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15화 (415/446)

외전 - 혈전 [5]

[48]

울트 가디.

선대로부터 계승된 의무를 이어받았던 최후의 수호자.

그는 한때 게네시스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대륙의 험지를 헤집고 다녔다.

수십 일을 식량 없이 움직이는 것은 일상이었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탐색을 강행하기도 했으며, 수년 이상의 세월을 유적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울트가 이룬 것은 평범한 이의 정신력으로는 결코 수행할 수 없는 광기 어린 과업이었다.

그렇기에 고통을 견뎌내고 의지를 관철하는 것에 한해, 울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혔다.

"..."

전투 초기에 상황을 오판해 팔이 하나 망가졌다.

초회복 같은 상리를 벗어난 능력이 없었던 울트는 방해되는 자신의 육신을 뜯어내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지켜보는 이마저 비명을 내뱉게 할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울트는 마왕이라 칭해지는 역사상 다시 없을 최악의 사도를 마주하고도 생존할 수 있었다.

허나 울트의 생존이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체른에서 벌어진 충돌이 전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제국의 군단은 너무나 일방적으로 패퇴하였다.

"..."

다수의 군단도 무장화된 요새도 의미를 잃었다.

열세의 전력으로도 방비가 가능하도록 충분할 만큼 강회된 요새였으나 제국의 군단이 마주해야 했던 적은 상리를 까마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수년 간의 전쟁 속에서 숙련된 군단은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마왕의 격퇴를 포기하고도 마왕의 움직임이라도 지연시키려 했다.

허나 그조차도 과연 의미 있는 저항이었는가는... 울트조차 회의적이었다.

제국의 군단은 상당한 자원을 투자해 요새로 재건한 루체른을 단시간에 상실했다.

그리고 루체른에서의 패퇴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마왕은 계속해서 어둠을 뒤덮은 채 나아갔고 군단은 계속해서 패퇴했다.

"...머릿수가 의미가 없군."

비슷한 격의 강자 중에서도 머릿수로 밀어붙여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있고 불가능한 존재가 있었다.

마왕은 명백히 후자의 존재였다.

머릿수로 밀어붙여 봤자 접근하지도 못 하고 잿더미가 되어야 했다.

마왕을 휘감은 저주받은 축복은 소모시켜봤자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그나마 타격다운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한 최소한의 수준이 준로드급이었다.

허나 준로드급이나 로드급에 이르는 인물이 마경 원정과 그 이후의 사건 때문에 너무 많이 죽었다.

"..."

새삼 울트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좆 같은지 자각했다.

울트의 곁에는 유능한 성직자가 여럿 달라붙어 박살이 난 팔을 치유하고 있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신성력에 의지하고 있는 꼴이 또 우스워서 울트가 피식 웃었다.

"모순에서 눈을 돌리지 못 한 대가가 이건가..."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돌려야만 했던 모순들.

그 모순들을 용인하지 못 한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울트는 갈 길을 잃은 증오와 후회만이 가득한 마왕의 안광을 상기했다.

울트도, 레이도, 안소니우스도... 성격의 차이는 두드러졌으나, 삶의 가치관과 목적성만은 서로를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울트는 이 좆 같은 상황을 만드는데 기여한 그 둘을 원망하지 못 했다.

또한 그 세 사람 중 가장 열등했던 자신만이 갈망했던 결말에 닿았다는 게 참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울트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도망칠 곳이라도 있었다면 고민이라도 해봤겠지만, 이 전쟁을 이기지 못 한다면 그게 세상의 멸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력으로는 못 막아내.'

일방적인 패퇴뿐이다.

마왕은 루체른을 시작으로 제국의 심부를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전선이 V자 형태로 박살이 나버렸는데, 그 지경이 되어서도 마왕의 움직임을 유의미하게 지연시킬 수가 없었다.

현재 제국은 남부 가까이 건설되어 있던 화이트타워에 인근의 군단을 다시 집결시켜 마왕을 막아내려 하고 있었다.

울트 또한 부상을 최대한 수습한 후 화이트타워에 집결한 군단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군단이 집결해 있는 화이트타워가 무너지면 마왕에 의해 붕괴된 남부 방향의 전선을 복구하기가 극히 어려워진다.

허나 화이트타워는 무너질 것이다.

애초에, 루나가 울트에게 요구한 것은 마왕을 격퇴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게 최대한 힘을 끌어내 달라.

울트를 비롯한 화이트타워에 집결한 군단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희생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법이 있겠지.'

울트는 루나가 무의미한 이유로 희생을 강요할 리 없다고 굳게 신뢰했다.

루나는 수년 전부터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명 군단의 희생을 토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이룰 것이다.

허나 울트는 루나를 신뢰하면서도 걱정을 버리지 못 했다.

'스페라 프리슬란 또한 마왕에 필적하는 역량을 지녔다고 들었는데...'

과연 마왕과 변절한 성녀의 공세를 동시에 대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울트는 이에 대한 회의를 억지로 삼키며 간신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된 팔로 게네시스를 쥐었다.

