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단 [5]
[36]
"이런 야만적인!!"
노르드의 고위 인사들이 뒷목을 잡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국의 행태를 보면 정말이지 욕설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근본 없는 찬탈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정말 야만적이기 그지없다고, 다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이제껏 희생을 감수하며 순순히 협조해주었거늘 이딴 행패를 부려...!!"
제국군의 돌발 행동이 노르드 지도부의 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제국군이 노르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한 후였다.
노르드가 병력을 집결시켜 보낸다면 점거당한 지역을 탈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 뒷감당이 염려되어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어처구니없게도 제국은 이번 사태 때 피를 보지 않았다.
적어도 주먹에 맞아 죽은 사람은 없었기에,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더욱 껄끄러워졌다.
노르드의 고위 인사들은 성국에서 파견된 사신단을 찾아가 이번 사태의 부당함과 당혹스러움을 토로했다.
성국에서 파견된 사신단 또한 제국이 벌인 일이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적이 뭐지?"
"단순히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라기엔... 이상하군."
노르드를 압박하기 위한 무력시위라고 단정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노르드를 아예 갈아엎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기엔, 제국이 파병한 병력이 너무 적었다.
성국의 사신단은 제국군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혼란해하면서 본국에 정보를 전달했다.
한편.
맡겨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하옥되어버린 할스타인은 팔이 구속된 채로 몸을 떨었다.
"끄윽...!"
할스타인은 주먹 싸움에 완패한 굴욕 탓에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었다.
제국군과 충돌했을 때, 할스타인이나 지미나 마나를 활용한 육체강화를 절제한 채 주먹을 휘둘렀었는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건 할스타인이었다.
굴욕적인 패배를 상기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던 할스타인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음..."
노르드는 국토가 험지로 이루어진 만큼 국토 내에서도 다른 지역 간 적극적인 교류가 제한된다.
그렇다보니 '부족' 단위로 끈끈하게 결속되어 작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보니 몇몇 부족에는 먼 과거의 토속 신앙이 일부 잔존해있기도 했다.
그 토속 신앙이라는 건 종교가 아닌 일종의 오래된 전통에 가까웠다.
허나 지미가 '이단' 운운하는 것을 면전에서 들었던 할스타인은 혹시라도 그러한 토속 신앙으로 인해 꼬투리를 잡힐까봐 걱정이 들었다.
그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국 놈들이라면, 충분히 토속 신앙을 가져와 꼬투리를 잡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할스타인이 꺾여있는 허리를 일으키며 간수를 불렀다.
"이봐!"
*
제국군은 첫 번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제국군은 노르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하였고, 험한 산세를 활용해 소수의 병력으로 남의 땅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물론 제국의 이름에 의지한 지금의 대치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끌릴 수록 예기치 못 한 유혈 사태의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아직 노르드의 고위층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제국군은 신속하게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허나 제국군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제국군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더는 늦춰지면 안 된다."
헤이든은 지연되었던 화이트타워의 건설을 재촉했다.
바윗길 초입에 묶여 있던 물자가 보급된 만큼 일시적으로 건설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헤이든이 화이트타워의 건설 현장을 감독하는 사이, 제국군은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받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누군가는 제국이 점거한 지역을 순찰했고, 누군가는 '이단'과 관계된 증거를 찾기 위해 은밀히 험지를 수색해야 했다.
제국군의 움직임이 통일되지 않았기에 노르드나 성국의 인물들은 제국의 진짜 목적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렇게 제국군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데런이 홀로 어딘가로 움직였다.
"..."
엑스퍼트 급 기사 정도 되면 아무리 험지라 해도 이동에 크게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
허나 절벽이 굽이치는 삭막한 노르드의 산맥은 데런에게도 헛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몸을 굴리다시피 해서 높은 절벽을 하나 내려온 데런은 산맥을 울리는 메아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쇳덩이가 부딪치는, 망치질 소리였다.
메아리 치는 망치질 소리는 척박한 환경에서 오는 삭막한 감흥을 한층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었다.
데런은 잠시 제자리서 멈춰서 있다가 망치질 소리를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깡-! 깡-!
