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단 [3]
[34]
제플린.
무구를 다루는 정상급 장인이자 마법사.
제플린은 여전히 제국 황실에 물건을 공급하고 있었다.
황휘 찬탈이 발생하고 나서도 제플린이 여전히 제국 황실에 물건을 공급하는 이유는, 충의나 대의 같은 이유보다는 개인적인 흥미와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황성에 복귀한 요하나는 루나의 조언에 따라 제플린의 아틀리에를 찾아갔다.
제플린은 안면에 어린 흥미를 숨기지 않고 요하나를 맞이했다.
요하나가 과연 무엇을 얻고자 18개월이 넘는 기간을 칩거하였는지 제플린도 궁금하던 차였다.
"자..."
제플린은 각기 다른 재질로 이루어진 무구 십여 개를 요하나에게 보여주더니, 모든 무구에 한 번씩 힘을 불어넣어 보라고 요구했다.
요하나는 제플린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제플린은 요하나가 모든 무구를 잠시 쥐었다가 놓는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였다.
그 이후, 요하나의 힘으로 인해 변형된 무구의 내부 구조를 분석한 제플린이 자리에 앉은 채 길게 침묵했다.
"..."
제플린은 무언가 특수한 형태의 힘이나 기술을 요하나가 익혀올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요하나가 전선에서 물러난 채 오벨리스크에서 1년 넘게 칩거할 리 없었다.
그렇게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제플린은 쉽사리 당혹감을 떨치지 못 했다.
"..."
요하나가 무구에 불어넣은 힘의 성질은, 제플린이 소유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에도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플린은 무구를 변형시킨 힘이 과연 '마나'이긴 한 건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마나이긴하되 마나 같지 않은 그 기묘한 힘이 남긴 잔흔을 바라보다가, 제플린이 결국 요하나에게 물었다.
"이 힘의 근원이 무엇이오?"
"나의, 삶."
"..."
사실, 아무리 특수한 성질의 마나라고 해도 그 마나가 요하나의 코어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었다면 제플린 또한 대강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하나가 몸에 품은 기운은 심장 내부의 코어만이 아닌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샤프슈터'라고 불리는 엘프들이 지금의 요하나처럼 체내의 기운을 운용하고는 했다.
허나 사프슈터라 불리는 엘프들이 운용하는 힘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마나와 세계수의 축복 정도였다.
"..."
제플린은, 참 드물게 입안에 감도는 의문을 뱉어도 되는가 고민했다.
과연... 눈앞의 존재가... 인간이 맞는가?
요하나를 감싼 그 기묘한 마나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결코 머금을 수 없는 성질의 힘이었다.
코어에 가둔 채 사용한다면 모를까, 요하나가 대체 어떻게 그 기묘한 마나를 육신에 품고 있는지 제플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제플린은 결국 다른 질문을 입에 담았다.
"...무엇과 대적할 것이오?"
무엇과 대적하기 위해 나의 무구를 요구하는가.
그게 언제나 제플린이 무구를 창조하고 제련해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언제나 동일한 제플린의 요구에 요하나가 짧게 답했다.
"스페라. 스페라 프리슬란."
"성녀?"
"아니, 성녀가 아니야. 인류를 배반한 변절자고, 엘-람과 악신의 힘을 한몸에 융합한 혼종이지."
"..."
제플린이 가만히 요하나를 마주 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천천히 뒤틀었다.
나름 만족한 기색을 내비친 제플린이 요하나에게 다시 물었다.
"음... 이해했소. 그런데... 대적자가 정녕 혼종이라면... 할 수 있겠소?"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 역할을 다해."
"그 결의가 거짓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요구하시오. 나도 나의 모든 역량을 다할 테니."
제플린이 크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하더니 아틀리에의 심부로 잠시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반응을 실험해보아야 할 금속이 몇 종류 부족하군. 사흘 뒤에 다시 오시오. 실험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춰놓을 테니."
"알겠어."
요하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플린에게 등을 돌렸다.
제플린의 아틀리에에 나와 황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거리를 지나치던 요하나는, 움직이던 도중에 익숙한 얼굴과 마주칠 수 있었다.
디디에였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이자, 요하나가 과거에 마스터로 모셨던 인물이었다.
디디에와 마주친 요하나가 부드럽게 다듬은 목소리로 축하부터 건넸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18개월 전쯤에 디디에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는 올랐으나, 비교적 힘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요하나는 자신이 오벨리스크에 칩거한 사이 디디에가 새로운 힘에 완숙해졌음을 알아채고 축하부터 건넨 것이었다.
요하나는 디디에와 가볍게 인사를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디디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호위할 인물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었다.
"..."
약 7년 전에 비해.
황도는 많이 복구된 상황이었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는 전부 사라졌으며, 루나에게 출입을 허가받은 소수의 인물들이 황도에서 거주하거나 황도를 왕래하고 있었다.
물론 황도에 진입한 인물들의 위치와 움직임은 결계에 의해 계속해서 추적되고 있었다.
적어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황도에 진입하여 수작을 부리는 건 매우 어려웠다.
요하나는 가늘어 빠진 시냇물 같은 인파 너머로 지미와 벨라를 발견했다.
