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03화 (403/446)

외전 - 이단 [4]

[35]

노르드.

대부분의 국토가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국가.

좋은 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땅이기는 했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사람이 살아가기에 편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당연히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대규모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길목도 매우 제한됐다.

즉, 길목 몇 개만 적당히 틀어막으면 노르드를 통과하는 물자의 흐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워프게이트와 도로를 활용해 이동한 데런은, 슬슬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는 노르드의 지형을 보며 시그니 산맥을 잠시 떠올렸다.

허나 노르드는 시그니 산맥보다 훨씬 황량한 지대를 지니고 있어, 생기보다는 삭막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직접 보니 노르드의 인구 밀도가 낮은 이유가 잘 이해됐다.

"후우..."

목표했던 장소에 접근하며 데런이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데런이 속해 있는, 약 이백 명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병력은 은밀한 군사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제국은, 대외적으로는 화이트타워의 건설에 사용되는 물자의 이동을 감사하고 호위하기 위해 데런이 속한 부대를 노르드에 파견했다. 일방적으로 말이다.

노르드는 당연히 반발했고, 성국 또한 제국의 독단적인 조치에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쳤지만, 이미 제국은 병력을 움직인 지 오래였다.

소규모이지만 정예로 이루어진 제국의 부대는 노르드의 국토를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육로를 향해 움직였다.

'바윗길'이라 불리는 육로였는데, 대규모 물자 운송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국경 인근에서 기싸움을 한 번 벌인 제국의 부대는 얼마 안 가 바윗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윗길의 초입에는, 화이트타워를 건설하기 위한 자재들 중 상당수가 운송되지 못 한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음..."

당연히도, 이제까지 노르드는 대놓고 화이트타워의 건설에 훼방을 놓지는 않았다.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그런 멍청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노르드는 일종의 세관, 그러니까 바윗길의 검문소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화이트타워의 건설을 방해하고 있었다.

혹시 위험한 물건이 반입되지는 않는지 검사한다며 심사를 질질 끌어 화이트타워의 건설 물자가 원활히 유통되지 못 하도록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찔끔찔끔 물자가 보급되니 화이트타워의 건설이 계획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데런과 함께 움직인 매튜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이 검문소의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제국의 부대에 접근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짙은 구릿빛 피부와, 험지에서 살아가며 발달된 단단한 근육을 지닌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바윗길의 책임자인 할스타인이오."

할스타인은 제국측 인사인 헤이든에게 악수를 청하듯 두꺼운 손아귀를 내밀었다.

헤이든이 과장되게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나는 황명을 받들어 이곳을 찾았소."

황제의 대리인까지는 아니라고 하나 헤이든은 노르드의 일개 관리가 함부로 기어오를 신분이 아니었다.

할스타인이 머쓱해서인지, 아니면 조소인지 모를 웃음을 머금으며 한발 물러섰다.

"실례했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소?"

"사양하겠소.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는지라."

"제국이 반입한다는 물자의 호위를 말하는 것이오? 이것 참... 과한 걱정 때문에 이국의 땅까지 헛걸음을 하신 건 아닐까 저어되오. 바윗길은 우리 노르드의 용감한 병사들이 철저히 보호하고 있소."

어차피 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빤히 알고 있었다.

할스타인은 기세 싸움에 밀릴 생각이 없는지 제국 측 대표인 헤이든에게 은근히 깝죽였다.

"이국의 손님들을 이리 황량한 곳에 세워두는 것도 큰 결례이지 않겠소? 우리의 성의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소."

"...더는 시일을 늦출 수 없으니, 이곳에 묶여있는 물자들은 운송해야겠소."

"아, 그거야 정해진 절차만 끝내고 나면 바로 길을 열어 드리겠소. 이곳은 제국이 아니니, 응당 노르드의 절차를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냉기가 어린 눈빛으로 헤이든과 할스타인이 서로를 응시하는 사이.

매튜가 목을 가볍게 풀며 중얼거렸다.

"슬슬 시작해야겠네."

매튜가 슬쩍 지미를 바라보자, 지미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할스타인에게 다가갔다.

거의 비무장 상태로 접근하는 지미를 확인하고 할스타인이 두 눈을 깜박였다.

