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3화 (393/446)

외전 - 대의 [2]

[25]

툭툭, 성검이 사령검을 도발하듯 두드렸다.

어두운 광휘와 칠흑 같은 어둠이 잠시 뒤섞였다가 반발을 일으켰다.

스페라가 안소니우스를 향해 조소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저지하겠다고? 할 수 있겠어?"

스페라는 힘에 취한듯 오만하게 물었다.

허나 스페라가 안소니우스의 전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소니우스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초월적인 존재들과의 계약을 이끌어낸 유례없는 악신들의 챔피언이었다.

안소니우스는 대륙 역사의 그 어떤 존재보다 마왕이란 수식에 부합하는 존재였다.

스페라의 황금빛 눈동자는 안소니우스에게 내재된 그 끔찍하게 뒤엉킨 악의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어두운 광휘에 미치지는 못 했으나, 안소니우스의 정제되지 않은 악의는 현시점의 스페라에게도 유의미한 위협을 가할 수준이었다.

전력을 다해 충돌한다면 스페라가 일방적으로 안소니우스를 압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스페라는 안소니우스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날, 날 베어내지도 못 했으면서... 이제 와서?"

교황청 붕괴 직후.

스페라가 폐허가 된 교황청에서 성검을 처음 손에 쥐었던 바로 그날.

안소니우스는 끔찍한 증오를 드러내며 스페라를 죽이려 했다.

그날의 서늘함은 여전히 스페라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안소니우스가 휘두른 사령검은 분명 스페라의 목에 닿았었다. 하지만 안소니우스는 스페라를 베어내지 '못' 했다.

유례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악신들의 사도인 안소니우스는 악신들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능동적인 행동이 강력하게 억제되었다.

안소니우스가 악신들의 의지에 반해 행하려는 사안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억제력 또한 증대했다.

그래서 안소니우스는 스페라를 베어내지 못 했다.

스페라가 남부에서 성검을 처음 손에 쥔 바로 그 시점에서 이미...

엘-람과 악신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대륙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지닌 루나를 죽이기 위해.

엘-람과 악신들은 스페라에게 어두운 광휘를 쥐여주었다.

어두운 광휘를 손에 쥔 스페라는, 우습게도 현재 대륙에서 기적의 상징과 같았다.

그리고 그 기적은, 철저하게 별빛 너머의 초월자들에 의해 설계된 기적이었다.

스페라가 주도했던 남부에서의 대규모 탈출 때 악신들은 마족들의 움직임을 고의로 억제해 탈출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 이후에도 악신들은, 스페라가 남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쪼개진 세력을 단합시켜 자기 기반을 완성할 때까지 충분한 유예를 부여해주었다.

성국이 대전쟁 초기에 제국에 비해 한참 열약한 전력으로도 악신의 추종자들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악신들의 안배 덕분이었다.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성국의 탄생은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그 어떤 이익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국은 제국 중심의 통합을 분열시켰고, 장기적으로는 대륙에 치명적이고 사라지지 않을 균열을 야기할 중추였다.

루나는 성국을 종양이라 평했다. 방치할수록 살점을 갉아먹으나, 함부로 잘라내기엔 너무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종양.

루나의 평가는 성국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스페라는 루나의 존재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조소했다.

"웃기지 않아? 고작 인간 하나가 두려워서, 이렇게까지 발작하다니."

Dimension Alignment.

괴리되어있던 서로 다른 차원들이 일렬로 정렬되는 시기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엘-람이든 악신들이든, 이 현실 차원에 영향력을 발휘해 이렇게까지 상황을 세심하게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허나 루나의 존재가 그들의 야합을 이끌었고, 별빛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서로의 견제 수위를 약화시키고 현실에 개입하기 위한 출혈을 감수하게까지 만들었다.

인간 하나를 죽이기 위해 그들 모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모순되게도.

현재 악신들이 뜻을 이루는데 가장 방해되는 걸림돌이 그들의 챔피언인 안소니우스였다.

안소니우스는 악신들의 축복을 받아들이고도 그 힘에 정신이 잠식되는 것에 저항했다.

본래라면 필멸자의 저항 따위 무의미해야 했다. 순순히 따랐으면 모르되 안소니우스처럼 감히 저항을 시도했다가는, 금세 본래의 자아는 껍데기만 남은 채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다.

허나 그런 측면에서도 안소니우스는 유례가 없었다. 안소니우스는 여전히 잠식에 저항하며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소니우스는 악신의 추종자들의 공세를 자의로 억제시키거나, 심지어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고위 마족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전적까지 있었다.

물론... 안소니우스의 그 저항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었다.

안소니우스가 완전히 잠식되는 날.

대륙의 균형추는 급히 기울게 될 것이다.

스페라는 그 일련의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거슬리게 하지 말고 비켜."

어차피 안소니우스는 스페라를 방해하지 못 한다.

스페라가 그리 단정하며 데런을 향해 어두운 광휘를 피워올린 순간.

안소니우스의 사령검에서 끈적이는 어둠이 쏟아졌다.

끼기긱!!!

"...하늘 너머의 잡것들이."

"..."

"사춘기 계집애에게 과분한 장난감을 쥐여주었구나."

"...해보자는 거야? 정말로?"

스페라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안소니우스가 투구 너머의 두 눈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초월적인 존재가 내린 막대한 권능들이 집약되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스페라가 안소니우스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허세부리기는."