레이의 아이인 엘리와 카니아가 지미와 벨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반복하며 외치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엘리와 카니아를 이내 지미가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엘리와 카니아는 꺄르르 웃으며 지미의 뺨을 잡아당겼다.
그 사이... 벨라는 잠시 제자리서 멈춰 서더니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루나의 결계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과거의 하늘을 닮은 환영을 그렇게 지상에 비추어주고 있었다.
벨라는 여전히 고통이 서려 있는 야윈 눈가로, 그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요하나는 굳이 묻지 않고 등을 돌렸다.
*
2개월이 더 지났다.
화이트타워의 완성을 서둘러야 했고,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대륙의 여론도 찍어눌러야 했다.
마경 쪽의 전선에도 부하가 걸리고 있었기에, 이제는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요하나 또한 결단의 시기가 거의 다가왔음을 직감할 때쯤, 루나가 요하나를 호출했다.
요하나 외에도 데런, 지미, 매튜, 디디에, 헤이든이 루나의 호출을 받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인물들은 전부 루나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요하나가 가장 먼저 루나에게 물었다.
"소문낸 거 반응은 어때?"
제국은 '스페라가 악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타락했다'는 소문을 한참 전부터 지속해서 퍼트리고 있었다.
허나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좋지 못 했다. 다들 그 소문을 비웃었고, 제국민들조차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근거 없고 허황되게 느껴지는 소문이 여론에 영향을 끼칠 거라 제국의 수뇌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요하나. 네가 증명해야 해."
스페라의 정체를, 요하나가 만인의 앞에서 드러내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제껏 제국이 퍼뜨린 소문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요하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 뒤는 어떻게... 민중들한테 설명할 거야?"
"..."
성녀였던 스페라가 악신에 의해 타락했을 뿐인가? 아니면 엘-람이 이 대륙을 저버리고 악신과 손잡아 이 세상에 파멸을 안기려 하는가?
과연 대륙민들에게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는지... 이것만큼은 루나 또한 확실한 답을 정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수천 년이 훨씬 넘어서는 시간 동안 대륙과 인류를 뒤덮고 있던 엘-람의 그림자는 그토록 거대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할 거야."
일단 상황에 따른 대응안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다.
대륙을 휩쓸 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루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본제를 입에 담았다.
"...앞으로 두 달 안에, 노르드에서 군사 작전을 시작할 계획이야."
"나도 노르드로 가는 거지?"
"아니."
요하나의 물음에 루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노르드에서 진행되는 작전의 목표는 스페라를 끌어들이는 거야."
루나가 허공에 홀로그램 형태의 지도를 그려내며 성국과 노르드의 위치를 나타냈다.
"...하지만 스페라가 직접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어. 대신 성국의 병력이 움직일 거야."
스페라는 함정이라 판단되는 전장에도 얼마든지 성국의 병력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어차피 스페라에게 있어 성국의 병력을 소모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대륙을 약화시키고 자기 적을 줄이는 행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성국의 병력이 제국에 의해 크게 학살당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을 이단으로 몰아 여론의 우세를 굳히는 것도 가능했다.
설령 그 직후 성국이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해도, 대륙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갇혀 결집하지 못 한 채 무너져 갈 것이다.
"...요하나."
"응."
"너는 성국에 잠입한 후, 스페라가 아닌 성국의 방위 병력이 노르드로 움직이게 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병력 공백을 활용해 스페라를 직접 타격해야 해."
"..."
"...승리하기는 힘들 거야."
"..."
"최선을 다해 스페라의 역량을 끌어내서, 모두가 보는 앞에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 해."
"...알겠어."
이번 작전의 대략적인 개요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작전이 실패하면, 내가 직접 나설 거야."
그건 되도록 기피해야 하는 최후의 수였다.
그렇기에 더욱, 이건 대륙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작전이었다.
또한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이 작전이 성국의 붕괴를 초래하리란 것만은 분명했다.
*
첫 번째 회의를 마치고.
데런은 인적 없는 복도에 홀로 서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데런이 품에 손을 넣어 책 한 권을 꺼냈다.
제국이 회수하는 데 성공한 금서 중 한 권이었다.
금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런이 얼마 전 나누었던 루나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데런.]
[어... 루나.]
그날 요하나에게 호출을 전달받고 루나를 찾아간 데런은, 무슨 일로 루나가 독대를 요구했는지 의아해했다.
의아해하는 데런을 은색 눈동자로 바라보던 루나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고 당혹스러운 경고를 입에 담았다.
[...내가, 너를 죽여야 할 수도 있어.]
[...]
데런은 루나의 그 경고를 이해하지 못 했다.
이해하지 못 하다가, 탁자 위에 올려진 금서를 보고... 루나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데런은 그 이상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루나가 대체 무엇 때문에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루나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걸 데런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런은 루나가 바라는 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탁자 위의 금서를 움켜쥐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이건... 다 내 욕심 때문이니까.]
[...]
[내 독단일 뿐이야.]
데런은 금서를 품에 챙겼다.
데런은,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 역할을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레이가 이루고자 했던, 그 잘 치장된 대의를 위해서. 얼마든지.
그건 하나의 신념이었고.
또한 광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