그 직후, 지미가 고함을 지르며 할스타인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이 이단놈의 새끼들이!!"

쫘악!!!

"커억!!"

갑작스러운 기습에 옆으로 구른 할스타인이 당혹이 가득한 얼굴로 지미를 쳐다보자, 지미가 이번엔 발길질을 하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지금 뭐 하는...!!"

"네놈들이 이단과 붙어먹고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걸 모를 줄 알았더냐!!"

"컥!!!"

다짜고짜 가해지는 지미의 폭행에 노르드의 병사들 중 대다수가 얼을 탔다.

차라리 지미가 칼이라도 휘둘렀으면 노르드의 병사들도 무기부터 들었을 텐데, 지미는 아예 날붙이 하나 없이 맨손으로 할스타인을 패고 있었다.

평소 육체에 자신이 있던 할스타인이 자존심이 상한 탓에 벌떡 일어나 마주 주먹을 휘둘렀으나, 역시나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뻐억!!

"어억...!!"

"이 이단놈의 새끼들!!"

과장된 분노를 토해낸 지미가 더욱 소리높여 외쳤다.

"이 새끼들 밀어버려!!!! 반항하는 놈들은 이단으로 간주한다!!!"

"우아아아!!!!!"

용기 백배한 제국군이, 역시나 맨손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의 설계가 처음부터 이랬다.

일단 초반에 몸으로 밀어붙여 노르드의 병력을 밀어낸 후 화이트타워에 머물고 있는 병력과 협력해 '목표로 한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거한다, 그게 작전이었다.

제국의 병력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며 밀고 들어오면 노르드의 병사나 고위층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칼을 뽑아 저항하기에는, 제국의 병사들 중 무기를 손에 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맨몸인 제국군을 향해 먼저 칼을 뽑는다? 이건 아무리 제국이 우습게 보여도 굉장히 부담되는 선택이었다.

똑같이 맨몸으로 맞부딪치기에는 상대가 안 됐고, 무기를 뽑으라는 명령을 내리기엔 뒷감당이 안 됐다.

물론 우발적으로 칼을 뽑는 자들도 있었지만, 지미가 곧장 뛰어들어 맨손으로 박살을 냈다.

이렇다보니 당연히 노르드의 병력은 우왕좌왕하다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르드의 지휘체계는 결코 제국처럼 신속하지 않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를 두고 노르드의 고위층이 상황을 파악하고 무언가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한참이 걸릴 터였고, 결단을 내렸을 때쯤에는 제국군이 목표한 지점을 점거하고 있을 터였다.

가장 정면에서 날뛰는 지미를 보며 매튜가 낄낄거렸다.

"옛날 생각나는군."

옛날에 한창 용병질할 때 이렇게 근본 없이 굴었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데런이 입 꼬리는 가만히 둔 채 피식 웃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이거 그냥 깡패짓 아니냐고.

그 말이 옳았다. 이건 목적 달성을 위한 속전속결에 치중한 깡패짓이었다.

증거를 조작해 노르드의 고위층을 이단으로 몰아버릴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의 깡패짓은 제국의 행사라기엔 명분도 불충분하고 과하게 저열했다.

그렇기에 더욱이 이번 작전은 성공해야만 했다.

스페라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지금 이곳에서 발생한 작은 소요 정도는 기억되지도 못 하고 잊힐 테니까.

데런과 매튜가 작전의 중대함을 곱씹으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먹질을 했다.

쩌억!!

*

요하나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요하나의 최종 목적지는 '카일룸'이었다.

카일룸은 현재 성국의 수도라고 칭해지는 지역이었다.

교황청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스페라 또한 카일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축복이 가득한 카일룸에 잠입하는 것은 난도가 너무 높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물류의 이동 또한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고, 어쭙잖은 수작은 신도들에게 통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루나는 요하나에게 카일룸 근교의 지하시설을 활용한 잠입 루트를 권했다.

"..."

마차에 앉아 침묵한 채, 요하나는 루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근교의 지하시설을 활용하라고?]

[그래.]

[거기에 지하시설이 왜 있는데?]

[성국이 건설했어.]

