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작별 [3]
[43]
"...저 개새끼가."
주워들었던 험한 욕설이 입에서 흘러나올 만큼.
스페라는 지금 상황이 매우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리 면전에서 제대로 엿을 처먹었던 기억이 몇 없던 스페라는 뒷목이 당긴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안소니우스는 자신을 속박하던 제약의 허점을 이용했다.
직간접적으로 스페라를 방해하는 행위는 대부분 제약된 상황에서.
안소니우스는 스페라를 공격하던 요하나를 저지함으로써 스페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스페라에겐 뼈 아픈 한 수 였지만, 결국 그 허점이라는 건 일시적이었다.
이렇게 일을 벌인 이상 더욱 강한 제약이 안소니우스를 옥죌 것이다.
기껏해야 단 한 번 활용할 수 있는 제약의 허점을, 안소니우스는 아주 빌어먹게 효과적인 타이밍에 사용했다.
안소니우스가 과연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타이밍을 노린 것일까? 스페라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스페라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안소니우스의 수작질이 요하나와 합의된 작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발을 들이던 요하나가 보여주었던 각오는 그 어떤 불순도 없이 순수했다.
그런 각오는 연기 따위로 가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연기 같은 게 요하나의 특기도 아니었고 말이다.
허나 이 모든 게 우연만으로 맞물릴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유도한 인물이... 제국 쪽에 분명 존재했다.
"..."
루나.
스페라는 루나가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기를 유도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스페라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루나와 안소니우스 간에 연락 같은 걸 취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둘 사이의 직접적인 정보 교환은 분명 불가했다. 허나 루나와 안소니우스는 얼굴을 마주 보고 의견을 나누지 않고도 서로의 판단과 노림수를 예상해가며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 둘은 서로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
스페라가 일그러졌던 입꼬리를 되돌렸다.
뒷목이 당기는 것과 별개로, 빠르게 현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제삼자에게 과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비쳐질지는 너무나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스페라가 요하나에게 밀려나는 것처럼 상황이 연출되던 중 '마왕'이 요하나를 습격하지 않았던가.
위기에 처한 스페라를 돕기 위해 마왕이 전투에 개입했다고... 언뜻 보기에 충분히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모양새였다.
스페라는 일단, 안소니우스와 요하나를 따라잡아 검을 휘두르려 했다.
스페라가 둘을 따라잡은 후 요하나를 죽이려 한다면, 안소니우스는 요하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안소니우스가 요하나를 지키려 한다는 인상만 심어줄 수 있다면...'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도, 상당히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스페라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스페라가 안소니우스와 요하나를 따라잡아 원하는 상황만 연출할 수 있다면 조금쯤은 성국의 '붕괴'를 늦출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안소니우스가 요하나를 포기한다면... 적어도 요하나는 이곳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말이다.
허나 스페라가 두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가속하기 직전.
화려하게 치장된 갑주로 무장한 기사가 나타나 스페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네가 휘감은 것은 혼종이 다루었던 힘이다."
"!"
"넌, 대체 누구냐."
검을 겨눈 기사의 정체는, 아직 제국의 이름이 찬란했던 시기의 로얄가드, 파울라였다.
파울라는 모든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채,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내며 스페라를 적대하고 있었다.
그건 이미 스페라를 '변절자'라 마음 깊이 규정하지 않고서는 발할 수 없는 기세였다.
"..."
스페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피식 웃었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아무리 불만과 의혹이 드글드글 끓고 있다고 한들.
그걸 선두에서 공론화시킬 용기 있는 자가 없다면 내재된 불만이나 의혹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허나 일단 선두에 나서는 자가 출현하는 순간, 의혹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나서는 이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몸을 움직였어야 했는데 찰나의 고민이 스페라의 발목을 붙잡았다.
한편, 카일룸의 워프게이트가 재가동되며 노르드로 파병되었던 성국의 병력이 급히 귀환하기 시작했다.
카일룸의 습격 소식을 접하고 다급히 귀환하기 시작한 파병 부대는 원리주의 색채가 강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페라가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치워버리고자 했던 버림패였는데, 제국의 습격자들이 굳이 워프게이트를 손상시키지 않은 덕분에 멀쩡하게 카일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은 카일룸으로 귀환한 직후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대략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던 스페라는...
자신이 제대로 말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젠 상황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났다.
바로 지금.
성국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
콰앙!!!!!!!!!
요하나는 안소니우스에게 밀려 카일룸의 외곽까지 밀려났다.
안소니우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멀리 요하나를 밀고 나갔다.
요하나는 안소니우스를 멈춰 세워보려 했지만, 안소니우스의 막강한 추력을 도저히 상쇄해내기가 힘들었다.
일방적으로 밀려나던 요하나가 결국 앞뒤 안 가리고 전력을 다해 안소니우스를 저지하려던 순간.
