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17화 (417/446)

외전 - 혈전 [7]

[50]

"..."

시야가 섬광으로 가득했다.

스페라는 휘몰아치는 화염 속에서 열기 어린 호흡을 내쉬었다.

섬광이 번쩍이기 직전, 스페라는 두 번째 개안을 이룬 눈으로 검게 빛나는 물질을 확인했다.

그 물질을 대체 무엇이라 칭해야 하는지 스페라는 알지 못 했지만, 적어도 그 물질에 내재된 특성이 무엇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별 희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망상해보기조차 힘든 기이한 물질이었다.

매우 생소했으며, 또한 극소량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파괴적이었다.

스페라는 과거에 루체른을 초토화시킨 '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품고 있던 궁금증을 해결한 스페라의 표정은 별로 유쾌해보이지 못 했다.

쿠구구구구!!!

섬광과 불길이 잦아들며 열풍이 불어닥쳤다.

간신히 시야가 확보되려는 찰나, 재차 섬광이 번쩍였다.

!!!!!

"..."

스페라가 짜증을 견디지 못 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두운 광휘는 마나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힘을 상쇄하고 압도해서 잡아먹는다.

그렇다보니 도리어 순수한 물리력만으로 이루어진 화력의 투사가 거추장스럽게 다가왔다.

스페라는 일단 방어에 집중했다가 시야가 확보되면 바로 움직이려 했다.

허나 시야를 가린 섬광과 화염이 잦아들려고 할 때마다.

극도로 정밀한 폭격이 연이어 스페라를 덮쳤다.

!!!!!

섬광과 불길이 연속해서 번쩍이며 대기를 달구었다.

물론, 반물질을 활용한 폭격만으로 스페라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기는 건 극히 힘들었다.

순수한 물리력만으로는 어두운 광휘를 비롯한 스페라가 지닌 권능을 뚫어내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더해 스페라는 현재 제국 안으로 깊숙이 진입해 있었다.

현재 폭격을 가하고 있는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벌판이었으나, 아주 멀지 않은 거리에 규모가 상당한 도시가 여럿 존재했다.

스페라를 속여야 했기에 도시에 미리 대피 명령 같은 것도 내리지 못 했다.

그렇기에, 화력으로 스페라를 어찌해보겠다고 한 번에 투사하는 반물질의 질량을 막무가내로 증량시킬 수도 없었다.

"..."

하지만 현재 퍼붓는 화력만으로도 스페라의 시야를 가리고 발을 묶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연속해서 시야를 밝히는 섬광과 화염이 스페라에게 감각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껏해야 서너 번 이어지고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폭격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계속해서 타오르는 섬광과 화염 속에서.

점점 더 확연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스페라가 짜증스럽게 성검을 다시 잡았다.

"하아..."

스페라는 본래 안소니우스의 움직임에 맞추어 일을 벌여서 단숨에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다.

마왕이 날뛰는 동시에 화이트타워를 기반으로 한 방위 시스템이 마비되면 그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제국은 스페라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서 스페라의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거기에 더해, 괴이한 물질을 쏟아부어 스페라의 발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겠다고?"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이런 식의 폭격으로 스페라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허나 그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루나에겐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

쫘아악!!!!!!

스페라가 전력을 다해 성검을 휘둘렀다.

주위를 뒤덮었던 섬광과 화염이 성검의 궤적에 따라 갈라져 나갔다.

스페라가 거의 다 타들어 가 검게 변색된 로브를 찢어 던지며 거칠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준비해 둔 게 충분할지 한 번 보자고."

웃고 있었지만 기분은 전혀 유쾌하지 못 했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말린 건 말린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일방적으로 말렸다.

스페라가 그로 인한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화이트타워를 향해 가속했다.

*

쩌적!

짙푸른 색채의 단검이 바스러졌다.

그 옆에는 잘려나간 실리아르의 시신이 누워있었고, 그 뒤편에는 단검으로부터 터져 나온 섬광에 휩쓸려 무너진 저택이 먼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요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실리아르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요하나는 본래 격렬한 반발을 이어가던 실리아르를 멀쩡하게 제압할 생각이었다.

허나 반발을 이어가던 실리아르가 단검을 꺼내들었고, 일순 위기를 감지한 요하나는 전력으로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

스페라가 실리아르를 포섭한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순수하게 달콤한 거짓으로 실리아르를 현혹했는지, 혹은 어떤 강압적인 세뇌 수단이 동원되었는지는... 조사를 이어간다 해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문제도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실리아르의 변절이 스페라의 악독한 술수 때문이었다고 발표될 것이다.

실리아르 외에도 변절한 고위직의 인물이 있다면 마찬가지의 조치를 취할 터고 말이다.

결국 그들의 명예는 지켜진다는 뜻이었다.

"..."

요하나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과거에도,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성직자가 변절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고위 귀족이나 한 나라의 국왕이 변절하는 경우도 존재했고 말이다.

하지만 타락한 변절자를 구분 가능한 수단은 대륙의 국가들 또한 지니고 있었다.

성직자가 구축할 수 있는 신성 결계 중 '죄악'에 반발하는 종류의 결계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참회의 결계였고, 그와 유사한 결계들 또한 여럿 존재했다.

이러한 신성 결계는 '변절자'를 구분하는데 용이했다.

