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2화 (392/446)

외전 - 대의 [1]

[24]

스페라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스페라와 마주한 이들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두운 광휘는 최소한 로드급은 되어야 간신히 대응 가능한 수준의 재해였다.

요하나가 이룬 신기인 가변형 코어로도 전투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누님!!!"

데런이 쓰러진 요하나의 상태를 다급하게 확인했다.

요하나는 데런의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성검을 받아낸 충격이 컸는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거렸다.

성직자가 다급하게 신성력을 발해 요하나의 회복을 도왔다.

같은 순간, 방패를 잃은 템플러의 허리가 성검에 의해 양단되었다.

플리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즉각 서클을 한계까지 활성화시켰다.

그들도 일단 제국에서 선별된 정예인 만큼, 난적을 조우했을 때를 대비한 대응 수단이 준비되어 있기는 했다.

콰앙!!!

화염 마법이 가장 먼저 스페라에게 떨어져 내려 스페라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 직후 허공에 떠오른 아티펙트 다섯 개가 가속하더니 스페라를 중심으로 공전하기 시작했다.

트득-!

"...?"

화염 속에 갇히고도 사태를 관망하다시피 했던 스페라가 몸을 가볍게 휘청였다.

요하나를 상대로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스페라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트드득!

스페라의 신체를 보호하던 금속 재질의 장비들이 멋대로 스페라를 끌어당기거나 조여댔다.

마법사들이 아티펙트를 사용해 생성한 강력한 자기장이 그런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이한 능력을 지닌 마족을 상대할 때, 마나를 기반으로 한 직접 타격보다 도리어 지금처럼 물리 현상을 유도하여 가하는 간접 타격이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학습한 제국이 개발한 새로운 아티펙트와 전술이 스페라에게는 나름 새로웠다.

쐐액!!

기사들은 자기장이 효과를 발휘하는 즉시 창 형태의 아티펙트를 쏘아냈다.

창 형태의 아티펙트는 자기장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외부 장갑이 분리되며 마나를 머금은 금속 탄자를 쏟아냈다.

강력한 자기장 속에서 가속된 금속탄자가 무차별적으로 공간을 헤집었다.

이 일련의 전술에서 활용되는 아티펙트들은 제작 비용에 비해 화력이 낮고 일회용이라 굉장히 비효율적이었지만, 괴이한 능력을 쓰는 마족들을 당황시키고 엿을 먹이기엔 꽤 용이했다.

허나 그것도 수준이 어느 정도 비슷할 때의 이야기였다.

콰앙!!!!!

스페라는 제국의 신무기에 잠깐 흥미를 보이고는 성검을 한 번 휘둘렀다.

어두운 광휘에 삼켜진 모든 종류의 힘들이 일방적으로 바스러졌다.

제국의 조사대는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모두가 죽음을 직감했고, 그 어떤 발악도 무의미함을 머리로는 깨달았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발악해야 한다는 건, 실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콰득!!

스페라의 앞을 막아선 템플러의 머리가 터져나감과 동시에 스페라에게 걷어차인 기사의 허리가 육편이 되어 쏟아졌다.

중요한 임무에 투입된 만큼 조사대원들에게 지급된 장비의 수준이 굉장히 뛰어났으나, 그 값비싼 장비들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스페라가 다시 걸었다.

스페라는 분명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여유를 부렸다.

그 덕분에 요하나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검을 제대로 쥘 수 있었다.

"커읍...!"

요하나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뱉어냈다.

가볍게 휘둘러진 공격을 막아냈을 뿐인데 육신에 가해진 타격이 너무 컸다.

"..."

...이건 이길 수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만큼, 그냥 막막했다.

일반적인 로드 급도 검강을 풀처럼 썰어대지는 못 한다.

아무리 대단한 강자라도 그래듀에이트가 피워 올린 검강의 위력을 경시하지는 못 한다.

그게 요하나가 알고 있는 변치 않는 상식이었는데, 그 상식이 지금 면전에서 깨져나갔다.

"..."

요하나는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붕 뜬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억지로 검을 쥐고 있었지만, 요하나는 더 이상 제대로 된 투지를 품을 수가 없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꺾이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해야 해.'

요하나는 일어섰다.

제국의 조사대 중 스페라의 시선이라도 끌 수 있는 전력이 되는 건 요하나가 유일했다.

지금 여기서 요하나가 포기하고 무너지면 전멸이었다.

조사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스페라를 막아 세우지 못 하면 대륙은 어떤 형태로든 스페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하나는 자신의 죽음보다, 자신의 죽음 뒤에 따라올 그 끔찍한 결과가 두려웠다.

