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05화 (405/446)

외전 - 이단 [6]

[37]

망치와 맞닿은 검이 조각난다.

명검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검이었다.

제국의 명성 있는 장인이 직접 제작하고 검수한 검이었다.

어설프게 휘둘렀다고 깨질 만큼 조악한 물건이 아니었다.

물론 병기로써 전투에서 사용되는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은 누적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검신이 부러지는 일쯤이야 간간이 발생할 수 있었다.

허나 아무리 불운이 겹쳤다고 해도 미약한 균열을 따라 이리 산산이 검신이 박살날 수 있으리라고는... 데런은 상상해본 적 없었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데런은 어깨를 덮은 견갑을 뜯어내서 망치를 막아냈다.

카각!!

망치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견갑의 반절 가량이 균열을 일으키며 깨져나갔다.

견갑의 재질은 지금처럼 간단히 깨져나갈 만큼 싸구려 잡철이 아니었다.

"..."

데런은 의아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보아도 맹인은 육체 능력만으로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망치 또한 투박하기만 할 뿐 마나와 같은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데런은 맹인이 정말 '선' 같은 거라도 보는 대단한 고수라도 되는걸까 헷갈릴 지경이었다.

스릉!

데런은 의아함을 가득 품고서 허리춤에서 예비용 검을 뽑아냈다.

어느새 맹인은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데런의 허리춤을 노리고 망치를 휘둘렀고, 데런은 검이 깨져나갈 것을 미리 감수하고 병기를 맞부딪쳐 보았다.

퍼석!!

산산이 깨져나간다. 이번엔, 데런의 검이 아닌 맹인의 망치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갑작스레 손아귀에 쥐고 있던 무기의 무게가 급감하자 맹인이 균형을 살짝 잃었다.

데런이 망설이지 않고 발을 뻗어 맹인의 허리춤을 걷어찼다.

뻑!!

발차기를 적중시킨 자는 데런이었으나 뒤로 밀려난 것도 데런이었다.

양쪽 모두 마나를 운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순수한 육체의 근력은 맹인이 데런을 압도했다.

데런은 더 이상 순수 육체 능력만으로 맹인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마나를 운용하려 했다.

그때,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울렸다.

[세 번이라. 범인보다는 낫지만, 강운이라 부를만한 축복을 타고나지는 못 한 듯한데...]

"..."

[무엇을 믿고 방만하게도 '도박'과 '모험'을 사랑하려 하느냐?]

팅-!

어느새.

어두운 지하를 울리던 망치 소리는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대신 금속 동전을 튕기는 듯한 소리가 지하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거 재밌구나."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주인이, 깊은 어둠 너머에서 데런을 향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축복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네가..."

여인이었다.

"어찌 그분의 흥미를 이끌어내었을까?"

여인의 얼굴은 젊고 아름다웠다.

허나, 동전을 어루만지는 여인의 손아귀는 노파의 것과 같이 자글자글한 주름에 뒤덮여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으나 여인의 눈동자 하나는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여인의 머릿결은 탐스러운 자색이었으나 여인의 걸음걸이는 기어오는 것처럼 느렸다.

여인은, 데런을 향해 동전을 튕기며 아름답게 웃었다.

"옳다구나. 네가 판을 벌일 요량으로 거대한 판돈이라도 챙겨왔나 보구나. 이 세상 모두를 전율하게 할 만큼. 아주 거대한 판돈을."

팅- 티디디딕.......

땅을 구르던 동전이 데런의 발끝에서 멈춰 섰다.

데런은 침묵한 채 품속의 금서를 매만졌다.

"..."

금서에 적힌 내용 중에는 과거 드워프들이 추종했다는 신앙도 기록되어 있었다.

허나 금서에 적힌 정보는 파편적이었기에, 데런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정보를 보강해야 했다.

노르드는 먼 과거 드워프가 번성했다고 알려진 지역이었다.