이내, 데런은 산맥의 골짜기 사이에 어둡게 그늘진 지대에 세워진 마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보아도 생소한 양식의 건축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생소하다고 하나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마을의 건축물은 척박한 환경에 대비되어 사뭇 아름답게 느껴졌다.
데런은 거리낌 없이 마을을 향해 접근했다.
멀리서부터 데런이 정직하게 접근하자 마을 인근을 순찰하던 주민들 또한 데런의 접근을 곧바로 알아챘다.
데런은 자신을 경계하기 시작한 주민들의 외형을 훑어보며 내심 놀라움을 느꼈다.
'정말... 닮았네. 신화에 나오는 드워프와...'
드워프는 과거에 멸종했다고 전해지는 인족이었다.
구리빛 피부, 짧은 신장, 굵은 몸통, 그리고 비대한 근육이 드워프의 특징이었다고 구전되고는 했다.
이제껏 데런이 마주친 노르드의 주민들도 평범한 대륙민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구릿빛 피부나 단단한 근육과 같은 외형적인 특징이 두드러졌으나, 데런이 찾아간 마을의 주민들은 드워프와 유사한 특징이 더욱 확실하게 두드러졌다.
데런은 노르드의 현지인들에게 드워프의 피가 섞여 흐른다는 소문이 마냥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었다고 눈앞의 주민들을 보며 생각했다.
한편, 마을의 입구를 막아선 주민들이 갑작스레 출현한 외지인에게 험악한 기세를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가까운 부족민 중 너 같이 생긴 놈을 본 기억이 없는데."
"제국에서 왔어."
데런이 제국을 입에 담자 주변의 기세가 더욱 더 험악해졌다.
돌덩이처럼 생긴 근육을 지닌 주민이 망설임 없이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리며 데런을 위협했다.
"머리가 쪼개지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라, 외지인."
"날 이렇게 쫓아내겠다고? 다시 고민해 봐. 오늘은 혼자왔지만, 다음에는 다를 거야."
"이놈이 감히 우리 땅에서 건방을...!"
남자는 거대한 망치를 정말로 휘두를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으나, 한 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인물이 분노하는 다른 주민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외지인."
"..."
"이곳을 찾은 목적을 밝혀라."
"현명한 자를 만나기 위해 왔어."
한 부족 내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장자를 노르드에서는 현명한 자, 혹은 인도자라 칭했다.
부족장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현명한 자는 부족의 지배자가 아니었으며 세습되지도 않았다. 허나 부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데런은 노르드의 부족들에게 있어 현명한 자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달랐기 때문인데, 기실 각각의 부족 내에도 고유한 문화가 존재했기에 노르드의 부족 간에도 서로의 문화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 했다.
데런이 현명한 자를 입에 담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데런은 일단 한 번 물러서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허나 마을의 주민들이 험악한 기세를 내뿜으며 도끼와 망치를 들어올린 순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다시 한 번 흥분한 주민들을 제지했다.
"손님이 찾아오리란 전언이 있었다."
"...!!"
흥분했던 주민들이 놀란 기색을 내비치더니 마지 못 해 병기를 내려놓았다.
주민들을 진정시킨 인물이 데런과 마주서며 입을 열었다.
"외지인, 이름을 밝혀라."
"데런. 데런이라고 부르면 돼."
"갈로포. 현명한 자에게 선물 받은 이름이다."
갈로포는 낮은 눈높이에서 데런을 위아래 살피고는 등을 돌렸다.
"따라와라."
데런은 갈로포의 뒤를 따르며 열기와 망치 소리가 가득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의 절반은 대장간인듯 했다. 대륙의 공방에서는 잘 느껴보지 못 한 강렬한 열기가 골짜기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마을의 주민들은 데런을 보고 경계와 호기심을 내비쳤으나, 갈로포가 앞장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을 비켜주었다.
데런은 걸음을 옮기며, 마을 여기저기에 보이는 금속으로 된 무구와 기구들을 두 눈으로 살폈다.
데런의 예상보다 모양새가 투박한 작품들이 많았다. 얼핏 봐서는 특별함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잘 제련된 무구 특유의 예기나 무게감 같은 것이 이곳 주민들의 작품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데런은 가능하다면 이곳의 무구를 몇 개 구매해서 나중에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이다."
