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불멸 [5]
[31]
이 작은 세계의 주민들이 부상한다.
그 광경을 마주하며, 요하나는 근원적인 공포를 느꼈다.
부상하고 있는 저들 모두가 하나의 삶이며 하나의 인격이었다.
그들의 삶이 아무리 하찮았다고 해도 각자의 감정과, 갈망과, 기억을 지니고 있는 그들의 존재감을 함부로 폄하할 수가 없었다.
요하나는 제자리서 주춤거리다가, 다시 한 번 백색 공간을 돌아보았다.
시야가 닿는 끝자락에, 백색 공간의 경계로 보이는 반투명한 면을 따라 거대한 사슬이 이 작은 세계를 가두듯이 감겨 있었다.
저 사슬이 바로 영속하는 순환 속에서 영혼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그와 더불어 영혼의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이기도 했다.
요하나는 저 사슬을 끊어내야만 했다.
그게 바로 영과 육의 합일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
마음을 뒤덮은 근원적인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해내야 한다.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스스로에게 그리 속삭인 요하나가 주먹을 말아쥐고 걸음을 내디뎠다.
요하나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백색 공간에 부상한 주민들의 시선이 점점 더 요하나에게 집중되었다.
요하나는 그들의 시선이 구역질이 날만큼 거북했다.
그러나 눈꺼풀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요하나는 마찬가지로 느껴지지 않는 이빨을 악무는 상상을 하며 또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요하나가 향하려는 방향을 확인한 이 세계의 주민들이 점점 더 세차게 요동쳤다.
다음 순간, 요하나의 발밑이 갑자기 푹 꺼졌다.
무심코 고개를 숙인 요하나는 자기 발밑에 다가와 있던 이 세계의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
요하나는 또다시 생소한 기억과 마주했다.
어디선가 평민으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다가 열병에 들어 죽어버린 삶의 기억이었다.
요하나는 억지로 뇌리를 파고드는 생소한 기억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헌데 그 찰나.
백색의 공간에서 너울지던 주민들의 물결이 한꺼번에 요하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
요하나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의 기억이, 갈망이, 고통이 뇌리를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하나의 삶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기억이 요하나를 덮쳤다.
그 끊임없는 삶의 격류가 요하나의 의식을 휩쓸었다.
눈을 돌리고 싶어도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요하나는 무력하게 뇌리를 헤집는 삶의 격류에 휩쓸려야 했다.
"...!!!!!"
그 격류 속에서.
요하나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풍경과 기시감이 느껴지는 문화 속에서 눈을 뜨기도 했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언어와 문물로 이루어진 별세계 속에서 태어나 임종을 맞이하기도 했다.
영혼이 존재한 시간만큼이나 길고 긴 삶의 역사가 요하나의 자아를 휩쓸었다.
요하나의 자아를 휩쓸어 낱낱이 바스러뜨리려 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요하나가 감당하기엔, 영혼에 새겨진 삶의 역사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하지만.
단순히 긴 시간의 삶이 자아에 강인함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자아에 강인함을 부여해주는 건 삶의 길이가 아닌 궤적이었다.
얼마나 삶에 헌신했는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운명과 투쟁했는가.
자아에 강인함을 부여해주는 건... 바로 그런 강렬한 저항의 흔적들이었다.
이 작은 세계의 주민들 대다수는 그저 태어났기에 삶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그저 운명에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그려낸 그 하찮고 흐릿한 삶의 궤적으로는... 감히 요하나의 자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으... 아...! 아...!! 아...!!!"
요하나가 손아귀를 부서져라 말아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사고가 자꾸만 끊겨나가고 기억에 혼란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온몸을 휩쓸 것처럼 불어닥치는 억센 물살을 거슬러서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콰악!!
몰아치는 격류에도 요하나가 멈춰 서지 않자, 점차 강인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이 세계의 주민들이 요하나를 향해 부상했다.
또다시 무수한 공명이 일어났다.
요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이 알지 못 하는 감정과, 갈망과, 기억과 마주해야 했다.
달콤한 속삭임이, 끔찍한 괴성이,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뇌리를 울리며 요하나의 의식을 금방이라도 녹여낼 것처럼 날뛰어댔다.
허나 그럼에도, 요하나는 자아를 잃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고함을 뱉어냈다.
"나는...!!! 요하나야!!!"
그래, 나는 요하나다. 필립스 백작령의 요하나다.
하찮게 얼어죽을 뻔하다가 삶을 구원 받은, 필립스 백작령의 철없는 소녀였다.
"그게 나라고!!! 과거의 잔재 따위가!!! 나를 침범하지 마!!!!!"
요하나는 결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무너져버린다면, 그렇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하고 삶을 끝마치게 된다면.
요하나는 삶을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와, 영원히 과거의 후회를 곱씹어야 했다.
그건 안식이 아니었다. 주민들에게 이곳은 안식처가 되어주었을지 모르나, 죽음 이후 요하나에게 이곳은 지옥과 다름 없었다.
무수한 역사에 짓눌리고, 순환의 종말과 마주해야 하는 공포보다도...
요하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한 채 후회를 품고 삶을 끝마치는 게 더 두려웠다.
그랬기에 요하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켜!!!!!"
요하나가 넘어졌던 몸을 일으키며 얽혀들던 주민들을 밀쳐냈다.
