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혈전 [2]
[45]
현재 대륙에 형성된 주요 전선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알리모와 제국의 국경이었던 지역 인근에 형성된 전선이었으며, 남은 하나는 성국의 남쪽에 형성된 전선이었다.
두 전선을 부르는 명칭은 각자의 소속이나 입장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제국에선 일반적으로 각 전선을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이라 칭하고 있었다.
두 전선 중 악명이 높은 쪽은 당연히 동부전선이었다.
동부전선에 비하면, 남부전선은 평화롭다 칭해도 실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울트는 최근 그 악명 높은 동부전선에 파병되어 고된 혈전을 치렀다.
그래도 레시나와 함께하기도 했고, 현재로선 울트를 고전시킬 강자가 거의 존재치 않았기에 나름 견딜만한 수준의 혈전이긴 했다.
헌데, 한참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던 울트는 귀환 명령을 전달받으며 믿기 힘든 소식 또한 함께 전해 받게 되었다.
동부 전선에 비하면 천국과 다를 바 없었던 남부전선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남부전선의 붕괴가 뜻하는 바는 가볍지 않았다. 사실 끔찍한 수준이었다.
울트는 일단 전달받은 명령을 따라 황성으로 귀환하기 위해 움직였다.
울트가 몸을 빼기엔 전선 상황이 여의치 않기는 했지만...
울트가 물러나는 시기에 맞춰, 메테오가 먼 거리에서부터 하늘을 갈라내며 떨어져 전선 너머를 강타했다.
메테오가 떨어진 후 악신의 추종자들은 메테오의 위협 때문에 함부로 집결하지 못 하고 잠시 뒤로 물러났으며, 그 덕분에 잠깐의 소강상태가 동부전선에 찾아왔다.
그 틈에 울트는 신속하게 황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리 오랜만에 들른 것도 아니었기에, 황도의 풍경은 울트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곳은 없었다.
울트가 몇 개의 절차를 거치고 황성 안으로 들어서자, 레이의 아이인 엘리와 카니아가 복도의 벽 뒤에서 고개를 빼꼼빼꼼 내밀었다.
아무래도 생활반경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엘리와 카니아다.
그렇다보니 울트가 임무를 나갔다가 황성에 들를 때면 두 사람은 항상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와 조잘거리곤 했다.
이제까지 간간이 엘리와 카니아의 심심함을 달래주었었던 울트였기에 습관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헌데, 그런 울트를 보고 엘리와 카니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위험한 아저씨다!"
"위험한 아저씨야!"
"...?"
난데없는 비방에 울트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엘리와 카니아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할아부지가 그랬어! 아저씨는 위험한 아저씨래!"
"위험한 아저씨!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
울트는 잠깐 머리가 아팠다.
레이에 이어 레이의 딸내미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저런 소리를 들으니 빈말로도 기분이 유쾌하지가 않았다.
헌데...
가만 생각해보니 억울해하기도 뭐한 입장이긴 했다.
과거에는 울트가 당당했다고 해도, 결국 레이의 근거 없는 비방이 옳았음을 울트가 쇼앤프루브하지 않았던가.
레시나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나는 위험한 아저씨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도 참 믿음이 가지 않는 항변이었다.
"..."
울트가 잠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울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레시나가 살짝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인간 꼬마 아가씨들, 우리는 지금 바쁘니까 다른 데 가서 놀으렴."
레시나 딴에는 나름 친절하게 아이들을 달랜 것이었다.
허나 되돌아온 엘리와 카니아의 대답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지도 꼬맹이면서!"
"엘프 꼬맹이!"
"..."
레시나가 차마 엘리와 카니아의 도발을 참아내지 못 하고 미간을 와락 구겼다.
레시나가 제대로 열이 받았음을 간파한 엘리와 카니아가 후다닥 등을 보이며 뛰어갔다.
"도망가자!"
"도망! 도망!"
물론, 도망가던 엘리와 카니아는 얼마 못 가 세리아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갔다.
