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역전 [3]
[40]
스페라는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었다.
왕좌에 앉은 채, 썩 친근해 보이는 미소를 품고 요하나를 바라보았다.
요하나는 그런 스페라를 마주하며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까불지 말고 일어서."
"..."
스페라는, 대체 요하나가 무엇을 이루었기에 홀로 이곳까지 닿을 수 있었는지 참 흥미가 일었다.
오랜만에 마음을 두드리는 그 흥미를 조금은 길게 이어가고 싶었기에 스페라는 두 번째 개안을 이루지 않은 채 성검의 끝을 까닥였다.
"먼저 시작해. 기껏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일부러 사람까지 물렸는데."
"..."
스페라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요하나가 손아귀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 직후, 스페라를 향해 낙뢰가 떨어졌다.
!!!!!
굉음이 귓가에 닿는 것보다 검격이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요하가가 가속했다는 걸 스페라가 간신히 인지했을 때쯤, 이미 검의 궤적이 스페라의 머리 위에 다다라 있었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발한 일격의 속도에 순순히 감탄하며 뒤늦게 성검을 움직였다.
제대로 된 방어 동작을 취하기엔 시간이 없어 자세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으나, 스페라는 개의치 않았다.
칵-!!!!!
서로의 검이 맞닿은 순간.
스페라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압력'이 성검을 짓누르는 감각을 느꼈다.
어설프게 공격을 막아섰던 성검이 압력에 짓눌리자 성검을 쥔 스페라의 자세까지 힘을 받는 방향으로 뒤틀렸다.
"...!"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충돌 끝에.
두 자루의 검이 맞닿아 있는 교차점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견고하게 건축된 알현실의 바닥이 충격파로 인해 사방으로 금이 갔다.
왕좌에서 일어선 스페라는 검을 맞댄 반동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 해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서야 했다.
스페라는 자신이 물러선 거리를 두 눈으로 다시 보았다.
스페라는, 지금 이 상황이 대단히 놀라웠다. 경악스럽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
요하나는 스페라가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페라의 안면을 향해 낙뢰를 발했다.
섬광처럼 번쩍이는 요하나의 공격을 스페라는 이번에도 제때 인식하지 못 했다.
칵-!!!
스페라가 코앞까지 다가왔던 요하나의 찌르기를 간신히 빗겨냈다.
스페라의 뒤에 있던 거대한 벽면이 요하나의 찌르기가 만들어낸 힘의 격류에 삼켜져 모래알처럼 분쇄되어 나갔다.
콰가가가가가각!!!!!
스페라는 육신의 균형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요하나가 스페라의 그 틈을 파고든다면, 분명 더욱 위협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하나는 그러지 않았다. 스페라는, 요하나 또한 자신이 자아내는 속도를 완벽히는 통제하지 못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자기 자신조차 눈에 담지 못 하는 가속 탓에 기술의 섬세함이 떨어진다.
허나 요하나가 발하는 검격은, 그런 단점 따위는 우습게 지워버릴 만큼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대체 어떻게 이런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인지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스페라는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곧바로 금색 눈동자를 붉은 원으로 감쌌다.
두 번째 개안이 이루어지며, 붉은 원에 감싸인 스페라의 금안이 요하나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페라는 요하나의 검격을 앞에 두고도 일순 몸을 굳혔다.
콰각!!!!!!!!
반응이 더 늦었음에도 스페라는 방어에 성공했다.
두 번째 개인을 이룬 덕분에 공격의 궤적을 읽어내기가 한층 수월해졌기 때문이었다.
간발의 차로 요하나의 공격을 상쇄시킨 스페라가 다시 한 번 요하나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하."
스페라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두 번째 개안으로 바라본 요하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할 영과 육의 경계가 사라져 있었다.
그 믿기지 않는 요하나의 본질을 마주하며... 스페라는 흐릿하게 씁쓸함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류야."
갈망과 동기는 서로 달랐다고 해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쉽사리 '인간'임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손아귀를 뻗는 그 광기만큼은,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얼핏 자조적으로 보이는 웃음을 드러낸 스페라가 성검을 움직였다.
쩌억!!!!!!!!
요하나는 호흡조차 고르는 일 없이 연속해서 스페라의 시야를 낙뢰로 물들였다.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요하나의 검격은 인간의 몸으로 구현 가능한 속도가 아니었다.
이미 관절이 박살나도 한참 전에 전부 박살났어야 했지만, 요하나는 피 한 방울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방어를 이어가며 스페라는 요하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단순히 영과 육의 합일을 이루었다고 '어두운 광휘'를 상쇄해낼 수는 없었다.
초월적인 존재들의 야합으로 인해 탄생한 어두운 광휘의 특수성은, 고작 영혼의 힘 같은 걸로 완전히 상쇄할 수 있을 만큼 하찮은 힘이 아니었다.
요하나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요하나는, 심장 속의 가변형 코어를 극단적인 형태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드드득!!!!!
요하나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대다수의 기사들이 코어를 생성할 때 필수적으로 '정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코어의 안정성을 높여 육신의 부하를 줄이기 위한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정제된 마나로 코어를 생생해야만 육신 내부에서 안정적으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다.