네놈들 따위로는 나를 막아세울 수 없다고, 요하나가 그리 발악하려던 순간.
요하나의 앞에, 찬란하고 성스러운 갑주를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
요하나는 혼란이 가득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
길고긴 영혼의 순환 속에서 기록된 '가장 찬란했던 역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음을, 요하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요하나와 기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의식의 공명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기사는 요하나에게 짧게 경고했다.
"돌아가라."
"..."
아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요하나는 무언으로 답을 대신하고선 다시 저 너머의 사슬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기사는 자신을 지나치는 요하나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허나 기사를 제외한 이 세계의 주민들은, 요하나가 사슬과의 거리를 좁혀갈수록 더욱 악착같이 요하나에게 얽혀들기 시작했다.
요하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꺼졌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의식은 자꾸만 깊은 어둠 속으로 침전하려 했다.
멈추지 않는 삶의 격류가, 요하나의 정신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
요하나는 더욱 더 두려워졌다.
이 작은 세계의 주민들이 느끼는 공포가 요하나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요하나는 이제야 '순환의 종말'이 뜻하는 끔찍한 공포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순환의 종말'이란 대가를 너무나 하찮게 여겼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하나에게는 그 어떤 열락과 공포보다도 우선하고자 했던,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의... 바람."
요하나가 손아귀를 말아쥐었다.
어느새 요하나의 손아귀에는,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토록 소중했던 존재가 떠나가며 남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쓰라린 상처가... 지금 이 순간 요하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당신을 위해..."
요하나가 서글프게 웃으며, 목걸이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불멸을."
그 어떤 처절한 저항과 공포 앞에서도.
요하나의 그 간절한 바람은 꺾이지 않고 광휘가 되어 앞을 밝혔다.
영혼에 새겨진 무수한 역사들이 손아귀를 뻗어 요하나를 붙잡았으나 그 과거의 잔재는 더는 요하나를 막아세울 수 없었다.
요하나는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찬란하고 성스러운 갑주를 입은 기사가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길고 긴 영혼의 순환 속에서 기록된 가장 찬란했던 역사이자, 한 집단의 정점에 올라 '팔라딘'이라 칭해졌던 인물.
초인에 오른 축복과 감각으로 때로는 미래를 예감하기도 했던 팔라딘은, 이 작은 세계가 악신의 손아귀에 잠식될 것임을 과거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날 기적처럼 찾아온 광휘가 요하나를 구원하고 팔라딘이 엿보았던 운명을 뒤틀었다.
그리고 그 광휘가 결국... 요하나로 하여금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
이건 추락인가, 아니면 혁명을 위한 개변인가.
팔라딘은 요하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팔라딘은 과거 신의(神意)를 위해 신의(信義)를 배반했다.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기도에 의지했고 기만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신성을 가장했다.
한평생을 초월적인 존재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던 팔라딘의 앞에서...
요하나는 홀로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
마침내 요하나가 사슬이 맞닿아 있는 경계에 도착했다.
그런 요하나의 앞에 팔라딘이 마주 섰다.
팔라딘은 말없이 요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요하나를 바라보던 팔라딘이, 마침내 허공에 빛으로 이루어진 검 한 자루를 빚어냈다.
"..."
팔라딘은 광검의 날을 잡아 요하나에게 건넸다.
요하나가 광검을 받아들더니 망설임 없이 팔라딘을 지나쳤다.
팔라딘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의 오만이 신벌을 부를 것이다."
"상관 없어."
신벌 따위, 극복하면 그만이었다.
요하나에게 별빛 너머의 초월자는 더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독립하고, 극복해내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팔라딘은 요하나의 뒷모습이 참 한스럽고도 기꺼웠다.
츠즉!!
요하나가 경계에 맞닿은 사슬을 향해 광검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은 없었다. 광검이 휘둘러지고, 날카롭게 연마된 섬광이 영혼을 속박하던 오래된 사슬을 끊어냈다.
쿠웅!!!!!!
거대한 울림이 백색 공간을 뒤흔들었다.
팔라딘이 요하나에게 다가오더니, 광검을 쥔 요하나의 손아귀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우리의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리고, 기억하거라. 가장 어두운 전장에서도, 너는 혼자가 아님을."
"..."
"영혼을 이루는 우리의 역사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트드드드득!!!
억지로 속박되어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백색 공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이 작은 세계를 살아가던 주민들이 각자의 감정을 품은 채 요하나를 바라보다 차례차례 연기가 되어 흐트러졌다.
팔라딘 또한, 요하나의 손아귀에 한 자루의 섬광을 남긴 채 서서히 흐트러졌다.
화아아악!!!
속박되어 있던 영혼의 힘이 너울지며 흘러나와 요하나의 의식을 덮어갔다.
요하나의 정신과 영혼을 중계하던 리실로테가, 그 금지된 개변을 감지하고 입꼬리를 힘껏 뒤틀었다.
"그래, 아이야. 한 번 해보자꾸나."
리실로테의 그 일그러진 웃음은 언제나 별빛 너머를 향해 있었다.
"신의 권능을 취한 사도를...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부숴보자꾸나."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인간의 영과 육의 힘으로.
"더는 너희의 뜻대로 우리를 유린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거다."
이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