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4화 (394/446)

외전 - 대의 [3]

[26]

"..."

데런은 눈앞의 존재가 마왕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직감을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마왕에게서 흘러내리는 어둠은 끔찍하고 소름 끼쳤다.

허나 데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두려움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왜 날 살린 거지?"

애초에 어떻게 자기 목숨이 붙어 있나 데런은 의문이었다.

허리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린 치명상을 입었기에 정상급 성물 정도의 물건이 없다면 살아남는 게 불가능했었다.

데런은 지금 자기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아있는 게 맞는 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마왕까지 눈앞에 있으니, 어쩌면 악신의 권능 따위로 목숨을 붙여놓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들었다.

허나 데런의 걱정과는 다르게, 데런의 부상은 문제 없이 처치된 게 맞았다.

치명상의 회복에 필요한 정상급 성물을, 안소니우스가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소니우스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성물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성물의 신성력이 근본적으로 악신의 축복과 반발하는 성질을 지녔기에, 자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어 소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덕분에 데런은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

"..."

안소니우스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데런을 내려보았다.

현 제국에 있어 요하나의 죽음은 치명적인 손실이었고, 그렇기에 안소니우스는 스페라에게 요하나가 죽는 일을 막기 위해 이곳까지 움직였다.

본래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안소니우스가 굳이 데런까지 살린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네가 제국에 전해야 할 것이 있다."

"..."

데런이 멍하니 안소니우스를 바라보았다.

제국에 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데런은 그 의미를 유추해보다가 이내 조소를 터뜨렸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알아봐."

데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족스러웠다. 아니...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후련하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고통을 벗어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헌데 다시 눈을 떴고, 심지어 남부를 파멸시킨 마왕이 자기 앞에 서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마왕이 제국에 전해야 할 게 있다고 지껄이고 있었다.

데런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모르던 더럽고 끔찍한 사정들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데런은 진실 따위를 원하지 않았다. 너무 지쳤기에, 이제는 그만 가슴에 떠안은 번민을 내려두고 전부 다 그만두고 싶었다.

"이제... 질렸어."

더는 의지라는 게 가슴에 남아있지 않았다.

데런이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로 안소니우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형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는데..."

레이를 동경하고 레이와 같은 삶을 꿈꿨다.

허나 데런이 좇던 이상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 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평생을 좇던 이상이 결국 멋대로 착각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데런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많이 힘들었다.

"형님이... 원망스러워."

마왕의 앞에서.

데런은 처음으로 가슴 속 진심을, 가까운 이들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 한 속내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다 버리고 떠날 거였으면... 형님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이건 너무... 허망하잖아."

"..."

안소니우스가 데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육신은 죽음을 벗어났으나, 데런은 심적으로 고갈되어 있었다.

사람이 검을 쥐는 동기는 대개 복합적이다.

개인적인 욕망이나 신념 등 여러 갈망이 맞물려 사람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허나 드물게나마, 단 하나의 갈망만을 맹목적으로 우선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레이는 벨라라는 단 한 명의 존재를 위해 검을 들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최초의 맹세를 우선했다.

안소니우스는 오직 누이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고, 그렇기에 누이의 안식과 함께 어둠을 끌어안았다.

그런 면에서 데런은,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과 대의가 있어야만 검을 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부류였다.

그 신념, 혹은 이상이라 불러야 될 게 무너진 순간.

데런은 제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그리고 더는 정신적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깎여나가기만 했다.

"..."

이지스에서 만났던 데런의 눈동자는, 안소니우스의 기억에도 뚜렷하게 남아있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허나 오늘 만난 데런의 눈동자는, 그 반짝였던 총기가 전부 침전하고 비관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다시 검을 든다고 하더라도 그 눈동자의 빛깔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데런에게 필요한 것은 믿고 따를 수 있는 우상과 신념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인간을 현혹하는 신념은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그럴듯하게 치장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신념을 치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특히 종교인이나 정치인에게 있어 그건 필수적인 소양과 같았다.

그래서 안소니우스는 입을 열었다.

"우습구나."

"...?"

"너는 범인의 시야로 그의 삶이 가치 없다 폄하하는군."

끄드득!!

안소니우스가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뜯어냈다.

검은 물이 흐르며 뜯어져 나간 투구 너머로... 악신의 축복에 잠식되어 가는 안소니우스의 얼굴이 비쳤다.

"건방 떨지 마라, 데런."

"...!!!"

데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비록 악신의 축복에 의해 일그러져가고 있었으나 데런은 안소니우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안소니우스에 관한 여러 소문이 대륙을 떠돌았지만, 데런은 마왕의 정체가 정녕 안소니우스일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경악을 내비치는 데런을 향해 안소니우스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레이와 내가 처음 조우한 날."

"...?"

"그는 이미 나의 비극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나의 비극을 외면하고 나의 구원을 체념했다."

