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16화 (416/446)

외전 - 혈전 [6]

[49]

허무, 혹은 나태의 악신.

먼 과거 그렇게 불리었던 초월적인 존재의 유물이 스페라의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유물에 담긴 힘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면 외부의 영향을 일부 무효화하거나 단절시킬 수 있었다.

유물의 능력은 전투에서도 활용하기 좋았지만, 무엇보다 모습을 은폐하고 은밀히 움직이는 데 용이했다.

유물을 활용한 스페라의 은밀성은 고위급 샤프슈터를 능가했다.

고가의 탐색 장비로도 모습을 은폐한 스페라의 존재를 감지하는 건 극히 어려웠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가 아니라면, 현재로선 모습을 은폐한 스페라를 추적할 방법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애는 쓰고 있겠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제국도 부족하게나마 스페라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허나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스페라를 추적하기 위해선 '어두운 광휘'를 비롯한 그녀가 지닌 힘의 특징을 분석해내야 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스페라가 단편적이나마 본연의 힘을 끌어낸 적이 매우 드물었기에, 제국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자신의 목을 장식한 유물을 얻은 이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제국을 드나들며 '준비'를 갖췄다.

'단번에... 몰아쳐야지.'

지난 몇 년 동안.

스페라는 대륙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어 넣거나 주요한 인사들의 '포섭'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제국의 실질적인 중추인 루나는 신뢰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 주변에 몇 없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세력이 루나에게 고개를 숙였다고는 하나 속으로는 반감을 품고 이를 가는 이들도 넘쳐났다.

그렇기에 루나가 제국 전역을 깊숙이 장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정보'의 수집이나 통제에 있어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성국은 비교적 열약한 전력으로도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했고, 스페라는 그 이점을 활용해 제국을 수월하게 드나들며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강압적 세뇌 혹은 종교적인 감화를 통해 목표로 했던 인물들을 성공적으로 포섭한 것이다.

'화이트타워. 거추장스러운 기능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병기나 시설이라 해도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무너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전선 가까이 건설된 화이트타워를 한두 개 무너뜨린다고 루나가 준비한 대륙 방위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허나 스페라는, 내륙의 화이트타워를 동시다발적으로 무너뜨려 루나가 준비한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 계획이었다.

츠즈즉!

어두운 광휘와 함께, 스페라의 손아귀에 짙푸른 색채의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라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긴 거리를 고요한 바람처럼 움직인 끝에, 스페라는 집무를 보고 있던 한 성직자 앞에 섰다.

스페라가 찾아간 성직자는 글리비아스부터 황실마탑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의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대주교, 실리아르였다.

스페라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짙푸른 색채의 단검을 실리아르의 앞에 놓았다.

탁!

"...!"

실리아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실리아르는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스페라는 침묵으로 실리아르를 축복한 뒤 다시 몸을 움직였다.

스페라가 포섭한 인물은 실리아르만이 아니었다.

스페라에게 포섭당한 자들은 스페라의 뜻대로 동시다발적으로 소요사태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 스페라는 동부와 가까이 위치한 화이트타워를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곳으로 가서, 모습을 드러내고 무력으로 화이트타워를 붕괴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스페라의 출현과 함께 스페라가 몇 년간 포섭해놓았던 제국 내부의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 다수의 화이트타워에 치명적인 손상을 유도할 것이다.

스페라가 포섭한 인물들은 권력을 지닌 제국의 내부자였기에, 제국이 아무리 화이트타워의 방위를 강화해놓았다고 해도 제대로 대처하는 게 불가능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루나가 수년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대륙 방위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화이트타워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게 된다면 제국은 삽시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마무리를 지어야지.'

스페라가 몇 년간 아주 은밀히 진행했던 계획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충분히 공을 들였다.

스페라는 이 전쟁을 빠르게 종결짓기 위해 육신을 은폐한 채로 속도를 높였다.

헌데 벌판을 지나가던 스페라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

잠시 침묵한 스페라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

요하나는 루나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루나는 요하나에게 앞으로 진행해야 할 군사 작전을 설명하며 짧게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었다.

루나는 스페라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허나 스페라는 자신의 위치가 파악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스페라가 자신의 위치가 파악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제국은 얻을 게 많았다.

그렇기에 상황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어도, 루나는 스페라에게 '적당한 선'에서 당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 했다.

성국이 무너지고 마왕이 홀로 전선을 붕괴시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루나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지금까지 파악된 스페라의 동선을 토대로 '선제적 대응'을 요하나에게 요구했다.

현재 스페라는 철저히 모습을 감춘 채 경로를 바꿔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정황 상 제국 측의 변절한 인사와 접촉했음이 분명했다.

과연 누가 배신자인가? 거기까지는 파악 불가했다.

어설프게 스페라에게 추적자를 붙였다가는 곧장 발각될 게 확실했기에 처음부터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국은 스페라의 이동 경로만 파악했을 뿐 누구와 접촉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스페라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획의 주요한 인사들을 통째로 분리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

스페라가 직접 접촉한 인물이라면 고위직 인사일 확률이 높았다.

극단적으로는 특정 교구의 수뇌부가 통째로 변절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부족한 정보만 지니고 '변절자'를 색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허나 요하나는 현장을 분석하고 의심되는 자를 심문해서 변절자를 색출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요하나의 부대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으로 제국의 부대들 또한 시간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황명을 내세워 중요 시설을 확보하고 얌전히 무장 해제할 것을 요구해야 했다.