죄악에 반발하는 종류의 신성 결계를 아주 옅게 구축하여 입구 같은 곳에 펼쳐둔다면, 평범한 이들은 문제없이 결계를 통과할 수 있으나 악신과 접촉한 변절자들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죄악에 반발하는 종류의 결계가 유지 가능한 시간이 짧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시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으나, 지금과 같이 악신의 추종자가 날뛰는 시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

현재 화이트타워와 같은 제국의 핵심적인 시설엔 신성 결계가 곳곳에 전개되어 있었다.

핵심적인 시설로 향하는 주요한 길목에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변절자라면, 웬만큼 기이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신성 결계를 통과할 때 반응해야 했다.

허나 실리아르는 신성 결계를 몇 번이나 통과했음이 분명함에도 이제까지 무사했었다.

요하나가 이곳을 찾지 않았으면, 실리아르는 화이트타워의 중심부까지도 문제없이 접근할 수 있었을 터다.

"...쯧."

요하나가 짧게 혀를 찼다.

실리아르는 어두운 광휘가 깃든 물건을 품었으나 엘-람의 축복이 깃든 결계는 죄를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두 눈으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니 요하나는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수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대륙의 숭배를 받은 존재가 대륙을 버렸다.

그 비참함을 하루아침에 받아들이기에는,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여렸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성직자와 대다수의 대륙민들은 엘-람의 배반을 받아들이지 못 할 것이다.

그렇기에 스페라가 직접 포섭한 변절자들을 깡그리 죽여버려도 이미 대륙에 심어진 종양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번져나갈 것이라는 걸... 요하나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요하나는 종교에 심취한 적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배신감과 가까운 무언가가 가슴을 달구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지긋이 씹은 요하나가 짧게 명령했다.

"...정리해."

일단 실리아르의 변절이 증명됐다.

그 덕분에 반발하던 성직자들의 기세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물론 변절자가 실리아르 외에 더 존재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요하나로선 이곳의 성직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들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까. 답을 얻기 어려운 문제였다.

요하나가 재차 한숨을 삼키는 찰나.

지평선 너머에 보이는 오벨리스크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쿠웅---!

오벨리스크로부터 시작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전달됐다.

좀처럼 보기 힘든 강렬한 힘의 파장이 오벨리스크로부터 너울졌다.

요하나가 의아해하며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데, 데런이 다가와 속삭였다.

"황성으로 귀환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데런이 딱딱한 어투로 루나의 요청을 전했다.

요하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남부 가까이 건설된 화이트타워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제국의 군단이 화이트타워에 결집했고, 울트 또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합류했다.

곧 마왕이 이곳에 닿을 것이다. 전투가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군단의 사기는 지면을 기고 있었다.

단순히 패색이 짙어서 군단의 사기가 이리 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치 있는 희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들도 분명 군단에 존재했다.

허나 곧 다가올 전투에서의 죽음은 그저 개죽음이 될 뿐이라고, 많은 이들이 그런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울트 또한 그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기는 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마왕의 진격조차 유의미하게 지연시키기 힘들었다.

제국은 아득바득 화이트타워에 재차 군단을 결집시켰으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성과 없이 패한다면 그때는 절망적이었다.

'군단을 제대로 통솔하기도 힘들어질 것 같은데.'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무력한 패배가 반복되면 균열이 일 수밖에 없다.

마왕을 찾아가 무의미하게 학살당하라는 명령에 충실히 복종할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제는 결과를 내야 하는 시점이었다.

"...레시나. 그리고 인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울트가 고개를 돌리자 못 보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파엘라였다. 수십의 엘프가 라파엘라와 동행했으나, 모습을 드러낸 건 라파엘라 혼자였다.

라파엘라는 불쾌한 얼굴로 울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유 없는 불쾌함은 아니었다. 울트도 라파엘라의 불쾌함이 불가피하다는 걸 직감했기에 침묵한 채 기다렸다.

라파엘라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귀를 쫑긋거리더니 결국 억지로 울트와 레시나에게 손을 뻗었다.

라파엘라의 손에는 나뭇가지처럼 생긴 물건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언뜻 평범한 나뭇가지처럼 보였지만, 그 정체는 게네시스와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엘프의 신기였다.

세계수가 태초로 대지에 내딛은 12 뿌리 중 하나로부터 태어난 무장.

태초의 12뿌리로부터 태어난 무장은 본래 총 여섯 개가 존재했다.

그중 두 개는 소실됐다. 하나는 사용 불가한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세 개의 신기 중, 두 개가 이곳에 모였다.

"..."

본래 이래서는 안 됐다.

이 신기는 세계수의 수호를 위한 보루였기에, 엘프의 영역 밖으로 반출되면 안 됐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신기도 셋밖에 안 되는데 그중 둘을 외부로 반출한다는 건, 라파엘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왔다. 라멘타가 전한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서 말이다.

"..."

레시나가 조심스레 라파엘라가 건넨 신기를 받아들었다.

레시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 신기를 헤이든에게 보여주었다.

헤이든은 꽤 흥미롭다는 얼굴로 신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헤이든의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라파엘라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까딱 잘못하면 달려들어서 목을 꺾어버릴 기세였다.

다행히 라파엘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준비가 전부 갖춰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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