안소니우스의 목소리가 투구에서 흘러나왔다.
"작전의 목표는 달성되었을 터. 물러나라."
"...!"
요하나가 당혹스러워했다.
마왕에 관해 루나에게 언질 받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상황이 일어날지 요하나는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그러나 당혹감이야 어찌됐든 안소니우스의 말이 옳기는 했다.
요하나의 저항이 줄어들자, 안소니우스는 일렁이는 어둠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 하도록 억누르며 더욱 추력을 높였다.
아직 육신을 제어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카일룸에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끄드득!
안소니우스를 뒤덮은 어둠이 더욱 강렬히 일렁였다.
안소니우스는 제약의 허점을 파고들어 요하나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소니우스가 제약의 허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시간은 한시적이었다.
이미 악신들의 분노가 안소니우스의 정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몸을 멈춰 세우고 요하나를 공격하도록, 악신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안소니우스의 행동을 강제하려 하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의 의지 따위로는 잠시도 감당할 수 없는 강압이었다.
그럼에도 안소니우스는, 끝끝내 자아를 유지하며 요하나를 카일룸에서 떨어뜨렸다.
이윽고 충분히 카일룸에서 멀어지자 안소니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다, 요하나."
요하나는 이 상황이 여전히 너무나 당혹스러웠으나, 이어지는 안소니우스의 목소리가 요하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레이와 맺은 계약대로. 나는 나의 역할을 다했다."
"...!"
"이제, 너희의 차례다. 너희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끄드득!
안소니우스는 갑자기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육신을 떨어대더니, 한계까지 억눌린 목소리로 문장을 이었다.
"신화를... 완성시켜라."
이 이야기의 시작은, 고결하지 못 했다.
사실 이들의 이야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고결함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누군가는 잃어버린 것을 놓지 못 하였기에.
그저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발버둥을 쳤을 뿐이었다.
그 비루한 발버둥을, 안소니우스는 선명한 대의로 치장해 입에 담았다.
"반드시... 완성시켜라."
600년 전 한 영웅이 이루고자 했으며, 결국 무너져 내렸던 그 위대한 신화의 대의가... 너무나 일그러진 형태로 계승되어 다시금 개화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기적인 자들의 여정은, 진정 신화라 칭해질 자격을 갖추었다.
거짓된 고결함이야말로 역사와 신화를 구분 짓는 경계였으니.
"가라."
안소니우스가 요하나를 붙잡고 밀어내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내던져지다시피 한 요하나가 지면을 긁어내며 간신히 몸을 멈춰 세웠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요하나는 잠시 안소니우스를 두 눈에 담았다가, 결국 등을 돌렸다.
안소니우스 또한 요하나를 뒤로 하고 카일룸으로 눈을 돌렸다.
만약 스페라가 추격해온다면 안소니우스가 막아서야 했다.
아직 요하나는, 전력을 드러낸 스페라와 맞부딪칠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
안소니우스로부터 어둠이 너울졌다.
악신들의 압박을 정면에서 저항해낸 만큼, 안소니우스의 정신력 또한 급격히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정신이 완전히 잠식되어 악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때까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안소니우스는 스스로의 의지로 무릎을 꿇지 않았다.
"..."
그날.
누이의 목을 겨누고 성검을 움직였다.
살갗을 갈라내는 찰나의 감촉이 성검을 지나 손아귀에 흘렀고.
그 찰나의 감촉은 안소니우스에게 지워지지 않을 영원이 되었다.
안소니우스는 여전히, 그날의 영원에 갇혀 있었다.
"나는..."
몰아치는 악신들의 권능 속에서 기억과 자아가 바스러져 나가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날의 영원을 가슴에 품고서... 안소니우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루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전쟁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순간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며 역할을 다해준 이들 덕분에, 루나가 설계한 대로 '판'이 깔렸다.
조금만 어그러졌어도 한참을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변수를 극복하고, 결국 루나가 바라는 대로 판이 완성됐다.
설계 대로 판이 완성됐기에, 앞으로 더욱 극심한 공세(攻勢)가 시작될 것이다.
"..."
이제까지 스페라는 대륙을 좀먹기 위해 암약하고 있었다.
헌데 그 베일을 벗겼으니, 더 이상 거리낌 없이 본격적으로 대륙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거기에 안소니우스까지 완전히 정신이 장악된다면 전황 자체는 급격히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보다 더욱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될 터다.
전선은 밀려날 것이고, 대륙의 모두가 이제까지보다 더욱 극심한 소모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붉은 미래가 너무나 명확히 보였지만.
루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희생이었고, 또한 지금 걸어가는 길이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결말에 닿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 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루나를 중심으로 드러난 여섯 개의 서클이, 다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당신이 바라던 해피엔딩을... 선물해줄게요."
비록.
당신의 곁에서 함께할 수 없게 되더라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