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8화 (398/446)

외전 - 불멸 [4]

[30]

황성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요하나가 중요한 임무에 실패한데다 데런까지 실종되었으니, 활기가 돌기 어려웠다.

허나 꼬맹이들이 그런 외적인 문제를 깊게 고려하긴 어려웠다.

며칠 동안 가라앉은 분위기 탓에 눈치를 보던 엘리가 참지 못 하고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심심해...!"

"..."

"너는 안 심심해?"

"..."

카니아가 은근히 한심한 눈빛으로 엘리를 쳐다봤으나, 엘리는 무시하고 투정을 중얼거렸다.

"엄마도 안 놀아줘! 우리 황제 폐하한테 가볼까?"

"언니."

"응!"

"언니는 철이 없어. 너무."

"...!"

아직 젖살이 빵빵한 동생 녀석이 철 타령을 하자 엘리가 기가 차서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니아가 타박을 이어갔다.

"언니도 이제 철이 들어야 해. 그래야 참을성이 생긴대."

무릇 어린 애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어른스럽나'보다 중대한 논제는 없는 법이었다.

카니아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자 엘리는 일단 카니아의 어깨를 퍽 밀었다.

엘리가 어깨를 미니 카니아도 밀었고, 카니아가 어깨를 미니까 엘리도 다시 밀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슬슬 머리끄덩이를 잡는 수준까지 발전되기 직전에,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

싸우다가 세리아한테 걸리면 또 벽 보고 의자에 앉아 두 팔을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임시 휴전을 한 엘리와 카니아가 서로 거리를 떨어뜨리는데, 복도 끝에서 지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근히 얼굴 보기 힘든 지미가 나타나자 엘리가 먼저 쪼르르 달려갔다.

"할아부지~!"

와다다 달려간 엘리가 폴짝 뛰자 지미가 일단 엘리를 한 손으로 안아서 들어 올렸다.

엘리가 꺄르르 웃으며 물었다.

"할아부지 어디 가?"

엘리의 물음에 지미가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었다.

"아... 데런이 돌아온다고 해서, 마중 나갈 거야."

"데런? 만날 얼굴 찌푸리고 화나 있는 오빠?"

"하하, 그래. 참 다행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리라 생각했던 데런의 생환 소식을 조금 전 듣게 된 지미가 기쁨을 드러내며 웃었다.

황성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에 엘리와 카니아가 그저 좋아하며 따라 웃었다.

할아부지 할아부지 외치며 쫄쫄쫄 따라오려는 두 아이를 세리아에게 맡긴 지미가, 매튜와 함께 황성을 나섰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데런이 황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게이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데런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안색도 나빴고 걸음도 절고 있었다.

그럼에도 생환하는 데 성공한 데런의 어깨를 지미와 매튜가 가볍게 쳐주었다.

앞으로는 다시 보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하게 된 데런이 담담하게 웃었다.

"루나에게 해야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바로 가자."

데런의 의사를 존중한 지미는 데런과 함께 곧장 황성으로 귀환했다.

이윽고 데런은 황성에 도착해 지미, 매튜, 그리고 루나와 한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데런이 입을 열었다.

"늦어도 3년 안에 확실히 정리해달라고 했어."

"..."

"그리고..."

데런은 안소니우스가 전하라고 했던 내용을 루나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루나는 데런의 이야기를 일단 조용히 들었다.

앞으로 3년. 안소니우스는 루나의 기대 이상으로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가 지닌 강인한 의지 하나가 제국이 판세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

안소니우스가 최종 기한을 전달했으니 루나 또한 더는 복잡하게 고민을 이어가지 않아도 됐다.

우선 3년 안에 '마왕'에 대응하기 위한 대륙 단위의 방위 체계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여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2년 안에 스페라를 타격할 수 있는 카드를 준비해야 했다.

"..."

성공적으로 대륙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스페라를 죽이지는 못 하더라도 혼종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도록 해야만 했다.

이건 여론전이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를 사냥하겠다고 성국과 전면전을 벌여 과도한 인명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스페라를 성국 밖으로 기어나올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았고, 스페라가 기어나오지 않는다면 성국의 심부에 정예 타격대는 먼저 밀어 넣어야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2년 뒤에도 스페라를 타격할 수 있는 유의미한 카드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루나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장기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직접 성국을 찾아가 스페라를 찢어 죽여야 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을 정비하고 있는 루나를 향해, 데런이 안소니우스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레이와의 계약은 이행될 것이라 했어."

"..."

루나는 잠시 가만히 데런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 외에, 나한테 더 전할 말 있어?"

"..."

이번엔 데런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숨을 삼키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누님은, 어디 있어?"

"...오벨리스크."

*

"알겠어."

요하나가 답했다.

덤덤해 보이는 요하나를 바라보며 리실로테가 조소했다.

"그래,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단다. 그리 쉽게 대답할 줄 알았어. 뻔하지 않겠니?"

허공에 떠 있던 리실로테는 짓궂어 보이는 웃음과 함께 요하나 앞에 내려앉았다.

요하나는 변덕스럽게 느껴지는 리실로테의 말투와 태도가 매우 거슬렸지만, 굳이 그 점을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요하나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냉기가 서린 눈빛으로 리실로테를 노려보자, 리실로테의 입꼬리가 더욱 뒤틀렸다.

"인간이란 본디 보이지 않는 것을 과하게 두려워하거나 과하게 무시하는 법이니, 순환의 종말이니 뭐니 설명해봤자 네게 잘 와 닿지는 않을 거야."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꿈 꿔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윤회라는 개념에 무지하니 '순환의 종말'을 대가로 내걸어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었다.