그건 안소니우스의 추측이었지만,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안소니우스와 조우하기 전부터, 레이는 안소니우스의 비극을 인지하고 있었다.

안소니우스가 지키고자 했던 누이의 불행한 운명을 알고 있었고, 본래의 역사에서 안소니우스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알고 있었다.

허나 이 세상에 환생한 이후.

레이는 단 한 번도 안소니우스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보지 않았다.

레이는 그 무엇도 시도하지 않고서, '안소니우스를 구원하지 못 했다'고 단정내렸다.

왜냐하면...

안소니우스와 그의 누이를 구원하는 게, 레이의 역량을 까마득히 벗어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유지하는 시스템의 근간에 성녀의 희생은 필수불가결했다.

세상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아무 대안 없이 부정하고 무너뜨릴 만큼, 레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레이는 성녀를 구원할 수 없었다.

성녀라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의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그게 레이라는 인물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역량의 한계였다.

레이의 재능과 레이의 지식으로는, 안소니우스를 구원할 수 없었다.

레이는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았기에 언제나 자신의 재능이 모자람을 아쉬워했다.

그 한탄은 결코 유치한 기만 따위가 아니었다.

재능이 부족했던 레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시스템' 내에서 나의 사람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었고, 고작 그것만으로도 레이는 사력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순응하고 만족하려 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안소니우스를 기만했으며, 성녀의 운명을 외면했다.

레이는...

"나의 누이가 겪어야만 했던, 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유린과 희생을 수긍하려 했단 말이다...!"

"...!"

꾸득!

데런의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안소니우스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 직후, 안소니우스로부터 흘러나온 어둠이 데런을 감쌌다.

안소니우스가 발한 어둠은 본래 환영을 투영하여 적을 혼란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안소니우스는 그 기술로, '그날' 자신이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좌절을 데런에게 보여주었다.

성녀와 대면한 후 사령검을 손에 쥘 때까지의 그 처절한 기억을, 데런에게 투영했다.

"...!! 끅...!! 끄윽...!!"

환영이 눈 앞을 가렸을 때.

데런은 차마 호흡을 내쉬지 못 했다.

환영에서부터 전해지는 좌절과 죄책과 악의가 목을 옥죄어 오는 것만 같아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안소니우스의 그 마지막 선언이 데런의 가슴을 짓이길 것처럼 짓눌렀다.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에 데런이 자기 목을 움켜쥔 순간.

콰당탕!!

안소니우스가 데런을 지면 위로 집어 던지며 두 눈을 붉게 빛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타협과 안주를 택하지 않았다."

환생한 이후 휘둘리기만 했던 삶 속에서.

레이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스스로 선택한 것.

"이 역겨운 굴레를 끊어내는 것."

신체제를 위한 혁명에는 항상 구체제의 반발이 따랐다.

그와 동시에 신체제의 확립까지는 언제나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단지 승리하였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가려져 있을 뿐... 역사적으로 아무리 뚜렷하고 정의로운 명분을 지닌 성공한 혁명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항상 무고한 이들의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더군다나, 레이가 택한 것은 단순한 체제의 변화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시스템을 향한 혁명이었다.

세상의 근간을 뒤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게 600년 전 하르시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르시아가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두려워했기에 걷지 못 한 길을... 그 녀석이 선택한 거다."

모순되게도.

이 대지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레이는 하르시아보다 더 먼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레이의 죽음과 선택이 허망하다고 지껄였느냐? 함부로 폄하하지 마라. 그의 죽음은 신화의 종결이 아닌 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콰악!

안소니우스가 직접 손을 뻗어 데런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데런은 안소니우스의 눈동자에서, 조금 전까지는 인지하지 못 했던 강렬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증오와 악의가 뒤섞여 비명을 질러대는 그 처절한 살의가, 안소니우스의 두 눈동자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살의는 하늘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데런, 기억해라."

"..."

"그의 죽음이...! 그의 선택이...! 내 누이의 고통과 함께 영속되었을 그 역겨운 굴레를 끊어내고...! 대륙의 필멸자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안소니우스가, 레이가 마지막 만남에서 자조적으로 입에 담았던 단어를 데런의 앞에서 반복했다.

"Great Reset."

레이는 벨라의 소망을 지켜주고자 했다.

안소니우스는 누이의 비극을 복수하고자 했다.

리실로테는 하르시아를 잃게 한 엘-람의 승리를 짓밟으려 했다.

비록 이 사태를 주도한 이들의 갈망과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선택이 세상에 가져올 결과는, 혁명이자 대변혁이었으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나의 시대를 허물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눈앞의 비극에 연연하지 마라. 이 혼란이 종식되었을 때, 우리는 마침내 무력하게 유린당한 과거와 단절할 것이다."

안소니우스가 데런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단언했다.

"그게 네 우둔함이 보지 못 한 '대의'이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종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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