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혈전 [1]
[44]
카일룸에서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작전의 목표를 달성했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전력인 요하나가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에 파견된 제국 측 요원과 샤프슈터들 또한 7할가량이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경우에 따라 전멸까지도 예상했던 작전이었기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할 만했다.
하지만 작전이 성공했음에도 전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도리어, 급속도로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
제국은 현재 남부의 상황을 최대한 면밀히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루나가 수집된 정보들을 살펴본 후 침묵하고 있자니, 잠시 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성직자가 정복을 차려입고 루나를 찾아왔다.
아텐티아라는 신명을 지닌 중년의 남성은 대주교의 직위를 지닌 고위 성직자였다.
아텐티아는 고위성직자 중에서도 과거부터 기꺼이 변화를 추구하며 진보적인 색채를 드러내던 인물이었는데, 현재는 제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루나는 아텐티아가 찾아오자 눈짓도 주지 않고 짧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
아텐티아는 감정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얼마 전 제국이 진행한 작전으로 인해 스페라의 '비밀'이 외부로 드러났다.
숨기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 스페라는, 결코 동화책 속의 악당처럼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겠다!' 따위의 대사를 외치며 자멸을 택하지 않았다.
그딴 식으로 멍청하게 행동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성국을 건국하지도 않았을 터다.
이제까지, 스페라는 자신의 진실된 정체가 밝혀졌을 때를 계속해서 대비하고 있었다.
"..."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지만, 스페라에게 분탕질을 준비할 시간을 준 것은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기적을 이룬 성녀이자 성검의 주인이었던 스페라는 성국의 수좌가 된 후 자신의 상징성과 권력을 활용해 사람들을 포섭해나갔다.
스페라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세뇌하고 감화시킨 뒤 '종말론' 혹은 '심판론'을 그들에게 내세웠다.
스페라가 내세운 종말론의 레퍼토리야 크게 특별할 것도 없었다.
[죄 많은 인간들에게 노한 엘-람께서 세상을 정화시키고자 한다. 세상은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지만, 선택받은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결국 홍수가 나서 세상이 죄다 휩쓸리겠지만 나를 따르면 죄를 사하고 방주에 태워주겠다는 소리였다.
평화의 시기였으면 종말론 같은 것을 내세운다고 큰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였던데다, 엘-람과 악신들의 축복을 동시에 품은 선택받은 존재가 눈앞에 실존하기까지 하였기에...
스페라로부터 시작된 종말론은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신도들을 은밀히 침식해 나갔다.
종말론을 추종하는 이들은 너무나 은밀히 암약하며 번져나갔던 탓에 이제까지는 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스스로를 엘-람의 신도라고 여겼고 실제로도 그랬기에, 종말론을 추종한다 한들 입만 다물고 있다면 '정상적인 신도'들과 구분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제국은 상황을 일부 오판했다.
제국은 스페라의 종말론에 감화된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리라 예상했으나, 스페라가 뿌린 '균열의 씨앗'은 이미 대륙에 깊고 넓게 뿌리내려 있었다.
성국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들은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허나 성국이 와해될 상황이 다가오자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종말론을 추종하는 이들은 정상적인 신도들의 입장에선 '이단'과 마찬가지였다.
헌데 그 이단의 목소리에 혹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붉은 하늘 아래서 이어간 끊임없는 혈전이 대륙민들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 탓이 컸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아텐티아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엘-람께서 부여한 시련입니다."
"..."
"엘-람께선 결코 극복 못 할 시련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갈등과 다툼을 멈추고 속죄하며 주어진 시련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결국 아텐티아가 입에 담은 '시련'은 종말론을 억제하기 위한 논리였다.
변변찮다 해도 제국은 아텐티아의 논리를 밀고 나가야 했다.
스페라를 단지 악신에 의해 타락한 변절자라 선동하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페라의 진실된 정체가 드러난 이후, 엘-람은 더욱 노골적으로 스페라를 지원하며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보니 스페라를 무작정 타락한 변절자라 선동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상적인 성직자'든 '종말론을 추종하는 이단'이든 기도를 올리면 축복은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결국 엘-람이 지닌 권능의 메커니즘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엘-람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본질이 투영된 권능이 일으키는 하나의 현상이 기도와 축복이었기에, 아무리 엘-람이라도 그 현상 자체를 무위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엘-람이 아예 이 세상에서 물러나길 택하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성직자든 종말론을 추종하는 이단이든 기도를 올리면 축복받을 것이다.
물론 특정한 개인에게 더욱 많은 축복과 권능을 선물하는 것은 엘-람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조정 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은밀히 종말론을 추종하는 몇몇 성직자는 짙어진 엘-람의 축복 속에 환희하고 있었다.
"..."
그 광신도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문제를 일으킬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루나는 스페라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루나가 예상한 수위보다도 심각한 편이었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놓였을 때 머금는 광기까지 정확히 계산하기란 루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성직자들을 요직에서 배제할 수도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이어지는데 성직자를 함부로 탄압했다가는 자멸만 부추기는 꼴이었다.
