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불멸 [2]
[28]
루나에게 오벨리스크의 권한을 대부분 넘겨준 후.
리실로테는 과거처럼 원하는 곳에서 제국을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현 대륙의 대략적인 정세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요하나가 이곳을 찾아오게 된 원인 또한 리실로테는 인지하고 있었다.
스페라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요하나는 찾고 있었다.
"..."
요하나의 눈빛은 차가웠다. 적대적이진 않았으나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레이가 '그런 선택'을 내리게 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리실로테라고, 루나는 굳이 요하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요하나가 리실로테에게 적대감을 품게 해봤자 득이 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루나가 리실로테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간결하게 경고해주었기에, 요하나는 경계가 서린 눈빛으로 리실로테를 마주 보았다.
요하나를 향해 리실로테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아, 그래서 찾아온 게 나야?"
리실로테의 웃음은 요하나를 향해 있었으나, 기실 리실로테가 웃음을 머금은 이유는 루나 때문이었다.
루나가 왜 이런 선택을 하였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르시아의 공간검을 제외하고는, 대륙 역사를 전부 뒤져봐도 '어두운 광휘'의 특수성에 대응 가능한 기술은 전무한 수준이었다.
'...에른스트 프리슬란이 완성시킨 두 번째 개안이라 해도 어두운 광휘에 완벽히 대응하기는 불충분할 터.'
두 번째 개안은 간접적인 형식으로 적의 특수성을 억제하는 기술이다.
프레체스가 다루던 변질된 권능까지는 대응할 만하겠지만, 과연 어두운 광휘의 특수성까지 충분히 억제 가능할지 리실로테는 회의적이었다.
결국 어두운 광휘에 대응하기 위한 당장 눈에 보이는 선택지는 공간검 하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존재 중 공간검의 가장 가까운 이해자는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이었다.
루나는 그 사실은 잘 알았다. 그에 더해, 루나는 공간검에 내재된 위험성 또한 리실로테 만큼이나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위험성을 알고 있음에도 루나는 요하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그게 과연 요하나의 재능을 신뢰해서 내린 판단인 것일지, 아니면 친우의 목숨을 판돈으로 도박을 걸어본 것일지...
루나의 그 저의에 흥미를 품으며 리실로테가 입을 열었다.
"어설픈 각오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 할 텐데..."
공간검이든 무엇이든, 어두운 광휘와 대적할 수단을 찾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가 필요했다.
"네가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느냐?"
"무엇이든."
요하나의 차가운 단언에 리실로테가 재차 조소를 터뜨렸다.
요하나의 단언은 허세가 아니었다.
요하나의 눈동자를 메우고 있는 강렬한 갈망과 의지는 쉽게 꺾이고 가라앉을 한순간의 충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리실로테는 섬뜩하게 빛나는 요하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더욱 비틀었다.
"네 희생은 보답받지 못 할 텐데?"
"상관 없어."
"그 아이처럼 구는구나."
닮았기에 이끌린 것인지 거두어들였기에 닮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아이가 걸어갔던 길을 따르려 해."
너무 많은 사랑을 주었고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레이가 죽음 직전 외면했던 그 사실이, 요하나를 레이와 닮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
리실로테는 잠시 침묵한 채 지금 상황을 돌아보았다.
결국 문제의 중점은 공간검을 재현해낼 수 있느냐였다.
공간검을 재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시도는 제국이 전부 다 해봤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실패의 과정에서 태어난 검술들이 로얄가드를 비롯한 제국의 기사단에 계승되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요하나는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고 각오를 밝혔으나, 애초에 죽을 각오 운운하다 정말로 죽어나간 인재가 세 자리 수였다.
확률 낮은 도박을 아무 검증 없이 시도할 수는 없었다.
"...먼저 네 재능을 한 번 보자꾸나."
리실로테가 그리 말하며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리실로테의 손짓과 함께 벽과 천장에 빛이 흘러나오며 술식을 그려내며 짓궂게 웃었다.
"이지스에서 경험해 보았을 거야. 결계가 네 정신을 잠식할 텐데, 신체의 감각을 억제하고 결계의 작용에 순응하도록 해."
"..."
리실로테가 발한 결계가 점점 더 요하나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항 없이 잠식을 받아들이는 요하나에게 리실로테가 설명을 덧붙였다.
"네 재능을 판별하기 위한 과정이니, 기억의 혼란을 부여할 거야. 물론 환영을 벗어나면 회복될 테니 걱정하지 말고."
"..."
"자, 그럼 나의 악몽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꾸나."
화악!!
*
"..."
대지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는 일렁이는 악의가 태양 대신 비쳤다.
요하나는 자신이 왜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은커녕, 자신의 이름과 목적조차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대지 위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혼란과 어지럼증 탓에 요하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허나 뒷걸음질치려는 요하나의 등을, 누군가가 막아 세웠다.
"검을, 쥐어라."
"...?"
"네게는 해야 할 일이 남지 않았더냐?"
리실로테가 손을 뻗어 요하나의 손아귀에 검 두 자루를 쥐여주었다.
