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역전 [1]
[38]
데런이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 아래 닿는 용암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데런은 그 현상이 단지 자신의 착란일 뿐인지 아니면 이해 못 할 힘이 작용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대장장이의 검으로부터 전염되는 강렬한 충동이, 데런을 도박판 위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제 데런은 판돈을 걸어야만 했다.
일천한 재능으로, 세상을 뒤흔들 특별함을 지니지 못했음에도.
기적과 같은 행운이 찾아오리란 막연한 망상에 기대서, 탐욕을 부려야만 했다.
데런은 마음에 이는 근거 없는 '확신'이 거짓이란 걸 모르지 않았음에도 대장장이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뻗는 데런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콰악!!
데런의 손아귀가 대장장이의 검을 말아쥐었다.
그 순간, 데런의 귓가에 거칠게 갈라진 묵직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종족의 명운조차 거리낌 없이 판돈으로 활용하다 멸망한 도박꾼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데런의 의식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 유열에 동화되어 데런 또한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찰나.
유쾌한 웃음소리 너머에서, 별빛 너머의 존재가 함께 광소를 터뜨렸다.
"...!!"
데런은 별빛 너머의 존재가 토해내는 광소를 제대로 자각할 수 없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별빛 너머의 존재가 발하는 감정과 의지를 똑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만, 광소에 묻어있던 쾌락과 기대감만큼은 데런 또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거대한 도박판이 시작된다.
이 대륙만이 아닌, 차원 너머의 운명까지 아우르는.
그토록 거대한 도박판이 바로 이 순간 개시를 선포했다.
*
"..."
루나가 천천히 눈가를 좁혔다.
루나는 황성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노르드에서 발생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먼 과거에 영향력을 상실한 초월적인 존재 중 하나가... 이 대륙에 다시 손아귀를 뻗어오고 있었다.
"..."
그건 본디 루나에게 희소식이 될 수 없었다.
당장이라면 몰라도, 종국에는 별빛 너머의 모든 존재들이 루나를 적대할 터다.
별빛 너머의 존재들에게 루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배제해야만 하는 병균이었다.
그렇기에 루나가 새로운 초월적인 존재를 현실 차원에 개입하도록 유도한 것은, 외부에서 바라보기엔 선뜻 이해하기 힘든 판단이었다.
정말 어지간히 벼랑 끝에 몰리지 않은 이상 루나의 판단은 비합리적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이를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루나가 벼랑 끝에 몰렸기에 이번과 같은 도박수를 두었다고도 판단하는 게 가능했다.
장기적인 불리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초월적인 존재와 손을 잡으려 할 만큼 루나가 처한 상황이 위태롭다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루나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었다.
"..."
엘-람과 악신들은 루나를 배제하기 위해 야합했고, 출혈까지 감수해가며 현실 차원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야합은 결코 끈끈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야합을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고 있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루나가 도박수를 두었다.
나는 지금 도박수를 둘 만큼 벼랑 끝에 몰려있다고, 별빛 너머에 암시한 것이다.
루나의 암시는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에라도 루나의 암시가 엄살이 아닌 진실이라면...
별빛 너머의 존재들에게 루나라는 존재가 지닌 '위험성'은 이전까지의 평가보다 훨씬 떨어지게 된다.
"..."
루나라는 존재의 위험성이 고평가되고 과장되었다.
그렇게 판단될 수 있는 여지가 등장한 시점에서, 신뢰 없이 구축된 별빛 너머 존재들의 야합은 반드시 균열이 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적대하던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루나라는 존재가 지닌 위험성 때문이었다.
'공통된 위험'이 존재했기에 그들의 야합이 성립될 수 있었다.
헌데 그 '공통된 위험'이 과장되었다?
야합을 이룬 존재들 중 단 하나라도 그렇게 상황을 판단하는 순간, 반드시 '붕괴'가 시작된다.
"..."
물론, 위험성이 과장되었다고 해도.
별빛 너머의 존재들에게 있어 루나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병균임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뒤로 밀릴 수 있었다.
루나를 빠르게 배제하는 것보다, 야합을 배반해 이득을 취하는 걸 우선하는 존재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작은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별빛 너머 존재들의 야합을 약화시키고, 서로를 견제하는 데 더욱 큰 힘을 할애하게 만들 것이다.
그게 바로.
이번 작전에서 루나가 달성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별빛 너머 존재들의 정치적 내분을 유도해 시간을 버는 것.
처음부터 그게 본 목적이었다.
잊혀졌던 초월적인 존재와의 협력? 데런의 역량 강화? 스페라를 끌어들일 미끼?
그런 건 부차적인 목적, 혹은 본 목적을 감추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데런."
루나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데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데런을 이용해 대륙에 영향력을 발하기 시작한 초월적인 존재의 목적은 뻔했다.
엘-람과 악신들의 행사에 적당히 훼방을 놓아, 그들에게 장기적으로 더욱 큰 출혈을 강요하기 위해서일 터다.
엘-람과 악신들이 출혈을 강요당해 약화될수록, 약소한 영향력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들이 이득을 취할 기회가 증가할 테니 말이다.
도박을 사랑했던 종족이 추앙했던 존재답게 그 기회를 감지하고 판에 개입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종국에는 별빛 너머의 모든 존재들이 루나를 배제하려 할 것이다.