요하나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지켜내기 위해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자신의 삶보다 우선했던 그 소중한 소망을 되새기며, 요하나가 다시 한 번 투지를 머금었다.

"케이스 오픈."

요하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허공이 일그러지며 은색 케이스가 아공간을 비집고 나왔다.

낱낱이 분해되는 케이스에서 쏟아지는 무구들 속에서.

요하나가 스페라를 노려보았다.

스페라가 요하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스페라는 어두운 광휘를 이미 과거에 손에 넣었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요하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성검을 쥐었던 그 순간 스페라는 자신의 역할을 수락함과 함께 그 힘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페라가 어두운 광휘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된 시점은 이곳에서 유물을 얻고 나서였다.

아직은 그 힘을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을 터다.

지금 이 순간이, 스페라가 어두운 광휘를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뿌드득!

요하나는 절망적인 전력 차를 외면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스페라에게 깃든 어두운 광휘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파멸적인 위력을 발하는지 요하나가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여전히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몸에 지닌 모든 무구를 일회용으로 취급해야 했다. 다행히 요하나에게 무구는 많았다.

콰앙!!!

투지를 잃어버리고 제자리서 주춤거리고 있던 조사대원들을 넘어.

요하나가 스페라를 향해 가속했다.

스페라가 피식 웃더니, 그제야 두 손으로 성검을 쥐었다.

쫘아아악!!!

스페라가 두 손으로 휘두른 검의 궤적은 기교 면에서도 이미 완벽에 가까웠다.

설령 요하나라 해도 스페라의 일격을 지근거리에서 맞받아치지 않고 회피할 수는 없었다.

카가가각!!

능동 방어 기능을 갖춘 요하나의 견갑이 스스로 움직여 성검을 막아섰다가 부스러기가 되었다.

요하나는 최상급 아티펙트의 부스러기를 뒤집어쓰며 눈을 충혈시켰다.

횡으로 휘둘러졌던 성검은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요하나의 허리 아래에서 다가왔다.

빠득!

요하나의 왼손에 쥐여있는 검이 성검을 막아내려다 박살났다.

검이 박살나며 만들어낸 약간의 틈새를 활용해 요하나가 재차 공격을 피해냈다.

스페라가 검을 다시 돌려 잡자, 후방에서 쏘아진 자색 창이 스페라의 팔꿈치를 타격했다.

자색 창은 어두운 광휘와 맞닿아 쩍쩍 갈라져 나가면서도 스페라의 자세를 미약하게 뒤틀었다.

그 틈에 요하나는 허공에 떠오른 새로운 검을 왼 손으로 낚아채며 몸을 회전시켰다.

두 갈래의 궤적이 스페라의 심장과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스페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다, 움직임을 멈췄다.

검붉은 구 형태의 아티펙트가 스페라의 등 뒤로 낙하하고 있었다.

검붉은 구 형태의 아티펙트는 지면과 맞닿기 전 굉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폭발로부터 발생한 압력이 스페라를 덮쳤다.

평범한 기사라면 중심을 잃고 나뒹굴어야 했으나, 스페라는 도리어 후방의 압력을 이용해 뒤틀린 자세를 복구시키며 성검을 가속시켰다.

요하나의 허리를 감싼 능동형 방어 아티펙트가 성검의 가속을 지연시키기 위해 전개되었다가 단번에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요하나가 횡으로 휘두르던 모로스를 잡아당기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워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켰다.

검술이라 칭하기도 우스운 변칙적인 공격에 스페라는 처음으로 판단이 늦었다.

사악!

모로스의 칼날이 스페라의 팔목을 얕게 긁고 지나갔다.

작은 생채기.

최상급 아티펙트를 그토록 소모해가며 얻어낸 대가였다.

"흡...!"

요하나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두통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

각기 다른 성능을 지닌 다수의 아티펙트를 동시에 활용하려다 보니 머릿속이 꽝꽝 울리며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두 눈을 더욱 붉게 충혈시키며 감각을 증폭시켰다.

약간의 판단 착오나 계산 실수, 혹은 변수의 출현이 곧장 죽음으로 이어진다.

요하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부서져라 악물었으나, 의지만으로 신체에 걸리는 부하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실수를 범하기 전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

꾸드득!

요하나의 심장에 자리한 가변형 코어가 일렁였다.

요하나는 더는 이 전투에서 자신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았다.

요하나의 모든 사고가 오직 스페라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집중되었다.

'아직 어설퍼.'

