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00화 (400/446)

[32]

화악!

루나의 앞에 리실로테의 환영이 나타났다.

루나는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경과는?"

"아주, 성공적이지."

영과 육의 합일.

그를 통한 영혼의 동력화.

평범한 재능과 평범한 의지로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시도가 아니었다.

허나 요하나의 재능과, 요하나의 광기에 가까운 바람이 영혼의 속박을 풀어냈다.

물론 아직은 걸음마 단계였다. 이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 잠깐 방심했다가는 모든 게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현재로서는 폭주하지 않고 견디고 있는 것만으로도 요하나는 대부분의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지금부터는 영과 육의 완전한 합일까지 남은 단계를 천천히 밟아가야 했다.

루나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그 기술을, 실전에서 활용 가능한 시기가 언제야."

"중간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2년이면 충분할 거야."

요하나는 가진 것을 잃고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코어를 다시 창조해낼 필요도, 이질적인 힘에 맞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익힐 필요도 없었다.

요하나는 단지, 이제까지 쌓아올린 것들 위로 새로운 색을 덧칠하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소울웨폰을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2년 뒤라면.

요하나는 스페라가 활용했던 어두운 광휘에도 부족하게나마 대응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만한 기적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요하나는 이미 치렀다.

영속하였을 역사에 종언은 고했고, 그 무한한 순환 속에 잠재하고 있던 모든 가능성을 희생했다.

지금 이 순간이 요하나의, 요하나가 지닌 영혼의 마지막 삶이었다.

이 마지막 삶에, 요하나라는 필멸자가 지닌 모든 가능성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었다.

"..."

루나는 데런의 생환 소식을 요하나에게 아직 알리지 않았다.

이질적인 힘을 제어하기 위해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 요하나에게 굳이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켜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요하나가 새로운 힘을 제대로 제어해낼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소식을 전할 예정이었다.

루나가 오벨리스크가 존재하는 방향을 바라본 채 입술을 달싹였다.

"...가서, 요하나를 보조하는 데 집중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리실로테가 순순히 루나의 명령에 답하고는 허공에서 빛 알갱이가 되어 사라졌다.

루나는 한동안 자리를 지킨 채 침묵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조금은 슬퍼 보였다.

"..."

기적을 이루기 위해선 대가가 따른다.

기적을 이루기 위해, 요하나도 루나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요하나는 제대로 보답받지 못 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영속하는 순환을 희생했다.

루나가 치러야 하는 희생은 요하나가 감수한 희생보다 결코 하찮지 않았다.

음울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루나가 작게 웃었다.

"언젠가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다시 울어주기를 바랄게요."

언젠가, 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울어주기를.

루나가 그 작은 바람을 입에 담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

18개월.

요하나가 오벨리스크에 칩거하기 시작한 지 18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에도 대륙과 마경의 전선에서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선의 전황이 크게 변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별개로 대륙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정신은 계속해서 마모되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피폐한 순간이 이어져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사력을 다해 전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후우..."

의자에 앉은 데런이 괜히 한숨을 내쉬어보았다.

데런은 몇 개월간 이어진 원정을 마친 후 황성에 잠시 복귀해 육체를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혹사가 반복된 육체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럼에도 데런은 황성에서 오래 머물 예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만큼 정세가 평화롭지 못 했다.

"..."

데런이 메마른 눈꺼풀이 깜박였다.

몇 개월 사이 더욱 메말라 버린 눈꺼풀이었으나, 그럼에도 눈꺼풀 안에서 비치는 데런의 눈빛은 과거보다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데런은 심신을 안정시키며, 안소니우스와 조우한 과거를 잠시 떠올렸다.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습니까?]

그날의 조우에서.

데런이 그리 목소리를 쥐어짰을 때, 안소니우스의 답변은 매우 냉정했다.

[선천적인 재능으로 인한 한계에 집착하지 마라.]

[...]

[임계에 달한 역량에 집착하지 말고 동일한 역량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라.]

그야말로 정론이었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재능의 격차도 한계가 명확했기에, 없는 재능에 과하게 매달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결의, 노력, 기연 따위로 선천적인 재능의 격을 아예 초월한다는 것은 동화책 속의 공상이었다.

안소니우스의 정론을 듣고서, 데런은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미 깨닫고 있던 진리를 다시 한 번 음울하게 곱씹었을 뿐이었다.

그런 데런을 마주보다, 안소니우스가 어둠 속에서 책 한 권을 지면에 떨어뜨렸다.

[가져가라.]

[예...? 이게... 무엇입니까...?]

[교황청에 봉인되어 있던 금서 중 하나다.]

갑작스레 안소니우스가 금서를 건네자 데런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데런에게 안소니우스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득한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시기가 존재했다.]

현재 대륙에 갑섭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은 세계수, 엘-람, 그리고 악신들로 구분됐다.

세계수와 엘-람을 제외한 초월적인 존재들을 전부 '악신'이라 나눠버린 셈인데, 물론 그게 그다지 엇나간 분류는 아니었다.

악신들은 악신이라 불릴만했기에 악신이라 불렸으며,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계수와 엘-람을 적대했다.

