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14화 (414/446)

외전 - 혈전 [4]

[47]

중계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에 건설되는 '중계기'란 시설은 제국 요새의 핵심적인 방위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계기는 인근의 영맥을 제어하고, 또한 제국 군단의 마법사들을 지원하고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전장에 넓게 배치되어있는 마법사들의 행동을 일일이 제어할 수는 없다.

이러한 때에, 군단에 속한 다수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하는 걸 중간에서 조율함으로써 효율적인 화력 투사를 가능케 하는 시설이 바로 중계기였다.

중계기의 작동이 중지되면 군단의 마법사들이 투사하는 마법의 화력과 집중도가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국의 군단은 최대한 빠르게 루체른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계기를 재활성화시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 울트의 정신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어둠에 오롯이 집중되어 있었다.

"..."

붉게 빛나던 하늘이 하염없이 짙은 어둠에 뒤덮이고 있었다.

저주받은 축복의 뒤섞임이 만들어낸 어두운 색채가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를 뒤덮고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너울졌다.

비명에 간 원념들이 되살아나 루체른을 뒤덮고 있었음에도, 감각이 좋은 이들은 다가오는 어둠을 마주하며 찰나 간 얼어붙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흐릿하게 일렁이던 어둠은 급격히 루체른을 향해 떠내려오고 있었다.

비명에 간 원념들을 흙으로 되돌리고 중계기 또한 재활성화시켜야 했으나, 그보다 떠내려오는 어둠이 루체른을 뒤덮는 게 빠를 것이라고 울트는 직감했다.

콰앙!!! 쿠웅!!!

군단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해 다가오는 어둠을 저지해보려 했다.

중계기의 조율이 없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군단이 발한 화력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허나 어둠이 태양 빛을 좀먹으며 다가오는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제국의 군단은 다가오는 어둠을 보며 끔찍한 상상을 품었으나, 그럼에도 제자리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법을 쏟아붓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결국 몸으로 적을 막아내야 했다.

쿵!

중무장한 기사 한 명이 가장 먼저 호기롭게 지면을 밟았다.

기사의 이름은 제레미였다. 제레미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였으나, 그가 단지 자신의 경지만 믿고 선두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제레미는 철저히 방어에 기능이 치중된 아티펙트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몸을 뒤덮은 아티펙트 하나하나가 제국에서도 충분히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아티펙트였기에, 제레미는 공포를 떨쳐내며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제레미를 비롯해 약 20명으로 이루어진 특무대가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를 저지해보기 위해 전진했다.

물론 선두에서 전열을 이룬 것이 20명일 뿐, 제국의 군단이 그들의 작전을 보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제레미는 공포와 함께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며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 대지에 발을 들였다.

트득!

단지 번져오는 어둠 속에 발을 들였음에도 아티펙트가 반응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레미를 보호하는 대부분의 아티펙트가 일시에 발광하며 제레미에게 경고를 보냈다.

트드드드득!!

"...?!"

아티펙트가 발광하며 어둠에 저항한다.

허나 얼마 못 가 이음새부터 난잡한 불꽃을 뿜어내던 아티펙트들은 이내 어둠에 침식되어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공격을 마주한 것도 아니다.

헌데 단지 어둠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아티펙트의 내부 회로가 얽히며 동력원이 부식되고 균열을 일으켜댔다.

고성능의 아티펙트가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몇 초 남짓이었다.

마왕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어둠은 저주받은 축복의 뒤섞임이었으며, 또한 마왕의 증오를 기반으로 피어난 하나의 세계였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인 권역 속에서, 인간의 손과 기술로 만들어진 완벽하다 자부되던 아티펙트는 너무나 하찮게 빛을 잃었다.

파가가각!!!

갑주가 낡고 부식된 쇳조각처럼 바스러지며 어둠이 육신을 침범해 온다.