안소니우스는 자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스페라를 저지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고, 설령 초월적인 존재들의 억제력을 이겨내고 스페라를 저지한다 해도 그렇게까지 심력을 소모하면 더는 자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안소니우스의 위협은 블러핑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페라 또한 여기서 자기 힘과 정체를 노출하지 않고 은밀히 성국에 귀환해야 했다.

여기서 만약에라도 안소니우스와 충돌하면 그 계획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

스페라 입장에선 요하나의 목숨을 끊기 위해 그렇게까지 과한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요하나와 쥬세핀이 살아나가서 스페라가 타락했다고 떠든들 대체 누가 그 헛소리를 믿겠는가. 요하나의 증언은 저열한 여론 공세하고 무시당할 것이다.

성국이 개국된 이후 대륙의 밑바닥 여론은 언제나 제국보다 성국에 우호적이었다.

엘-람의 선택을 받아 기적을 이룬 성녀가 성국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좋아, 오늘은 내가 양보해줄게."

스페라가 성검을 거두었다.

"다음에 봐."

두 번째 개안을 이룬 눈으로 안소니우스를 훑어본 스페라가 뒷말을 덧붙였다.

"볼 수 있다면 말이야."

안소니우스의 정신력은 분명 상리를 벗어나 있었다.

허나 결국 안소니우스도 인간이었다.

스페라는 오늘의 만남이 안소니우스와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

"허억... 허억..."

쥬세핀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반쯤 무너져내린 통로를 달렸다.

얼마 달리지 않아 통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구간이 나왔다.

틈새를 억지로 비집어 열고 막힌 구간을 지나친 쥬세핀은 오르막길을 달리다 다시 한 번 막혀버린 구간을 만났다.

쥬세핀은 천장에 마나를 흘려보내 대충 천장의 두께를 확인한 뒤, 천장을 무너뜨려 뚫어버릴 준비를 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장비한 아티펙트 수준이 워낙 좋아서, 수십 미터 깊이의 지하만 아니라면 천장을 뚫고 탈출이 가능했다.

콰아아아앙!!!!!

아티펙트의 화력을 동원하자 천장은 금세 녹아내리며 무너졌다.

쥬세핀은 검기를 발현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암석을 절단하며, 방어 아티펙트를 가동시켜 요하나를 보호하며 구멍을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서 화력을 쏟아낸 탓에 강렬한 열기가 살갗을 데웠으나 지금 거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검기로 암석을 갈라내고 그 틈새로 아티펙트의 화력을 집중시키기를 반복해 지상까지 구멍을 뚫어내는 데 성공한 쥬세핀이, 요하나를 들쳐업고 마침내 지상으로 손을 뻗었다.

"허읍...! 허억...!"

간신히 지상으로 빠져나온 쥬세핀이 뜨겁게 익은 호흡을 토했다.

운이 좋게도, 인근을 순찰하던 제국병이 굉음을 듣고 스페라와 요하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쥬세핀이 요하나를 다시 들쳐업으며 소리쳤다.

"병력 집결시켜...!!"

"...!"

제국병이 눈치 빠르게 통신기를 쥬세핀에게 건넸다.

쥬세핀은 이를 악문 채 통신기를 낚아챘다.

지하에서도 통신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좋았으련만, 악신의 축복에 침식된데다 암석으로 뒤덮인 지하여서 그런지 통신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본래도 통신이 힘든 환경이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스페라가 통신이 불가하도록 더욱 확실하게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쥬세핀은 통신기로 병력을 집결시키라고 전달한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했다.

스페라는 자신의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지켜보는 시선이 많아서, 함부로 힘과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환경으로 움직여야 했다.

쥬세핀은 나름대로 최선의 판단을 내리며 움직였다.

그 사이 요하나는, 쥬세핀의 등에 업힌 채 차오르는 고통을 씹어삼켜야 했다.

쥬세핀의 귓가에 요하나의 억눌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

짙은 증오와 죄책이 요하나의 비명에서 묻어나왔다.

스페라를 향한 증오. 데런을 향한 죄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하나를 괴롭게 하는 건 참담함에 가까운 회의감이었다.

"으아아아...!!!"

가변형 코어로는 부족했다.

초월적인 존재가 내린 권능의 특수성 앞에서, 요하나는 무력했다.

요하나가 이룬 것이 서커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스페라의 힐난을 요하나는 끝내 부정하지 못 했다.

하르시아.

에른스트 프리슬란.

그 외에도 역사 속에서 대륙을 호령했던 극소수의 강자들이 어찌하여 필멸자의 역량을 넘어선 극의를 갈망했는지...

요하나는 이제야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가 사용했던 공간검이... 에른스트가 완성시킨 두 번째 개안이... 대체 얼마나 거대한 가치를 지닌 신기였으며, 그 둘의 공멸이 대륙에 있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었는지 이제야 가슴에 와 닿게 깨달을 수 있었다.

가변형 코어만으로는 안 된다.

힘의 크기가 아닌 힘의 특수성이 필요했다.

별빛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가 직접 내린 권능에도 대항할 수 있는, 특수성이.

피로 물든 손아귀를 말아쥔 요하나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

"..."

이상한 일이었다.

나의 시야는 영원히 어둠 속에 잠겼어야만 했는데.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색이 입혀진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각에 이어 얼마 안 가 통각이 느껴졌다. 작열하는 고통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데런은 고통을 잊을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까운 곳에서 느꼈다.

데런이 한참 동안 힘겹게 노력하여 두 눈의 초점을 맞춘 후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데런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남부를 파멸시킨 마왕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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