요하나에게 있어 삶이란 반복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요하나에게 있어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요하나는 스페라와 마주 가능한 비기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내생 따위는 포기할 수 있었다.

요하나는 자꾸만 되지도 않는 훈계를 하려는 리실로테를 향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소울웨폰을 얻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해?"

"네 역사를 마주 봐야지."

리실로테가 자기 가슴을 톡톡 두드리더니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을 거둬갔다.

"부디 꺾이지 마. 방심했다가는 저항도 못 하고 녹아 사라질 것이니."

"..."

"내 조언을 귀담아듣는 게 좋을 거야. 직접 체험해보고 해주는 조언이니까."

"...직접 체험했다고?"

"그럼. 아니면 내가 어떻게 나의 영혼을 쪼개고, 나의 원념을 이곳에 남겨 너를 마주하고 있겠니."

리실로테가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시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 네가 재촉하니... 그래, 아이야. 첫 번째 관문을 바로 시작해보자꾸나."

"...첫 번째 관문?"

"지금부터 시작할 것은 네가 소울웨폰을 얻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자, 가장 고난한 절차가 될 거야."

"..."

"명심하렴, 아이야. 기회는 한 번이야. 실패하면... 꼭 죽는 건 아닌데, 두 번째 기회는 없어. 첫 번째 기회에 실패하면 소울웨폰은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알겠니?"

"...어떻게 해야 통과할 수 있는데?"

"이제야 태도가 좀 조심스럽구나. 허나 안타깝게도 해줄 수 있는 조언이 그리 많지는 않아. 흠... 너의 '바람'... 네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집중하렴. 네 의지를 지탱해주는 갈망이 네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터이니."

"...난해해. 더 정확히 설명해줘."

"직접 한 번 부딪쳐 보렴. 어차피 입으로 설명해봤자 와 닿는 건 없을 거야."

드드드드득!

갑작스레 오벨리스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아니었다. 리실로테에 의해 막대한 마나가 오벨리스크의 심부에 집중되기 시작하며 그 반동으로 진동이 발생했다.

일시에 다량의 마나가 심부에 집중되자 오벨리스크의 기능 중 다수가 이상을 일으키거나 정지했다.

현재 황성에 있는 루나는 오벨리스크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리실로테가 마나를 운용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루나의 방관을 확인한 리실로테가 싱긋 웃더니 요하나와 함께 서 있던 공간을 결계로 감싸기 시작했다.

"먼 과거에 선인이라 불리었던 존재들은 오랜 정신 수양을 통해 자신의 '안'을 관조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이제부터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갈 거야."

"..."

"현재는 육체에 속박되어 있는 네 정신이, 네 영혼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중계해줄게. 네 역사와, 네 진정한 본질을 한 번 마주해보렴."

"..."

"아이야, 부러지지 마렴. 휩쓸려서 네 자아를 잃어버리지 마렴. 네가 그리 무너져버리면, 네 정신과 영혼을 중계하고 있는 나까지 위험해지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를 건넨 리실로테가 요하나의 뺨을 가볍게 매만져 주었다.

그 직후.

돌풍이 불어닥치며 요하나의 시야가 환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

"..."

돌풍이 지나간 후.

다시 눈을 뜨자 요하나는 백색의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백색이었다. 거리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까지도, 하얀 물감에 섞여버린 듯 보이지가 않았다.

"..."

요하나가 정신을 집중하며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러자 백색의 공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주먹의 형상을 이루었다.

요하나는 천천히 신체의 감각을 기억에서 되살려보며 점점 더 인간의 형체를 갖추어 갔다.

이내 연기 덩어리로나마 형체를 갖추게 된 요하나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모든 것이 백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웬 털 난 원숭이처럼 생긴 작은 인간이 가까운 곳에 나타나 있었다.

요하나는 원숭이처럼 생긴 인간을 잠시 멀거니 바라보았다.

주저앉은 채 무언가를 주워 먹는 시늉을 하던 원숭이처럼 생긴 인간이, 요하나가 시선을 주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

...배가 고팠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떨어졌다.

추워서, 사냥도 잘 되지 않았다.

부족의 인구가 줄었다.

나는 아직 어려. 사냥할 나이 아니야.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버려지거나, 잡아먹혀.

같이 사냥을 따라나갔다.

얼음을 밟고 미끄러져서 넘어졌다. 상처가 생겼다. 깊었다. 피가 났다.

사냥하고 돌아와서 몸에 열이 났다. 뜨겁다. 머리 아프고, 배고프다.

잠을 자도 계속 아팠다.

의식이 흐려졌다. 그게 끝이었다.

"...!!!!!"

뇌리를 헤집고 지나간, 누군가의 짧고 하찮은 삶의 기억.

갑작스레 남의 기억을 체험하게 된 요하나가 당혹을 감추지 못 하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

네 역사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리실로테는 요하나에게 그리 경고했었다.

요하나는 그제야 리실로테의 경고가 무엇을 뜻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작은 세계였다. 요하나가 알지 못 했던 혼의 역사가 새겨진 작은 세계였다.

본래 요하나가 삶을 마치고 찾아왔어야 할, 그런 안식의 세계였다.

"..."

백색으로 물든 공간의 심부에서, 서서히 그림자가 너울지기 시작했다.

이 작은 세계의 주민들이 하나둘 형태를 갖추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그들의 안식처.

죽음을 맞이하고 삶을 돌아보는 이들의 낙원이다.

그리고 요하나가 하고자 하는 일은... 순환의 종말.

바로 이 작은 세계에... 종말을 안기는 것이었다.

"..."

요하나는 그제야 리실로테가 무엇을 경고하였는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결코 요하나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수호자였고, 요하나는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침략자였으니까.

요하나에게 이곳은 고향이자 적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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