예기치 못 했던 아티펙트의 붕괴에 제레미는 혼란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를 비롯한 선두의 모두가 어둠 속에서 목숨을 버리며 전진해야 하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 하고 주춤거렸다.

그 찰나.

제레미의 뒤편에 울트와 레시나가 착지했다.

"..."

값비싼 아티펙트를 덕지덕지 처바르다시피 한 고위급 기사가 접근조차 하지 못 한다.

그 허황되게 느껴지는 악의의 농도를 앞에 두고 울트가 게네시스를 손에 쥐었다.

게네시스. 세계수가 태초로 대지에 내딛은 12 뿌리 중 하나를 사용해 창조된 병기.

과거에 비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게네시스는 분명 엘프라는 종족이 지닌 최고의 신기 중 하나였다.

화아악!!

저주에서 벗어난 게네시느는 짙푸른 생기를 발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진정 대지의 축복이라 불리어야 할 생기가 번져나가며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호흡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제야 제레미를 비롯한 선두의 특무대 또한 간신히 혼란을 억누르고 검을 고쳐 잡을 수 있었다.

허나 그조차도 잠깐이었다.

쩌저적!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휘둘러졌다.

제레미가 그렇게 느낀 찰나.

수천의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형상을 한 어둠의 궤적이 면전에 다가와 있었다.

궤적의 끝자락에 걸쳐 있던 제레미는 간신이 허리를 뒤틀어 어둠을 회피했으나, 다른 특무대들을 그렇지 못 했다.

파슥!!

검은 궤적에 노출된 자들의 육신이 핏덩이조차 뱉어내지 못 한 채 잿가루처럼 바스러졌다.

팔이 잘려나간 한 특무대원은 절단면을 타고 흐른 어둠에 집어삼켜져 흐르듯이 녹아내렸다.

금속 갑주와 아티펙트가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 한다.

신성력? 특무대원 중 성직자도 존재했으나 이미 빛을 잃고 어둠에 침식되어 무릎을 꿇은 지 오래였다.

정령? 이 어둠 속에 발을 들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모습을 감췄다.

제레미가 생존본능에 의지해 뒷걸음질을 쳤으나 울트는 제지할 수 없었다.

울트는 신음을 삼키며 경악을 드러냈다.

"이게... 대체...!"

울트는 내심 게네시스의 '생기'를 신뢰하고 있었다.

게네시스로부터 흘러나온 생기는 따뜻하지만 독선적이었다.

그 어떤 적의에 직면하든, 물이 지면을 적시는 것처럼 유려하게 적의의 틈새를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생기를 전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울트가 맞닥뜨린 어둠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생기가 뿌리내릴 틈새 하나 없이 악의만이 덧칠되어 있었다.

울트가 믿어 의심치 않던 게네시스의 생기는 어둠을 제대로 상쇄해내지 못 했다.

"레시나 님...!"

울트가 억지를 부렸고, 레시나가 그 억지에 응했다.

레시나로부터 세계수의 축복을 머금은 화살이 빚어져 게네시스에 덧대졌다.

울트는 아직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 한 게네시스의 힘을 쥐어짜내듯 화살에 담아 시위를 당겼다.

쩌엉!!!!!

후폭풍으로 인한 굉음과 함께 한 줄기의 섬광이 어둠 속에 궤적을 새겼다.

얇디얇은 궤적이었으나 결국 레시나와 울트가 자아낸 섬광은 어둠의 중심을 잠시잠깐 밝혔다.

쩍!

찰나간 점멸한 어둠 속에서.

울트는 붉은 안광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이지를 담아내지 못 하는 붉은 안광에는... 갈 길을 잃은 증오와 후회만이 아스라이 흔들리고 있었다.

"..."

안소니우스.

울트가 그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렸다.

동정과 비애감이 섞인 울트의 목소리는 안소니우스에게 닿지 못 했다.