허나, 요하나는 그 모든 상식을 무시하고 체내에서부터 마나의 폭주를 끌어내고 있었다.
육체의 손상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검의 위력만을 증폭시키기 위해 심장 속에 위치한 가변형 코어를 극한까지 변형시켜 마나의 격류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쩌엉!!!!!!!!!!!!!!!!!!!
그 상리를 벗어난 요하나의 검격이 자아내는 위력은... 단어 그대로 파멸적이었다.
아직은 스페라가 어두운 광휘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스페라가 일방적으로 밀려나야 할 만큼 요하나의 검격은 파멸적인 위력을 발했다.
더군다나 검술의 역량에 있어 요하나는 명백히 스페라를 앞서 있었다.
검을 제대로 맞댈 수 있게 된 순간.
전선에서 혈전을 반복해왔던 요하나와 성국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던 스페라의 역량 차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스페라는 오랜만에 '한계'라는 것을 느껴보며 입가를 움찔 떨었다.
"..."
한계. 한계... 그래, 한계를 느껴본다.
스페라가 생전 처음으로 또래와의 전투에서 한계를 느끼고 전력을 다해본 것도, 이렇게 요하나와 검을 마주했을 때였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날.
스페라는 처음으로 또래의 소녀와 검을 맞대며 즐거움을 느꼈다.
너무나도 즐거워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에 증조부의 허락 없이 두 번째 개안까지 이루었었다.
그날 두 번째 개안을 이루고 훔쳐보았던 빗겨가버린 운명이... 새삼스레 스페라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
우리의 첫 만남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본래의 운명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참살하기 위해 발악한 서로의 숙적이자 죽음이었다.
그것이 빗겨간 운명인 줄 알았다.
이제는 빗겨간 운명인 줄 알았으나... 결국 우리는 지금 서로를 증오하며 검을 맞대고 있다.
서로가 품은 감정도, 결의도, 상징도 역전된 채로.
그저 서 있는 곳만이 서로 역전되었을 뿐.
우리의 운명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
찰나의 순간, 스페라는 음울한 미소를 머금고서 요하나를 바라보았다.
요하나는 스페라의 미소를 눈에 담는 일 없이 양손의 검을 교차시켰다.
!!!!!!!
굉음과 함께.
요하나가 벽면을 바스러뜨리며 스페라를 붉은 하늘 아래로 밀고 나갔다.
*
로얄가드, 파울라.
그녀는 성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생존한 로얄가드 중 대다수가 성국의 세력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로얄가드는 명실상부 성국이 활용 가능한 최정예 기사 전력이었다.
성국은 굳이 로얄가드를 양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로얄가드를 내보이는 게 루나와 레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을 자극할 위험도 있는데다, 원래 강력한 카드는 적당히 가려두어야 더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파울라는 성국과 협력을 이어가며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간간이 활동했다.
그리고 오늘, 파울라는 카일룸에서 임무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헌데 파울라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카일룸이 공격을 받았다.
샤프슈터 엘프들의 지원 아래 소수의 정예 전력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기습이었다.
파울라는 단숨에 무장을 갖춘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허나 스페라가 '소수의 침입자' 탓에 굳이 몸을 숨기고 있던 로얄가드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연락을 전했고, 파울라 또한 내심 동의했기에 무장만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헌데 상황은 처음의 예측처럼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음에도 전투로 인한 소음과 진동이 계속해서 땅을 타고 울렸다.
쉽사리 사태가 진화되지 않고 전투가 이어진 끝에, 결국 카일룸의 중심부에서까지 전투의 소음이 번져 나왔다.
파울라는 자리를 계속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침입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가 고민해야 했다.
쿠구궁!!!!!!
"..."
교황청 외곽의 벽면 일부가 전투의 후폭풍으로 인해 붕괴됐다.
파울라는 지하에 있어 그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 하였으나, 대충 어디쯤이 붕괴되었는지 감각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파울라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검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게 좋은 선택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기하기보다는 인근 부대나 다른 로얄가드와 합류하는 게 훨씬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다.
헌데 파울라가 움직여야겠다고 결정을 내리려던 찰나.
뭐라 제대로 형용하기가 힘든... 어쩌면 섬찟함에 가까운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
파울라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느낀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과하게 긴장한 탓에 잠깐의 착란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오랜 시간 제련된 파울라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기억 속을 헤집어보라고. 그리고 떠올리라고.
"..."
방금 느꼈던 그 섬찟한 감각은... 생소했지만, 완전히 생소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유사한 감각을 체험해본 적이 있었다.
파울라는 온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기억을 헤집어보며, 점점 더 정답에 가까워졌다.
"..."
마경 너머.
프레체스 토벌을 위해 강행된 원정.
전쟁 막바지쯤...
지원을 위해서 움직이다가 느꼈던, 힘의 파동.
그건 분명... 프레체스가 토해낸 변질된 권능이었다.
"...그럴 리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한 파울라가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박살 낼 듯 밀어내고 나왔다.
성국의 수도, 카일룸에서.
두 소녀가 검을 쥔 채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