갈로포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로 앞서 걸었다.
데런은 저 안에서 현명한 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건물 안의 풍경은 데런의 예상을 한참 빗겨가 있었다.
건물 안에는 거대한 동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데런은 어렵지 않게, 그 동공이 광산의 입구임을 알아차렸다.
건물 안에 갇혀서 들리지 않던 망치 소리가, 데런의 귓가를 쿵쿵 때렸다.
"하..."
데런은 옅은 탄성을 토했다.
경이롭다고까지 칭할 광경은 아니었으나, 골짜기 사이의 마을에 숨겨진 오래된 광산은 자연스레 흥미와 신비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갈로포는 걸음을 멈추고는 벽면에 원형으로 구축된 계단을 가리켰다.
"내려가라."
"..."
데런은 거부하지 않고 홀로 어두운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동공의 지하는 지상보다 습한 환경이었고, 무엇보다 어두웠다. 허나 그럼에도 망치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미 폐광이 되었어도 한참 전에 되었어야할 광산의 지하에서.
망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데런은 신체의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우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만 반복하고 있자니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헌데 지루함을 견디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도중.
어느 순간 귓가를 울리는 망치 소리가 일시에 사라지더니, 생소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
데런은 어둠 속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품 속의 금서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과거에 섬겼던 것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어."
잠깐의 침묵 후.
정체 모를 목소리는 이내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려냈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거늘, 충분한 강운을 타고났기를 바라야 할 것이야.]
끼기기긱!
어둠 속에서.
두 눈을 잃은 한 맹인이 거대한 망치를 지면에 끌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데런은 품속의 금서를 쥐었던 손을 빠르게 빼내 검 자루를 잡았다.
맹인은 검을 뽑을 준비를 하는 데런을 향해 거침 없이 접근해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쫘아악!!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어마어마한 괴력이었으나, 휘둘러지는 망치에 마나의 흐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런은 일단 검기를 발현하지 않고 검을 마주 휘둘러 망치를 옆으로 흘려내려 했다.
칵-!
투박한 망치와 잘 제련된 명검이 맞닿았다.
그 찰나, 두 개의 주사위가 굴러가는 듯한 환청이 데런의 의식을 잠시 스쳤다.
토로로록, 톡, 토독.
주사위가 멈췄다. 데런은 낮은 눈이 나왔다.
그 직후.
장인에 의해 제련된 제국제 명검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
*
영과 육의 결합.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완벽한 합일.
그 최초의 무결한 각성은, 소울웨폰이란 개념을 창안한 리실로테조차 예상하지 못 한 괴이한 기적을 요하나에게 선물하였다.
영속되는 순환을 이루는 '영'에 비해 짧은 삶이 허가된 '육'은 본디 나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였다.
헌데 영과 육의 온전한 합일이 이루어지며 육은 영에 귀속되어 영과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영혼을 부수지 못 한다면, 육신의 파괴는 의미를 갖지 못 한다.
그건 흡사 이 세계에 투영된 '정령'의 특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점이었다.
허나 요하나가 손에 쥔 괴이한 기적은, 정령의 그것보다도 훨씬 견고하고 강렬했다.
꾸드득!!!
교단의 이름 높은 하이템플러, 라필루스.
그는 분명 오만할 자격이 있는 강자였으나 전선을 전전하던 요하나에 비하면 혈전을 치룬 경험이 일천했다.
그렇기에 예기치 못 한 변수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 했다.
온몸이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채 가슴이 꿰뚫린 라필루스가, 두 눈을 충혈시킨 채 요하나를 노려보았다.
"이... 저주 받은 악마 숭배자가...!"
라필루스는 진심으로 요하나를 힐난했다.
요하나의 그 이해 못 할 괴이의 답을, 라필루스는 악마의 숭배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라필루스의 모욕에 요하나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엘-람이든 악신이든..."
"크...어억...!"
"난 더는 기도 같은 건 올리지 않아."
쫘악!!
라필루스의 육신을 양단한 요하나가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지면 위에 섰다.
그 어떤 존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