레시나가 등 뒤에서 울트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

전황은 루나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이지가 억눌린 마왕의 움직임은 단순했고, 또한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마왕에 제대로 대응 가능한 전력이 없으니 마왕의 단순한 움직임은 도리어 제국에 치명적이었다.

안소니우스가 악신들에게 정신을 잠식당하기 전에 이미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한 루나는 담담하게 전선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루체른을 비롯한 제국의 요새가 삽시간에 붕괴하고 마왕은 화이트타워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

이로써 제국은 세계수가 뿌리내린 엘프의 대지로 향하는 육로를 거의 상실하게 됐다.

제국 입장에서도 뼈아픈 타격이었으나, 육로가 끊어지며 더욱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 건 엘프 측이었다.

세계수가 정녕 이 전쟁의 마지막까지 대지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자 한다면, 이제는 루나와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세계수의 입장에서 끔찍한 도박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가꾼 대지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세계수가 선택을 내린다면 세계수의 수호자 또한 과거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루나는 그들의 조력까지 계산하여 수년간 대비책을 마련했다.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안소니우스를 당장 죽이지는 못 하더라도 발 정도는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고, 이미 감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현 상황에선.

안소니우스보다 스페라가 더욱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소니우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악신들의 저주스러운 어둠에 굴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지금 이지를 상실한 인형과 같은 존재가 되어 갈 길 잃은 감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때문에 안소니우스의 움직임은 단순하고 예측 가능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그에 반해 스페라는 자신의 의지로 파멸을 행하려 하고 있었으며, 충분히 지능적이었다.

"..."

스페라는 현재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마왕과 필적하는 존재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지휘관이라 해도 마왕이 필적하는 존재가 암약하고 있는 상황에선 결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최소 스페라의 소재라도 파악해야 손가락이라도 꿈틀거릴 수 있었는데, 스페라 또한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성에서.

루나가 천천히 눈가를 좁혔다.

"...나는 잊지 않았어."

지난 몇 년간 성국이란 존재가 존립할 수 있었던 건 스페라와 루나 양측 모두 어떠한 노림수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국이 붕괴된 현재, 서로가 준비했던 노림수를 드러내야 할 때가 왔다.

몇 년의 시간을 소모하며 준비한 노림수다.

그 노림수를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 한다면 손해가 막대했다.

루나와 스페라 양 측 모두, 준비한 노림수를 반드시 성공시켜 서로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혀야 했다.

그렇기에 움직임이 제약된 루나에 비해 스페라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언제 어디서 스페라가 출현해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까 알 수 없으니 루나의 움직임은 더더욱 제약됐다.

그래야만 했지만.

루나는, 잊지 않았다.

그녀가 단지 망각을 알지 못 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나는 프레체스와 마경의 중심에서 직접 마주했다.

얼마 남지 않은 레이의 삶을 끝자락까지 소모시킨 그 저주받은 존재와의 만남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루나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수천 수만 번을 넘게 마주하며 루나는 프레체스가 재현하고자 했던 어두운 광휘의 특성을 분석해냈다.

기억 속의 변질된 권능을 분석해냈다고 해도 그 힘을 재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힘을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

막대한 예산을 소모해 어두운 광휘의 흔적을 추적하려 해도 어두운 광휘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했다.

암약하는 스페라가 먼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현재로선 그녀를 추적 가능한 수단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륙의 모두가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츠즈즉-!

대륙 각지의 화이트타워로부터 수집된 정보가 루나에게 모여 취합된다.

허공에서 대륙의 지도가 구현되며, 그 위로 붉은 점이 점멸했다.

"..."

찾았다.

잊지 않았기에, 잊을 수가 없었기에 지워내지 못 한 기억이 붉은 점이 되어 깜박였다.

루나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았다.

루나를 찾아온 상대는 레아였다.

잠시 얼굴을 안 본 사이에 키가 조금 자란 레아를 향해 루나가 담담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런 루나를 향해 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가 보고 싶어요."

"..."

레아는 아주 간간이, 정말 조심스럽게 루나에게 레이에 관해 묻고는 했다.

허나 오늘 레아의 목소리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함이 묻어나왔다.

루나는 레아에게 굳이 레이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쓸 생각이 없었다.

다만, 레아는 오빠를 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옅은 기대감과 같은 무언가를 드러내고는 했다.

레아는 적막한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행복하게만 느껴지던 어린 날의 추억을 곱씹었다.

본래도 아름다웠던 어린 날의 추억은 레아의 회상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치장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레아는, 어쩌면 희망에 가까운 무언가를 레이에게서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아가 찾는 온기와 희망은 레이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레이를 마주 보게 되었을 때 레아가 감당해야 하는 좌절의 무게를 루나는 일부나마 이해했기에 이제까지 레이를 보고 싶다는 레아의 간접적인 요구를 무시했다.

허나 이번만큼은, 레아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명이에요."

"..."

"나를 정말로 존중한다면, 오빠와 만나게 해줘요."

"..."

루나는, 굳이 레아의 요구를 거절해서 불필요한 분란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 또한 레아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제는 레아 또한, 선택의 무게를 알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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