또한 노르드는 아직까지 부족 사회의 구조가 남아있었고, 몇몇 부족들은 기원을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토속 신앙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데런은 제국군이 목표로 했던 주변 일대를 점거한 사이, 노르드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드워프의 문화를 짙게 이었다고 알음알음 들려오는 부족 마을을 찾아가 '현명한 자'와 접촉하려 했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현명한 자'와 교류나 거래를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말이다.

하지만 데런이 마주한 여인, '현명한 자'는... 단순히 잊혀진 전통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늙은이가 아니었다.

"..."

데런은 여인을 마주 보며 긴장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허나, 데런만큼이나 여인 또한 지금의 상황이 새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현명한 자, 혹은 인도자라 불리는 여인이 잇고 있던 것은 사라진 시대의 잔흔이었다.

드워프. 그리 불리었던 인족은 충동적이며 도전적이었고 척박한 모험과 도박을 사랑했다.

특히 도박에 있어, 드워프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웠다.

종족 전체에 깊게 새겨져 있던 그 광기가 한때 종족의 번영을 이끌었고, 끝내 종족의 파멸을 앞당겼다.

최후의 순혈 드워프 또한 실로 드워프답게 최후를 맞이했다.

여인의 부족에는 과거 멸망한 드워프의 피가 옅게나마 흐르고 있었다.

과거에 멸망한 선조들의 그 열망을, 여인의 부족이 전승하고 있었다.

허나 전승이라 해봐야 대부분의 힘이 사라지고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문화의 계승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 단체들은 노르드의 몇몇 부족이 드워프의 문화를 은밀하게 잇는 것을 굳이 들춰내고 짓밟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여인의 부족이 잇는 것은, 그야말로 과거의 전설을 기리는 토속 신앙일 뿐이었으니까.

한없이 높은 꿈을 꾸다 추락했던 선조의 미련함을 기리며 여인은 이제껏 형식적인 기도를 올려 왔었다.

기도에 어떤 형태로든 응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데런이 찾아오기 전날까지는 그랬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판돈을 보여봐라."

"..."

데런은 여인의 하나만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금서를 꺼내 내밀었다.

여인은 어둠 속에서 금서를 펼쳤다.

하나 남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글씨를 읽어내렸다.

금서에 수록된 내용 중에는, 여인의 부족 내에서 전승에 실패해 소실됐던 '기도문'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었다.

기도문을 발견한 여인이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뛰었다. 옅어져 있던 선조의 피로부터 잠들어 있던 과거의 욕망이 박동하는 것만 같았다.

"♬~~~"

여인이 데런은 알지 못 하는 언어로 기도문을 흥얼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데런은 여인의 뒤를 따라 걷다가, 저 멀리서 작게 빛나는 촛불을 하나 발견했다.

촛불 아래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퇴색된 작고 허름한 제단이 흐릿하게 보였다.

"♬~~~"

여인은 계속해서 기도문을 흥얼거리며 제단에 도착했다.

제단 위에는 부식된 수백 개의 동전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여인은 바구니를 들어 올리더니, 성의 없이 바구니를 휘둘렀다.

팅팅팅팅팅!!!

바구니에서부터 수백 개의 동전이 쏟아져 내리며 제멋대로 굴러가다 부딪쳐댔다.

잠시 기다리자 쏟아졌던 동전이 기울어지며 쓰러져서 소음이 멈추었다.

헌데... 쓰러진 그 수백 개의 동전들 전부가... 앞면을 내비치고 있었다.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데런이 무심코 그리 중얼거린 순간.

제단의 뒤에 있던 암석 벽이 통째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

데런은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려다 억지로 몸을 멈추었다.

무너지는 벽면 너머에서, 용암을 닮은 뜨거운 액체가 줄줄줄 흘러나왔다.

벽면 너머에 가득 차 있던 용암의 수위가 낮아지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 비밀스러운 공간의 깊숙한 곳에.

한 자루의 검이 지면에 꽂혀 있었다.

구전되는 전설을 두 눈으로 목도한 여인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쥔 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탄성을 터뜨렸다.