울트는 끌려가는 엘리와 카니아를 바라보며 기묘한 탈력을 느끼고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애들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는 대체 어떻게 꼬맹이 시절에 비슷한 연령의 꼬맹이 수십을 잘 제어할 수 있었나, 문득 그런 궁금증도 일었다.
"음..."
울트가 자기 턱을 살짝 매만진 후, 레시나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귀엽게 봐주시기를."
"..."
퍽!
레시나가 투정을 부리듯 울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울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레시나를 달랜 후 황제와 알현했고, 그 뒤 곧바로 루나를 찾아갔다.
루나는 7년 전에 비해서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울트와 대면했다.
울트는 다시 심각한 기색을 내보이며 루나에게 물었다.
"남부전선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붕괴됐어요."
"고작 사흘도 안 돼서 완전히? 그리고... 스페라... 이 변절자를 추종한다는 무리는 대체..."
울트는 정치적 감각이나 인간의 마음을 읽고 거대한 판세를 보는 역량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울트는 스페라와 관련된 사안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
의아함을 드러내는 울트를 향해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교단의 교리와 실제의 현상이 상충될 때, 당신은 무엇을 믿겠나요?"
"..."
초월적인 존재와 초월적인 존재의 영향력이 실존하는 세계다.
교단이 지켜왔던 교리와 당장 체감되는 신의 뜻이 상충하게 될 때, 신실한 성직자라면 과연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겠는가.
"이제까지 믿어 의심치 않던 교리를 배척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두운 광휘를 두른 스페라를 따르겠다는 맹약을 입에 담자, 엘-람의 축복이 강화되는 현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과연 과거의 가르침만을 우선할 수 있겠는가.
성국의 건국 이후 스페라가 성국의 고위층을 장악할 때, 분명 강압적인 수단을 활용한 세뇌 작업도 동원되었을 터다.
허나 지금의 사태는 단지 강압으로 인한 세뇌에 의해 벌어진 재앙은 아니었다.
실제하는 현상이 광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스페라가 뿌린 '종양'은 '낮은 곳'으로 흘러갈수록 더욱 치명적인 위력을 발했다.
"학식 없는 평민 중 신학과 교리를 제대로 배운 이들은 극소수겠죠."
절대 다수의 평민 이하 계층들은 신학 따위는 익히지도 못 했고 최소한의 교리조차 외우지 못 했다.
무지하고 무식한 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듣기 좋은 말에 현혹된다.
그리고 스페라가 내세운 종말론은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본래 역사적으로, 현실이 시궁창에 박혀 있을수록 백성들 사이에선 구원을 내세우는 극단화되고 변질된 종교가 성행하고는 했다.
"..."
성국의 영향권에 있던 세력들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스페라가 조장한 혼란 탓에 유의미한 저항 한 번 이루어지지 못 하고 며칠만에 남부 인근이 완전히 날아갔다.
성국에서 벌어진 사태에 개입하기엔, 루나가 직접 나서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제국 또한 여력이 없었다.
결국.
그나마 남은 남부의 곡창지대도 날아갔고, 전선은 급격히 길어졌으며, 남부전선을 틀어막기 위해 동부전선의 전력을 돌리느라 루나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열었다.
한동안 대륙의 상황은 개선되긴커녕 착실하게 악화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될수록, 스페라가 뿌린 종양 또한 점점 더 대륙을 깊게 침식해 갈 것이다.
루나와 대화를 나누고서 조금 더 상황을 명확히 이해한 울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응...할 수 있겠어?"
"..."
루나가 침묵한 채 울트를 마주 봤다.
루나와 눈이 마주친 울트가 잠깐 버텨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울트는 여전히 루나가 불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울트는 루나와의 첫만남에서부터 루나에게 귀한 물건을 뜯겼다.
울트는 루나에게 '빌려준' 뒤 되찾지 못 한 발레리우스가 아직도 눈가에 아른거리고는 했다.
물론 발레리우스는 이미 한참 전에 낱낱이 분해 당했기에, 빌려준 물건을 되돌려 받은 것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큼..."
울트가 괜히 헛기침을 하자 루나가 시선을 거두었다.