만약 갑작스러운 무장 해제 명령에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변절의 여부와 관계 없이 일단 목부터 베어야 했다.

까딱 일이 꼬이면 대규모 유혈사태다.

"..."

요하나는 실리아르가 담당하고 있는 교구에 도착하여 호흡을 가라앉혔다.

새삼스레 유혈사태의 발생 가능성이 부담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7년 전의 요하나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에 부담을 느끼기엔 요하나는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

요하나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동부 쪽으로 움직이려는 스페라를 대체 어떻게 격퇴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

스페라는 다수의 화이트타워를 동시에 붕괴시켜 루나가 준비하던 방위 시스템을 마비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라의 움직임은 루나에 의해 실시간으로 파악되고 있었고, 스페라가 꾸민 그 지저분한 수작은 분명 저지될 것이다.

헌데 그 다음에는?

화이트타워를 지켜냈다고 해도, 루나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스페라를 확실히 저지할 수단이 없다.

마왕에 의해 남쪽의 화이트라인이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이지 않은가.

거기에 스페라까지 제국 내부를 헤집기 시작한다면 제국은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요하나가 생각하기에, 하다 못 해 자신이라도 스페라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어야 했다.

허나 요하나가 자기 의견을 밝혔을 때 루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반대했었다.

"..."

루나는 화이트타워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었다.

화이트타워를 무사히 지켜낸다면, 한시적으로 스페라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다고 확언했다.

내륙에서 스페라를 묶어둔 사이 마왕 쪽의 문제부터 우선 해결한다.

그게 루나의 판단이었다. 요하나는 루나를 신뢰했기에, 루나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였다.

요하나가 검 자루를 움켜쥐며 명령했다.

"변절자를 색출해. 협조하지 않는 자는 변절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대응해."

*

"..."

스페라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웬만하면 여유롭게 웃어 보이겠는데, 지금만큼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결코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스페라는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헌데 지평선 너머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화이트타워로부터 발현되는 마법진이, 너무나 정확하게 스페라를 겨누고 있었다.

"..."

순간 생각이 복잡해졌다.

언제부터 발각된 거지? 날 어떻게 찾아낸 거지? 설마 움직인 경로가 노출됐나?

수십의 의문이 꼬리를 이으며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꼬았다.

허나 얼마 안 가 스페라는,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우선 본래 표적으로 삼았던 화이트타워를 파괴한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해도 된다고 말이다.

"...참 대단해."

차분함을 되찾은 스페라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리 중얼거렸다.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루나는 스페라를 탐색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움직임을 읽혔다면 스페라가 준비했던 계획도 일그러질 확률이 높았다.

단번에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들여 준비한 몇 년의 계획이 일그러진다고 생각하니 스페라는 정수리가 잠시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전장의 유불리가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안소니우스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스페라가 입 꼬리를 비틀며 몸을 가속시킬 준비를 했다.

그때, 저 너머에서 적색의 광선이 떨어져 내렸다.

쩌엉!!!

스페라가 선 대지에 불길이 치솟는다.

스페라는 무시하고 육신을 가속시켰다.

어차피 어설픈 요격 병기로는 스페라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한편.

루나가 스페라의 위치 좌표를 주시하고 있었다.

스페라가 제국 깊숙이 진입해준 덕분에 제국 전역의 화이트타워가 연동되어 스페라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특정시켰다.

이제부터 핀 포인트 폭격이 가능해진다.

물론 어쭙잖은 화력으론 스페라의 움직임을 지연시키기도 힘들다.

그러나 다행히도, 루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반물질을 축적시켜 놓았다.

우우웅!

황성에 새롭게 건설된 회색 탑과, 황실마탑의 오벨리스크와, 대륙 각지의 화이트 타워가 공명한다.

본래 워프게이트의 구현에는 수많은 제약이 뒤따른다.

일례로 영맥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 황도의 지면에선 워프게이트의 유지가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건 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측정에 그램보다도 작은 단위가 필요한 극소량의 물질을 통과시키는 극소형의 워프게이트라면, 그 여러 제약들을 일부 무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문제는 막대한 투자를 통해 그런 설비를 만들어 봤자 제대로 써먹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랬다.

츠즉!

아공간에서부터, 검게 빛나는 물질이 극소량 흘러나와 황성과 오벨리스크를 지나 화이트타워로부터 방출됐다.

직전에 화이트타워에서 발사된 광선으로 인해 진공이 된 통로를 반물질이 타고 흘렀다.

스페라는 몸을 가속시키다 말고 검게 빛나는 물질이 면전에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

섬광이 일고 대지가 타오른다.

어두운 광휘는 마나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공격에 대해 강력한 저항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어쭙잖은 마나 기반의 공격보다는 도리어 순수한 물리력으로 찍어누르는 게 효과가 괜찮은 편이었다.

반물질을 활용한 연속 폭격으로 스페라를 죽일 수는 없지만, 꽤 뜨겁기는 할 터다.

"..."

루나가 담담하게 스페라의 위치 좌표를 지켜봤다.

과거에 비해 반물질의 생산 속도가 빨라졌기에, 스페라의 머리 위를 폭격할 여분의 반물질은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

일단 화이트타워의 자동화된 핀포인트 폭격으로 스페라의 발을 묶는다.

그 사이 안소니우스 쪽을 한시적으로라도 일단락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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