허나 먼 과거에는, 비교적 중립적인 성향을 지녔거나 혹은 너무 난해한 성향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들도 대륙에 간섭했다는 기록이 일부나마 남아있었다.

한때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현재는 대륙에 영향력을 상실한 초월적인 존재의 기록들.

그건 신성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성직자에게 이단의 역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신성교단은 극소수 남아있는 '잊힌 것'들에 대한 기록 자료를 폐기하거나 혹은 금서로 지정해 봉인해두었었다.

[남아있는 금서가 있다면, 되도록 신속하게 회수해라. 필요할 수 있을 테니.]

안소니우스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안소니우스는 더는 데런의 손짓에 걸음을 멈춰주지 않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시 데런은 안소니우스의 저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었다.

"..."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초월적인 존재를 이 대륙에 다시 불러들이기라도 하라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협력이라도 얻어내라는 것일까?

그게 데런이 가장 처음 떠올린 추측이었다.

허나 이 사안에 관해 루나와 상의를 하고 나서, 데런은 안소니우스의 저의를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미끼."

먼 옛날에 영향력을 상실한 초월적인 존재와의 접촉 및 협력을 시도한다는 건 확률 낮은 도박수였다.

그러한 시도는 이미 혼란스러운 대륙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엘-람과 악신들 또한, 먼 옛날에 영향력을 상실한 초월적인 존재가 대륙에 다시 손아귀를 뻗는 것을 달가워할 가능성은 낮았다.

또다른 변수, 혹은 경쟁자가 이 판에 개입한다는 뜻이니까.

바로 그 점을 활용한다면... 어쩌면 금서를 활용해, 엘-람과 악신들의 권능을 내려받은 스페라를 특정한 장소로 유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현재 데런이 알고 있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물론 데런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루나는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를 데런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데런은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영역의 이야기를 굳이 듣고자 하지 않았다.

어쨌든, 금서를 미리 확보해둘 수 있다면 추후 어떤 형태로든 활용 가능했다.

제국은 금서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엘프의 협력까지 얻어가며 강행했고,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확보한 금서에서 얻은 정보를 과연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이제 루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

생각을 이어가던 데런이 잠시 눈을 감았다.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된 사안들은 데런이 제대로 이해하고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데런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갈증이 나는 듯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그때, 쥬세핀이 데런을 찾아왔다.

"데펜시오 백작님이 귀환하신다고 합니다?"

"...누님께서?"

*

요하나는 18개월 동안 오벨리스크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 기간 동안, 속박을 풀어낸 영혼에서부터 흘러넘치는 힘을 육신으로 받아내기 위해 심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했다.

요하나는 힘의 제어가 안정된 이후에도 반년 가까이 오벨리스크를 떠나지 않았다.

부족하게나마 목표로 했던 수준에 다다른 이후에야 요하나는 황성으로 복귀하기 위해 오벨리스크를 떠났다.

"...큰 문제는 없었나 보네."

요하나는 황성으로 향하며 그리 중얼거렸다.

만약 1년 반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루나가 요하나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거꾸로 루나가 귀환 요청 없이 요하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건, 아직까지는 대륙이 잘 견디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요하나가 1년 반만에 황성에 귀환하자 많은 이들이 요하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들 중에서도 요하나를 가장 반긴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와 알레시아의 딸인 엘리였다.

"요하나 이모!!!"

요하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외친 엘리가 방방 뛰어오더니 요하나 앞에서 손아귀를 펼쳐 보였다.

"짠!!"

화륵!

엘리의 손아귀 위로 촛불 정도 되는 불꽃이 잠깐 나타났다가 증발했다.

엘리는 선천적으로 서클을 타고난 네추럴이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덕분에, 엘리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서클을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직은 촛불 정도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엘리는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요하나를 마주 보았다.

칭찬해달라는 기색이 만연한 엘리를 보고 요하나가 피식 웃었다.

"니 엄마보다 낫네."

"?"

자식 자랑하려고 곁에 있었던 알레시아가 갑작스러운 요하나의 디스에 눈가를 콱 좁혔다.

허나 알레시아가 눈가를 좁히거나 말거나 엘리는 요하나의 칭찬을 받고 히죽거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당연하지! 엘리는 엄마보다 똑똑해!"

"..."

알레시아가 이번엔 자기 딸아이를 향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요하나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꿀밤 마려운 것도 유전인 듯했다.

몇 사람과 더 인사를 나눈 뒤, 요하나는 데런과 대면할 수 있었다.

데런이 생환했다는 소식은 이미 한참 전에 전달받았다.

허나 이렇게 두 눈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데런을 보니, 역시 다가오는 감정이 다르기는 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데런을 향해 요하나가 팔을 힘껏 휘둘렀다.

퍽!!

"억...!!"

데런이 요하나의 손아귀에 어깨를 강하게 얻어맞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끙끙거리는 데런을 향해 요하나가 오랜만에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행이야."

"네, 누님..."

데런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나는 데런과 짧게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고는, 곧바로 다른 것을 물었다.

"근데... 준비되어 있어?"

"뭐가요?"

"스페라를 죽일 수 있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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