스페라가 대륙에 종양을 퍼뜨릴 준비를 하는 동안 루나가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국이 몇 년 간 종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페라와 루나 양측 모두 지금부터 시작될 전면전을 대비할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울트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나를 황성으로 부른 이유가 따로 있을까?"
"...당신이 아니라 레시나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루나가 레시나를 향해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어머니에 관해서요."
세계수.
어쩌면 이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을 택한 존재.
이제는 세계수와의 암묵적인 연합을, 좀 더 명확히 규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
"..."
파울라는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직 제국의 이름이 찬란했던 시기의 로얄가드, 파울라는 스페라를 지탄하며 검을 겨눴었다.
하지만 파울라는 여전히 무사히 살아있었다.
사지가 잘려나간 것도 아니고 정신이 침식당한 것도 아니었다.
단어 그대로 무사하게 파울라는 살아있었다.
"..."
검을 겨눈 그날.
스페라는 파울라를 비롯한 로얄가드들에게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었다.
[나를 적대할 거야? 나와 갈라서겠다고?]
갈라서길 택하겠다면, 오늘은 그냥 보내주겠다고 스페라는 그리 약조했다.
스페라의 비릿한 웃음을 보며... 그제야 파울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스페라와 적대한다는 건, 결국 찬탈자의 제국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다면 제국은 로얄가드를 다시 받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극소수의 강자를 제외하면 로얄가드는 현존하는 최강의 기사 전력이었고, 그들을 단지 불안하다고 처분하기엔 전황이 너무나도 불리했으니까.
허나 제국으로 되돌아가기를 택하는 순간.
'황자'의 생존은 불가하다.
찬탈자의 제국은 로얄가드가 수호하던 '황자'의 존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
파울라는 스페라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었다.
마경 원정에 참전했었기에, 더욱 스페라의 존재를 긍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얄가드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의무는... 이제 황자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파울라는 황제에게 많은 은혜를 입은 몸이었으며, 황가에 충성했고, 또한 황제의 곁을 지키지 못 했음을 비탄했다.
그렇기에 파울라는 황자만큼은 최후까지 수호하겠노라고, 악독하리만치 굳은 결의를 가슴에 새겼었다.
"..."
그래, 이건 딜레마였다.
대의를 우선할 것인가.
나의 사람을 지킬 것인가.
"..."
"선택했나?"
로얄가드, 티르피츠가 찾아와서 물었다.
파울라는 한참 더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남은 사명은 유일하다."
적어도.
황자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걸어갈 길을 택해야만 했다.
허나 그런 선택을 내리기엔 황자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렇기에 파울라는, 황자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를 수호해야만 한다고 각오했다.
그 어떤 것도, 황자의 수호보다 우선될 수는 없었다.
"사명을 이행한다. 배신자는,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다."
티르피츠 또한 황자를 포기할 생각이 전무했다.
티르피츠가 자리를 비운 후, 다시 한참을 침묵하던 파울라가 결국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본인이 처한 상황이, 파울라의 입가에 조소를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우습군."
상징성만을 지닌 보호받지 못 하는 약자의 삶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허나 그건 피할 수 없는 이치와 같았다.
후계를 위해 정치적 위협을 제거하는 '냉혈'은 지배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그런 냉혈을 갖추지 못 한 지배자의 세력은 결코 오래 존속될 수 없었다.
그리고 제국의 선황은... 인간적인 연민 탓에 어설프게 레이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 결과가 결국 이 꼴이었다.
"하..."
과거의 제국이 레아라는 존재를 결코 용납해줄 수 없었듯.
현재의 제국은 선황의 황자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제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하하..."
그날.
레이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레아만 포기한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레아만... 포기하면 된다고...
레아만 포기하면 더는 누구도 죽지 않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제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남아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레이가 마주했던 딜레마였다.
그리고 오늘.
파울라는 레이와 같은 딜레마를 마주한 채, 선택을 강요받고 선택을 내려야만 했었다.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나?"
그게 너무 우스워서.
파울라가 허리를 굽힌 채 끅끅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