요하나가 혼라스러워하면서도 리실로테의 인도 대로 검을 말아쥐자, 리실로테가 요하나를 그 자리에 두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디... 네 재능이 충분하다면 한 번 증명해보거라."
과거, 레이는 이 환영 속에서 어렵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그건 레이가 이미 공간검을 익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하르시아의 기술을 계승하고 있었기에, 레이는 이 환영 속에서 익숙하게 공간검의 마나를 다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하나는 레이와 달랐다.
요하나는 제로 베이스 상태에서, 기억의 혼란까지 부여된 채 공간검의 마나를 체험하게 되었다.
세간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인재들도 지금의 요하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공간검의 마나를 통제하지 못 하고 삽시간에 자멸에 이를 게 자명했다.
그토록 극악의 조건을 요하나에게 부여한 리실로테가 흥미를 드러내며 웃었다.
"천재라는 수식에 취해 자만하다 죽어나간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보거라."
그게 공간검을 탐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
검게 물든 대지 위에서, 두 손에 검을 쥔 요하나가 앞을 바라보았다.
악의가 뒤섞인 검은 물결이 요하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기억은 모호했고, 마음엔 혼란이 가득했다.
제어되지 않고 폭주하고 있는 체내의 마나는 이미 망가져 있는 육신을 더욱 가파른 속도로 무너뜨리고 있었고, 가슴 속 심장은 뛰지 않았다.
멈춰버린 고동 안에는 허망함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쓰라림은 여전히 요하나의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 눈물이 맺히게 했다.
그 쓰라린 눈물이 방황하는 요하나에게 의지를 품게 만들었다.
멈춰서서는 안 된다. 나아가야만 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했다.
저벅!
요하나가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통제되지 않는 체내의 마나는 요하나의 육신을 급격히 자멸로 이끌었다.
통제하려고 노력해봤지만 불가능했다.
4차원 시공간을 넘어서 맞부딪치는 마나의 격류는 도저히 평범한 인간의 감각으로는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얼마 못 가 육신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빠드득!
"..."
재능 없는 범인은, 간단한 3차원 도면조차 상상해내기 버거워하고는 한다.
그러나 진정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들은, 3차원에다 축까지 덧대가며 다차원 구조를 분석해내기 시작한다.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경험하기 불가능한 영역을 뇌리에 상상만으로 구축하여 진리로 향하는 길을 도출해 낸다. 천재라는 건 그런 존재다.
레이가 한 달을 고생하며 풀어내야 했던 수식의 답을 루나는 보는 순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레이의 눈에 수식은 그저 수식이었지만, 루나의 눈에 수식은 시각적으로 입체화 되어 그 내에 함의된 진리가 두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루나의 눈동자는 수식이라는 수단을 통해 세계의 진리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요하나는 루나처럼 불세출의 계산력과 두뇌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하나 또한 루나가 지니지 못 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
요하나의 육신이 지닌 경이로운 직감이, 육신을 타고 흐르는 괴이한 힘의 본질을 느끼고 파악해낸다.
공간검의 마나.
상위 차원에서부터 끊임 없는 격류를 발생시키며 통제를 불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 능력을 벗어난 곳에서 펼쳐지는 마나의 격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상위 차원에서 얼마나 난잡한 격류가 펼쳐지든, 결국 중요한 것은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되는 힘의 형태였다.
그 힘을 다루는 것이 인간의 육신이었기에,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되는 힘의 형태만 안정화된다면 상위 차원에서의 격류는 무시할 수 있었다.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요하나는 그 정답을 직감만으로 도출해냈다.
드드드드득!!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되는 힘의 형태를 안정화시키는데 집중한다.
난잡한 격류로 인한 부하는 전부 상위 차원으로 떠넘겨 버린다.
어차피 4차원 시공간에 묶여 있는 인간의 몸뚱이는 상위 차원의 격류와 맞닿을 일이 없었다.
드드드득...
요동치던 마나의 기류가, 점점 더 갈무리 되어 요하나의 육신을 흐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리실로테가 처음으로 놀라움을 드러냈다.
"거기까지 가능하다고..."
리실로테는 요하나가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 하게 기억의 혼란을 유도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오직 직감과 센스만으로 정답에 도달하여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벅!
요하나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요하나는 여전히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내 이름음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마음 속 쓰라림만이 선명하게 남아 자꾸만 턱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솔직하지 못 했다.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떼를 쓰고 성질을 부리더라도 곁에 있어주리라 믿었다.
홀로 삐져 있더라도 언제나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리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게 아니었음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건네고 떠나간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게 왜 그랬냐고,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는 원망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쫓으며, 요하나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 다시 돌아와..."
쓰라린 고백이 흘러나오며 눈물이 맺혔다.
그와 함께 육신에서 응집된 힘이 서서히 광휘를 이루었다.
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섬광을 바라보며 리실로테가 중얼거렸다.
"그래, 다르군."
천재라 자만하다 죽어간 수많은 머저리들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역시 안 되겠어."
공간검을 계승시킬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