[아니... 그러면 당연히 경계하고 있을 거 아니야?]

[내통자가 있어.]

[믿을만해?]

[아니.]

"..."

루나가 언급한 내통자는 마티아스 가문을 통해 소개받은 인물이었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현재 황실에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가문 중 한 곳이었는데, 가문과 연이 닿아있는 성국의 인물을 한 명 포섭해 내통자로 만들었다.

그 내통자를 통해 제국은 지하시설에 관한 정보와 잠입 루트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그건 성국의 함정일 확률이 높았다.

내통자는 성국의 이중첩자였으며 제국에 고의로 정보를 흘렸다고 루나는 판단하고 있었다.

대주교의 직위를 가졌으며, 교단에 그 무력을 인정 받은 하이템플러 '라필루스'.

그가 바로 지하시설을 관리하는 책임자이자 함정을 설계했다고 판단되는 인물이었다.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루나는 요하나에게 함정에 뛰어들 것을 권했다.

왜냐하면... 라필루스는 자부심과 함께 공명심이 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라필루스는 공적을 나누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공적을 탐낼 만큼 실력도 괜찮았다.

함정을 파서 첩자 몇 명 잡는 일에 굳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공적을 나눌 자가 아니었다.

거의 반드시, 자기 밑의 신뢰할 수 있는 병력만 소수 움직여서 제국의 첩자를 포박한 후, 첩자를 심문해서 얻은 정보를 활용해 더욱 큰 공적을 독차지하려 들 인물이었다.

'그 함정을... 역이용한다.'

함정을 역이용하기 위한 조건은 간단했다.

라필루스와 그의 수하들을 은밀하고 압도적으로 제압할 것.

단번에 괴멸시키지 못 한다면 성국은 지하시설에 이변이 발생했음을 눈치챌 것이고, 그럼 잠입은 실패였다.

루나는 자신 있냐고 물었었고, 요하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답했었다.

"..."

시간이 흘러.

요하나는 마침내 성국의 내통자와 성공적으로 접선했다.

내통자는 카일룸의 근교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지하 통로로 요하나를 안내했다.

요하나를 비롯한, 제국이 파견한 소수의 대원들이 내통자를 따라 지하 통로를 걸었다.

헌데 30분 정도 걸었을까, 어둡기만하던 지하 통로에 갑자기 빛이 번쩍였다.

화악!!

통로 반대편에서.

푸른 광휘를 두른 성기사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하이템플러, 라필루스. 물론 그가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라필루스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수하를 충분히 대동한 채 함정에 기어들어온 제국의 첩자들을 맞이했다.

라필루스가 반대편의 선두에 서 있는 요하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음지었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라. 얌전히 협력하면, 관용을 베풀어주마."

"..."

제국의 대원들은 은밀히 이동하느라 아직 무기도 손에 쥐지 못 한 채였다.

긴장어린 침묵이 흐른 끝에.

요하나가 허리춤의 검자루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 직후 어둠 속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요하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촤악!!!

제국과 함께한 교단의 긴 역사 속에서, 이단심문관들 중 많은 이들이 음지에서 활약했었다.

음지에서 활약한 이단심문관들 중에선 암습과 암살에 특화된 기술을 익힌 자들 또한 존재했다.

요하나를 급습한 그림자 또한, 그런 특수한 기술을 익힌 이단심문관이었다.

"...!!"

제국의 대원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하나 요하나가 반응도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공격당했던 요하나의 로브가 찢어지며, 가려져 있던 요하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두가 경악했다. 요하나의 뺨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허나, 모두가 경악한 이유는 요하나의 뺨에 새겨진 자상 때문이 아니었다.

"..."

영과 육의 합일.

혼과 육신의 운명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저주.

혼은 육신과 운명을 함께한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혼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육신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의미했다.

츠즉!

암습자의 칼날에 묻은 핏물이 허공을 흐른다.

지면에 흩뿌려진 살점이 스스로 떠올랐다.

흡사 시간을 되돌리듯, 요하나에게서 떨어져나갔던 피와 살점이 상흔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이내 요하나의 뺨이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채워졌다.

그 괴이한 광경을 보고, 찰나의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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