데런은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을 손에 쥐었고, 자연히 초월적인 존재의 욕구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데런은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루나에게 검을 겨누어야만 했다.
그런 순간이 다가왔을 때.
데런을 성공적으로 제압해서 봉인하지 못 한다면...
죽여야 했다.
"..."
버림패이자 희생양.
어쩌면 데런이 맞이할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루나는 짧고 모호하게 데런에게 경고를 건넸었다.
허나 데런은 루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
루나는 길게 침묵했다가, 천천히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요하나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했다.
데런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페라의 본모습을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게 만들어야 했다.
*
루나와 비슷한 시점에.
스페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노르드에서 발생한 '변화'를 스페라 또한 곧바로 감지했다.
스페라는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하아..."
제국군이 굳이 '이단'을 운운하며 행패를 부린다기에 떠올려보았던 비약적인 추측이 현실이 되었다.
사실 스페라는 '약소한 패배자'들이 대륙에 다시 손을 뻗든 말든 무관심했다.
약소한 패배자들이 우후죽순 대륙에 다시 손을 뻗어봤자 그들이 내린 조악한 권능으로는 스페라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허나, 스페라를 축복하는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이번 사태를 굉장히 거슬려 하는 듯했다.
약소하든 강대하든 새로운 변수가 대륙에 출현했으며, 이는 특히나 엘-람과 악신들의 야합에 균열을 유도하고 있었다.
고작 일개 필멸자에게 정치질을 당한 것에 대해, 엘-람은 대단히 분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해지는 감정을 느끼며 스페라가 피식 웃더니 혀를 짧게 찼다.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제국은 이단을 벌한다고 떠들며 노르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해놓고는, 뻔뻔하게 이단의 힘을 손에 쥐었다.
제국의 인물이 이단의 힘을 취했다는 걸 세상에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만 있어도 이미 구멍 투성이었던 제국의 명분과 상징성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었다.
"어디..."
스페라는 잠시 고민했다.
이 일련의 사태가 제국의 함정일 확률도 있는 만큼, 스페라는 굳이 직접 노르드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본인이 직접 가지 않고 다른 이들을 보내도 제국을 흔든다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결정을 내린 스페라는, 곧바로 성국의 고위층을 소집해 제국이 금기를 저질렀다고 선언했다.
무작정 수긍하기엔 갑작스럽고 근거 없는 선언이었다.
허나 엘-람의 대행자인 스페라의 '신탁'을 두고 감히 면전에서 의문을 내비치는 불경한 이는 없었다.
"제국이 노르드의 워프게이트를 무력화하기 전,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해."
스페라는 성국과 노르드의 워프게이트를 연결해 노르드에 즉각 병력을 파병할 것을 명령했다.
비교적 최근에 완공된 성국의 워프게이트는 짧은 건축 기간과 핵심 기술의 부족함 탓에 성능이 제한되어 대규모 병력이나 물자를 운송할 수 없었다.
워프게이트를 활용해 노르드에 병력을 파병한다면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부대를 편성해 보내야만 했다.
스페라는 원리주의 색채가 강한 이단심문관들을 주축으로 한 정예 부대를 삽시간에 편성해 엘-람의 뜻을 대행할 것을 지시했다.
"금기를 저지른 이단자를 색출하고 심판하여라."
급조한 병력을 파병하며 스페라는 웃음을 머금었다.
노르드로 파병한 병력이 제대로 된 성과를 가져오든 함정에 빠져 전멸을 하든 스페라에게는 상관없었다.
파병한 병력이 전멸한다면 전멸한 대로 선동을 이어가면 될 일이었다.
아예 없는 사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어려웠지만, 제국은 실제로 금기를 범했다.
앞으로 얼마 안 가 대륙의 여론이 몰아칠 것이다. 스페라가 그리 만들 생각이었다.
"자... 뭘 더 준비해두었는지 한번 지켜볼까."
스페라는 제국이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흥미를 내보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스페라의 강압적인 파병 추진으로 인해 성국의 수도인 카일룸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혼란 속에서도 스페라의 명령은 착실히 이행되었고, 얼마 안 가 워프게이트가 가동됐다.
스페라는 직접 워프게이트의 정상 가동을 확인한 후 왕좌로 귀환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
왕좌로 돌아가는 길에, 성국의 고위층도 허가를 받지 않고는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신성한 복도에서.
스페라는 웬 어린아이와 잠깐 마주쳤다.
스페라와 마주친 어린아이는 의연하게 표정을 다잡으려 애쓰는 듯했다.
허나 카일룸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탓인지, 어린아이는 불안한 기색을 제대로 감추지 못 했다.
스페라가 어린아이를 안심시키려는 듯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일 아니니 안심하세요."
스페라가 손을 뻗어 어린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황자 전하."
*
카일룸을 수호하고 있던 정예 병력 일부가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파병으로 인한 혼란과 병력 공백으로 인해 카일룸의 방위에 일시적으로 구멍이 뚫렸다.
이제 요하나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차례였다.
카일룸의 상황을 보고받은 요하나가 검을 손에 쥐었다.
함께 몸을 숨기고 있던 제국의 대원들을 돌아본 후, 요하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대륙을 기만하는 변절자의 가면을 벗긴다."
의지가 서린 안광이 어둠 속에서 스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