"대장장이의 검...!"

수많은 세월 동안 대를 이어가며 도박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쓰레기를 쏟아내고 쏟아내고 쏟아낸 끝에.

행운이 곂치고 곂치고 곂쳐서 탄생한 몇 없는 기적 중 하나.

멸족에 이를 만큼 광기 어린 도박꾼들이 남긴 유산.

대륙에서 잊혀진 드워프의 신물, 대장장이의 검.

그 허황된 거짓이라 여겼던 전설이 여인 앞에 나타났다.

"...강인한 육체는 불필요하다. 질긴 의지는 무의미하다. 불세출의 재능도 공허할 뿐이니, 오로지 네게 허락된 행운만이 기적을 탐할 수 있으리라."

검신 아래 지면에 드워프의 언어로 새겨져 있는 글귀였다.

데런 또한 이해할 수 있도록 선조의 유지를 대륙의 언어로 읊조린 여인이, 데런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도전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전하거라. 판돈을 올릴 준비가 되었다면 말이다."

"..."

데런이 턱에 힘을 주었다.

이단이다. 여인은 이단이었다.

이렇게까지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계획을 수정해서 합리적인 명분 아래 노르드를 뒤엎는 것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

하지만... 데런은 홀린 것처럼 흐르는 용암을 밟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데런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대장장이의 검으로부터 드워프가 겪어야만 했던 충동이 데런에게 전염되기 시작했다.

용암처럼 강렬한 욕구가 뇌리를 뒤흔들었지만 데런은 스스로를 충분히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데런은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데런은... 마음에 이는 욕구를 마지막까지 억제하지 않았다.

용암을 헤치고 나아간 데런이, 대장장이의 검을 향해 손아귀를 뻗었다.

*

"음..."

스페라가 턱을 괸 채 손가락을 까닥였다.

방금 막 노르드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계된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설마... '다른 존재'들을 끌어들이겠다고?"

조소가 어린 입술을 달싹인 스페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나가, 엘-람과 악신 외의 또 다른 별빛 너머의 존재를 대륙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

노르드에서 제국군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고작 그 정보만 가지고 루나의 목적을 판단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더군다나, 스페라의 비약적인 추측이 정답이라 해도 스페라가 인상을 찌푸릴 이유가 없었다.

"약소한 패배자들을 끌어들여 봤자 도움은 안 될 텐데..."

대륙에서 잊혀진 초월적인 존재들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힘이 부족하여 물러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잊혀진 초월적인 존재들의 권능과 축복은 엘-람과 악신들에 비해 한참 조악했다.

더군다나...

설령 잊혀진 초월적인 존재들이 '모종의 이유'로 다시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루나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한다 해도.

종국에는 별빛 너머의 모든 존재들이 루나를 적대할 터였다.

결국 '다른 존재'를 끌어들인다는 건 루나에게 있어 적을 늘리는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루나가 '다른 존재'를 대륙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만큼 벼랑 끝에 몰렸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예컨대, 함정이라든가.

"..."

스페라가 반복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루나는 여전히 황성을 지키고 있었다.

루나는 황성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관장하고 있었기에, 루나가 황성을 떠난다면 그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

적어도 루나가 모두의 눈을 속이고 황성을 떠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함정을 준비한다 해도, 루나와 안소니우스를 제외하면 스페라와 대적 가능한 존재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가 별빛 너머 '그 약소한 패배자들의 권능'을 빌려 온다 해도 스페라가 품은 어두운 광휘에는 결코 대적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오직 요하나만이.

어두운 광휘에 대적 가능한 '특수성'을 각성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고작해야 이전의 충돌로부터 2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고작 2년 만에 요하나가 유의미한 성취를 거뒀으리라고는, 스페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음... 요하나."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스페라는 요하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우리가 만났을 때는 날 조금 더 재밌게 해주기를 바랄게."

우리가 처음 검을 맞댔던 그날의 짓궂은 추억을 떠올려 보며.

스페라가 오만하게 왕좌에 앉아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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