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5화 (395/446)

외전 - 불멸 [1]

[27]

잠시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거칠어진 호흡처럼 너울지던 어둠이 서서히 안소니우스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안소니우스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네게 감히 폄하될 만큼 하찮지 않다."

그래, 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역겨운 굴레를 벗겨 내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위대한 변혁을 위한 투쟁이다.

그렇기에 현 대륙의 세력 구도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내부의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대외적으로 제국과 성국은 소극적인 적대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마경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마왕'이란 존재는, 남부를 파멸시킨 악신의 사도이자 대륙의 안위를 위협하는 가장 경계해야 하는 위험 인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허나 그 이면의 진실은 외적으로 드러난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어둠과 빛이 손을 잡았고, 성녀와 성국은 대륙을 기만하기 위한 종양이었다.

제국을 지키는 루나와 남부를 파멸시킨 마왕은, 초월적인 존재를 배제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기에 암묵적으로 협력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스페라가 자조했듯이... 이 세상은 너무나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일그러짐이 가치 없는 혼란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혼란이 종식되었을 때, 마침내 대륙의 필멸자들은 무력하게 유린당한 과거와 단절할 것이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스페라는 혼종으로 완전한 각성을 이루었다."

프레체스를 토벌하기 위한 마경 원정에 참전했던 안소니우스는 '혼종'이라는 입에 익은 단어로 스페라를 수식했다.

"제국은 반드시 대외적으로 스페라의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

스페라의 목적은 성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스페라는 성국의 수장이 되어 주요한 '상징성'을 거머쥐고 대륙의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위 마법만으로 성국을 붕괴시키는 것은 우둔한 선택이 될 것이다."

단순하게 힘으로 성국을 붕괴시키는 것은 스페라의 목적 달성만 도와주는 꼴이었다.

메테오나, 그에 근접하는 화력에 치중된 마법으로 성국을 날려버린다 해도 스페라는 무조건 생존한다.

멀쩡하게 생존한 스페라는 악의 제국에 핍박받는 성녀 흉내를 내면서 음지에서부터 균열을 키울 것이다.

대륙의 지도층 중에는 생존을 위한 합리보다 명분과 상징성에 큰 의미를 두는 자들이 많았기에, 지금 이상으로 제국이 제국으로서 명망을 잃으면 분열이 가속화된다.

물론 저항하는 모든 조직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도 루나라면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제 살점을 깎아 먹는 사이 어둠이 짓쳐들어올 것이다.

"제국이 스페라에게 강탈해야 할 것은 성국이 아닌 상징성이다."

프리슬란의 보석. 남부의 수호자. 엘-람의 사도. 기적을 이룬 성녀, 스페라 프리슬란.

제국이 강탈하야 하는 것은 그 찬란한 상징성이었다.

"제국으로 끌어내든, 성국으로 쳐들어가든, 스페라가 혼종임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게 만들어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스페라는 얼마든지 '성국을 포기하고 도망간다'는 선택지까지 고를 수 있었다.

어설프게 스페라의 정체를 까발리려고 시도했다가 일이 꼬이면 수습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해내야 했고, 설령 스페라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그 전에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혼종임을 각인시키고 죽여야 했다.

안소니우스의 요구를 듣다가, 데런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스페라가 혼종이라는 걸 드러내게 한다면, 그러면 다 끝나는 일입니까...?"

"..."

무심코 던졌다기엔 데런의 질문은 꽤 날카로웠다.

오만하게 굴었다가 신벌은 받은 필멸자의 이야기는 신화 속에 수없이 많았다.

교단의 교리에서 오만이란 죄악으로 발전하길 경계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은혜를 베풀었던 신이 인간의 원죄에 노해 세상을 불과 물로 정화하고,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 또한 이리저리 변형되어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

멸망 뒤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극단적인 종말론.

평화로운 시대에는 잘 먹히지 않을 내용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혼란의 시기에는 충분히 인간을 현혹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

스페라가 지닌 '힘'에 관해 성국 내의 모든 이들이 무지할까?

이미 스페라의 어두운 광휘를 인지하고도 스페라를 따르고 있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몰랐다.

수천 년간 대륙이 추종했으며, 수천 년간 대륙에 은혜를 내렸던 초월자의 변심과 배반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란 신성 교단과 거리를 두고 살던 인간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신실한 성직자들이야, 그 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멸망 뒤의 구원을 속삭이는 종말론을 기반으로, 성국의 고위층에 알음알음 타락의 기류가 번져나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

성직자들의 번민과 타락은 엘-람과 악신이 야합한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스페라가 혼종임을 빠르게 대외적으로 드러내, 스페라를 단지 '엘-람을 배신한 타락한 배반자'로 몰고 가야 했다.

엘-람과 악신이 야합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해봐야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었다.

"...내가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제국이 해결해야 한다."

끝내 안소니우스는 악신들의 의지에 잠식될 운명이었다.

그 잠식을 의지력으로 늦출 수는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고, 또한 안소니우스가 자멸을 택하기도 어려웠다.

비록 반발하고 있다고는 하나 안소니우스는 분명 유례 없는 수준의 역량을 지닌 챔피언이었다.

악신들은 안소니우스라는 귀중한 카드를 잃어버리는 걸 원치 않았다.

