...!"
전장의 모두가 변화를 느꼈다.
광기와 공포에 잠식되어가던 제국병이 정신을 차렸다.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기사가 경험해보지 못 한 활력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이건...?!"
세계수의 신기가 부여한 축복의 효과는 엘프들에게 더욱 극적이었다.
엘프들은 잠시잠깐 고향으로 귀환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축복이 지속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엘프들은 고향에서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허나 도리어 엘프들은 분노했다.
지금 이 기적의 대가가 세계수의 신기임을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잠깐의 기적을 활용해 전쟁을 이길 방법이라도 있었다면 그리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방법이 없었다.
마왕으로부터 너울지는 어둠은 벌써부터 세계수의 신기가 발한 기적을 지워내며 다시 흐드러지려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의 상황에 센티아가 헤이든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거대한 진동이 화이트타워를 뒤흔들었다.
쿠웅---!
"..."
황실 마탑. 그곳에 있는 오벨리스크가 화이트타워와 공명한다.
오벨리스크로부터 발해진 막대한 에너지의 파장이 멀리 떨어져 있던 센티아에게까지 닿았다.
센티아는 가만히 마나의 흐름을 지켜보다 무언가를 깨닫고 중얼거렸다.
"...알겠군."
센티아의 목소리에는 흐릿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네놈들이 감히. 어머니의 품에 저 타락한 존재를 끌어들일 계획인가."
"그렇소."
헤이든이 담담하게 답했고 센티아도 더는 헤이든을 추궁하지 않았다.
마왕이란 존재를 제거하거나, 하다 못 해 억제하지라도 못 하면 세상은 이대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야 된다는 것에는 센티아도 납득했다.
허나 심각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저 존재를 막아 세울 수단이 너희에게 남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다른 세 지점의 공간이 중첩될 것이다.
센티아는 제국이 준비한 계획을 알아챘기에 더욱 비관적인 예측을 드러냈다.
마왕이, 방금 전 발생한 거대한 힘의 파동에 반응해 화이트타워를 향해 급격히 가속하고 있었다.
마왕이 화이트타워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구축 중인 마법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왕의 접근을 막아내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결정적인 순간' 마왕의 힘을 일부 제약하거나 상쇄시켜야 했다.
그건 불가능한 전제이지 않은가.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센티아가 드러내자 헤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 직후.
!!!!!!
뇌전이 지상에 내리꽂혔다.
천공에서부터 집약된 마나의 덩어리들이 뇌전의 폭우가 되어 찰나의 순간 어둠을 밀어내고 시야를 밝혔다.
센티아를 바라보던 헤이든이 조소를 머금은 채 감탄했다.
"당신의 안면 근육이 전부 퇴화한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나 보오."
센티아의 얼굴은, 명백히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헤이든이 만족스럽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문 기회이니 마음껏 경악하시오."
오벨리스크와 화이트타워가 만들어낸 워프게이트로부터.
누군가가 전장에 발을 들였다.
붉은 하늘이 찢어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