어둠이 짙어진다.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그리 확신한 울트는 레시나가 빚어준 화살을 재차 시위에 걸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인간의 육신으로 세계수의 축복까지 다루게 된 울트는 속도와 은밀 기동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 자신감이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어둠 속에 몸을 들였고, 또한 쉽사리 어둠을 빠져나가 거리를 유지한 채 안소니우스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

레시나가 먼저 위기를 감지했다.

레시나가 곧바로 울트의 어깨를 옆으로 뒤틀며 경고했다.

"좌측!"

"?!"

울트의 바로 좌측에서 어둠이 짙게 뭉치더니 마왕의 형상을 이루었다.

환영? 아니, 환영이 아니었다.

쩌억!!!!!

기교 없이 휘둘러지는 사령검을 울트가 게네시스로 막아냈다.

막대한 충격으로 인해 울트의 아래팔의 뼈가 부러져밀리며 팔꿈치를 뚫고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 레시나를 감싼 울트가 뒤로 미끄러졌다.

허나 여전히 울트는 어둠의 반경을 벗어나지 못 했고, 울트의 등허리 뒤에서 너울지던 어둠이 짙게 뭉치며 마왕의 형상을 이루었다.

쩌저적!!!

샤프슈터, 미르의 하반신이 마왕의 공격을 받아내고 잿더미처럼 바스러져 나갔다.

울트 대신 몸을 던진 미르는 죽어가면서도 시위를 당겼고, 울트 또한 안소니우스를 향해 섬광을 쏘아냈다.

미르가 쏘아낸 섬광은 코앞에 있는 안소니우스에게 닿지도 못 하고 빛을 잃었다.

울트가 쏘아낸 섬광은, 안소니우스의 왼쪽 어깨를 감싼 날카로운 견갑에 박혀 불똥을 튀게 만들었다.

허나 그것이 전부였다.

이내 섬광은 어둠에 침식되어 본래의 형체를 잃고 지면을 기었다.

"..."

울트가 부러진 팔을 움직여보았다.

부러진 팔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덜렁거렸다.

아래팔의 뼈가 팔꿈치를 부수고 나온 탓에 마나를 운용해도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콱!

울트가 팔꿈치를 뚫고 나온 뼈를 아예 뽑아내 버리고는 그 사이로 게네시스를 박아넣어 고정시켰다.

이러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팔과 게네시스를 서로 지지대로 삼아 레시나가 건넨 화살은 제대로 쏘아낼 수 있었다.

게네시스를 팔뚝에 꽂아 고정시킨 울트가 곧장 레시나를 품에 안은 채 몸을 가속시켰고, 안소니우스는 다시금 어둠 속에서 울트의 앞을 막아섰다.

카가가가가가각!!!!!!!!

찰나의 순간 수십 갈래의 섬광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가 침묵했다.

도주에 집중한 울트는 본래 자신했던 것처럼 단시간만에 어둠 속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최소 스물에 이르는 인간과 엘프의 고급 전력이 울트의 도주를 돕기 위해 소모됐다.

신성교단의 추기경이자 제국의 방패라 칭해졌던 위대한 소드마스터 알렉산데르.

그리고 알렉산데르를 위시로 한 남부의 정예군들.

그 대륙의 핵심적인 전력들이 어찌하여 단 하나의 존재에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울트는 자신이 빌어먹게 오만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울트가 직면한 존재는 역사 상 최악의 사도, 마왕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로드급의 협공이 필요한 재앙이다. 어중간한 강자는 접근조차 불가하다.

콰앙!!! 콰아아앙!!!

제국의 군단이 발한 마법이 어둠을 다시 폭격하기 시작했다.

허나 어둠 속에 진입한 마법들은, 내재된 위력을 온전히 토해내지도 못한 채 형상을 잃고 어둠에 삼켜졌다.

루체른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울트는 그 현실을 자각하며.

게네시스를 고정시킨 팔뚝을 눕힌 후 섬광으로 이루어진 화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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