결국, 두 갈래로 나뉜 신도들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를 이단이라 칭하며 진정한 구원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허나, 그들이 바라는 구원은 실존하지 않았다.
이건 버려진 개새끼들 간의 개싸움과 다를 게 없었다.
"...알겠어. 보고한 대로 진행해."
루나는 아텐티아를 내보냈다.
성국은 와해되었으나, 스페라가 공들여 준비한 분탕질은 확실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아텐티아가 주장한 '시련'의 논리를 내세워 혼란을 억제해야하는 수밖에 없었다.
끼익-
루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자 이번엔 헤이든이 루나를 찾아왔다.
헤이든은 현재까지 파악된 남부의 상황을 정리해서 루나에게 보고했다.
"남부가 장악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성국이 자리 잡은 남부가 제국에 비해 열약한 전력으로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던 것은 스페라가 마족이나 마물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제국의 작전이 성공한 이후, 악신의 추종자들이 본격적으로 남부 전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정체가 밝혀진 스페라는 모습을 숨기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종말론' 혹은 '심판론' 따위를 입에 담으며 극도의 혼란을 조장했다.
덕분에 반쯤 내전 상황에 진입하여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하다시피 한 남부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일방적으로 땅덩어리를 헌납했다.
워낙 혼란이 극심한지라 제국도 남부의 정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성국의 영향권이던 남부의 땅덩어리가 다 날아가기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탈출했고, 누군가는 고립되었고, 누군가는 스페라와 함께하길 택했는데,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곡창지대의 재확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남부의 곡창지대는 사태 초기에 날려 먹었다.
거기에 더해 마경의 침식이 시작되며 좁게 형성되었던 남부의 전선이 몇 배는 길어질 예정이었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엘프들의 영역과 분단되는 상황은 막아야 했기에 제국은 길어진 전선을 무조건 감당해야 했다.
헤이든은 돌아가는 상황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뭐... 좆 됐다. 이보다 명쾌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화이트타워가 시험 가동에 들어선 게 희소식이었다.
헌데 얼마 안 가 거대한 재앙과 다를 바 없는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더욱 비관적으로 변한다.
'루나'라는 존재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이건 이미 진 전쟁이었다.
얼마나 더 아득바득 견딜 수 있느냐가 문제지, 승패는 이미 갈려 있었다.
헤이든이 난감한 기색을 옅게 드러내며 루나를 보았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루나도 헤이든도 상황이 이리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스페라가 성검을 쥐고 남부 인근을 장악했을 때부터, 루나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확보 불가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루나의 측근이 되어 활동하던 헤이든은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막상 남부를 상실할 상황에 직면하니 약간의 동요를 느꼈다.
하지만 담담하게 가라앉은 루나의 목소리를 듣고서, 헤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저히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선은 급격히 밀려날 것이다.
그럼에도 루나는 문제가 없다고 답했고, 헤이든은 루나를 신뢰했다.
*
"아... 힘들다...!"
요하나가 투정을 부렸다.
볼멘소리가 짧게 메아리쳤지만, 황좌에 앉은 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들려오지 않는 답변을 기다리던 요하나는 피식 웃으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이번에도 역시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하나는 자기 뺨을 긁적여 보았다. 너무 오래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엔 그저 레이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게 하나 더 두려워지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일어났을 때. 네가 나를 보며 낯설어할까 봐. 그게 조금 두려워졌다.
요하나가 바라보는 레이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레이는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요하나는 점점 더 과거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어느새 네가 아는 내가 아니게 될까 봐 걱정하며, 요하나는 잠시 침묵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나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언젠가 레이는 그랬었다.
요하나는 눈가를 붉게 물들이다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잠만 자고 있다가... 정말로 내가 너보다 더 강해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만약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요하나는 이제껏 당해온 것들을 복수할 거라고 다짐했다.
면박도 좀 주고, 애 취급도 하고, 허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런 알량한 복수를 꿈꾸며 요하나가 레이를 마주 보았다.
그때, 익숙한 인기척이 요하나의 뒤에서 다가왔다.
데런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또 여기 있어요?"
"...너는 이번에 드워프의 신물을 찾았다며?"
"네. 뭐... 운이... 좋았죠."
"그럼 옛날보다는 쓸만해졌겠네?"
"그럼요, 누님. 옛날보다는... 뭐라도 하나는 더 거들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 아리송하게 들리는 데런의 대답에 요하나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자신 있으면 뭐라도 보여줘 봐."
"음... 그러면 누님, 저랑 카드게임이라도 한 판 하실래요?"
갑자기 웬 카드게임.
요하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가, 이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보자."
요하나와 데런은 웃음이 어린 얼굴로 레이에게 손을 흔든 후 황좌를 떠났다.
황좌로 향하는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요하나와 데런은 밝은 기색을 유지했다.
허나 웃음이 어린 입가 위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7년의 혈전이 행복하게 느껴질 만큼 피비린내 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두 사람 모두 모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