시간을 오래 들일지언정, 안소니우스를 온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멸을 택하려는 안소니우스의 행동을 악신들은 철저하게 억제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안소니우스가 완전히 마왕으로 각성하기 전에.

대륙은 지금의 혼란스러운 체계를 정비해야 했다.

설령 스페라의 제거에는 실패하더라도 제국을 중심으로 지휘 체계의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제국에... 루나에게 전해라."

"..."

"늦어도 3년 안에 확실히 정리하라고. 그 이상은 장담할 수 없다."

츠즉!

너울지던 어둠이 투구의 형상을 이루며 다시 안소니우스를 감쌌다.

그러자 데런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잔뜩 쉬어 있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게 끝입니까?"

데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투쟁을 지켜봐야 하는 범인의 괴로움이 데런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었다.

"제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둔한 두뇌로.

부족한 재능으로.

물러터진 의지로.

당신이 목소리를 앵무새처럼 전하는 것 말고도.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데런이 물었다.

*

요하나는 임무에 실패했다.

가장 우선돼야 할 유물의 확보에 실패했다.

유물을 회수하지 못 한데다가 다수의 고급 전력이 전사했다.

심지어 요하나를 가까이서 보좌하던 데런까지 실종됐고, 지하 시설에 진입했다가 생환한 자는 요하나와 쥬세핀 둘 뿐이었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정찰 절차를 생략하고 소수 정예로 시설 내로 진입한 것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대외적으로 해당 사건은 제국의 조사대가 지하에서 마족들의 급습을 이겨내지 못 하고 퇴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체 어떤 난적이 출현하여 요하나가 패퇴하였는가 말들이 많았다.

이번 사건을 가져다가 전선에서의 요하나의 실적이 부풀려진 게 확실하다고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요하나는 스페라의 존재에 대해 제국 상층부에 먼저 알리고 외부에는 함구했다.

루나는 요하나에게 함구를 이어가달라는 부탁을 전달한 후, 요하나를 황성으로 귀환시켰다.

부상이 심각했으나 요하나는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마치고 황성으로 귀환했다.

황성으로 귀환하자마자, 요하나는 루나를 찾아가서 대면했다.

루나는 처참하게 혹사된 요하나의 육신을 마주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

스페라 프리슬란.

요하나의 증언을 감안하면 스페라가 혼종으로 각성한 것은 틀림 없어 보였다.

혼종으로 각성한 스페라와 대적하고도 요하나는 생환했다.

스페라가 굳이 요하나를 살려보낼 이유가 없었기에, 루나는 안소니우스의 개입을 알아챘다.

비록 루나와 안소니우스는 하늘이 붉게 물든 후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음에도, 서로가 협력 관계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루나가 계속 침묵하고 있자, 요하나가 울분에 가득 차서 두 눈을 붉게 충혈시킨 채 물었다.

"그건 대체 뭐야...?"

"..."

"그건 대체 뭐냐고...!!!"

"...두 번째 혼종."

루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600년 전 첫 번째 혼종이 탄생했다.

루나가 마주쳤던 프레체스는, 그 첫 번째 혼종을 모방했을 뿐이었다.

프레체스는 엘-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악신들에 의탁해 권능을 변질시킨 반쪽짜리였다.

허나 프레체스가 변질시킨 반쪽짜리 권능조차도 대륙을 파멸 직전에 몰아넣을 만큼 강력했다.

진정한 혼종으로 각성한 스페라가 손에 쥔 어두운 광휘의 특수성은, 프레체스의 변질된 권능보다도 상리를 벗어나 있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어두운 광휘는 별빛 너머를 위협할 만큼 두려운 재능을 타고난 필멸자를 죽이기 위해 초월자들이 빚어낸 권능의 결정체였다.

600년 전 하르시아를 제거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첫 번째 혼종이었다.

스페라는 그 힘을 계승했고, 현재의 루나라고 해도 스페라를 맞상대하는 것은 힘겨웠다.

적어도 루나의 홈그라운드인 황성에서 부딪쳐야 승산이 있었다.

영맥의 마나를 전부 동원해 온 힘을 쏟아내야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만약 루나가 스페라의 정체를 까발리기 위해 성국으로 찾아가는 무리수를 둔다면, 스페라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 루나를 죽여 최종 목적을 빠르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스페라는 굳이 리스크까지 감수하며 요하나의 생환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랬지만.

스페라가 착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황성이 아니더라도.

루나는 지금 당장 그 어떤 불리한 조건과 장소에서도 스페라를 확실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라를 죽이기 위해서는, 루나 또한 현 시점의 자기 경지와 모든 전력을 별빛 너머의 존재들에게 노출시켜야 했다.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아직까지 루나의 성장 속도를 저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여전히 서로의 견제를 이어가며 대륙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나가 전력을 다해 스페라를 제거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유리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치명적인 불리함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

루나가 직접 나서는 것은 되도록 마지막 선택지가 되어야 했다.

루나가 잠시 고민에 잠겨있자, 요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나."

요하나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며 갈망을 드러냈다.

"가르쳐줘."

"..."

"사도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

"아, 그래서 찾아온 게 나야?"

리실로테가 기가 차다는 듯 요하나를 향해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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