스페라는 아직 육신에 품은 어두운 광휘를 완전히 제어해내지 못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그저 농락일지도 몰랐지만, 스페라의 움직임이 과거처럼 정제되지 못 하고 불균형한 것만은 분명했다.

'파고들자.'

요하나가 결정을 내렸다.

물론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는 스페라에게 생채기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특수한 기능을 가진 아티펙트를 활용해 스페라를 혼란시키는 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두 번째 개안을 이룬 스페라에게 그런 장난질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 한다.

결국 요하나가 기대야 할 것은, 자신의 육신 하나였다.

끄득!

코어에서 뜨겁게 달궈진 마나가 관절 사이에 응축됐다.

폭발력을 억지로 증대시켜 들끓어대는 마나를 관절 사이에서 폭발시켰다가는 얼마 못 가 사지가 뜯겨나가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요하나가 호흡을 멈추었다.

굉음이 모두의 귓가를 때렸다.

!!!!!!!!

오버드라이브를 활용한 1차 가속.

액셀을 활용한 2차 가속.

아티펙트의 추력을 활용한 3차 가속.

요하나의 육신은 한순간 섬광이 되었다.

스페라의 움직임이 잠시잠깐 굳었다.

"...!"

두 번째 개안까지 이룬 스페라의 동체시력이 요하나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 했다.

요하나의 움직임을 놓친 스페라는 요하나 또한 자기 속도를 이겨내지 못 할 것이라 단정했으나, 그건 스페라의 오만이었다.

과분한 힘을 얻은 스페라와는 다르다.

요하나에게 깃든 모든 힘은 수많은 혈전을 치르며 요하나가 직접 쌓아올린 것이었다.

촤아악!!!!

섬광이 된 요하나가 그려낸 검의 궤적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낙뢰처럼 스페라에게 떨어졌다.

스페라가 뒤로 물러났다.

스페라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건 결코 요하나를 농락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러서는 것 말고는 떨어져 내리는 낙뢰를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스페라에게는 없었다.

요하나는 뒤로 물러나는 스페라를 삽시간에 따라잡아 낙뢰를 끊임없이 떨어뜨렸다.

섬광과 함께, 부서져가는 요하나의 육신에서 터져 나오는 혈흔이 서로의 시야를 붉게 적셨다.

악의와 맞서기 위한 요하나의 적빛 헌신은 스페라에게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워프게이트 앞에서.

온몸이 바스러져 가면서도 에리다누스를 막아 세우기 위해 검을 들었던 레이의 그 뒷모습이, 요하나에게서 잠깐 겹쳐 보였다.

"..."

그날 스페라는 동경을 품었었다.

그날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그날의 기억을 스페라는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을... 그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아련함이, 배신감이, 그리움이, 복수심이, 회한이, 원망이, 후회가, 분노가 머릿속을 뒤죽박죽 헤집어 엉망으로 만들었다.

스페라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다.

그의 멱살을 붙잡고 많은 것을 쏟아내고 싶었다.

허나 그는 이미 멋대로 죽어버렸기에.

그 갈 곳을 잃은 기억과 감정들이...

스페라는 이제 증오스러웠다.

"...멋지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스페라가 요하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멋졌다. 한때 동경했던 이의 자취를 떠오르게 할 만큼 멋졌다. 멋졌지만.

요하나가 이룬 것은 결국 영웅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페라에게 주어진 것은, 600년 전 하르시아를 제거하기 위해 초월자들이 힘을 합쳐 창조해낸 궁극 그 자체였다.

최후의 드래곤인 프레체스가 모방했던 그 어설픈 힘보다도, 훨씬 순수하고 강렬했다.

"너는 못 이겨."

그리 중얼거리는 스페라의 품을, 요하나가 파고들었다.

요하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반격당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검푸른 검강에 휩싸인 모로스를 스페라의 심장을 향해 찔러넣었다.

콰악!!!!!!!

모로스가 스페라의 가슴을 파고든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평해도 반박 못 할 일격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느렸다.

어두운 광휘와 맞닿은 검푸른 검강은 삽시간에 속도가 줄더니 쉽사리 힘을 쓰지 못 하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대체 어째서...?

힘이 모자랐나? 아니, 이건 힘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두운 광휘. 엘-람과 악신이 손을 잡고 융합시킨 그 멸망의 권능이, 인간이 빚어낸 마나의 덩어리를 침식하여 붕괴시키고 있었다.

요하나가 아무리 검강에 마나를 불어넣어도 어두운 광휘가 검강에 깃든 절삭력을 무너뜨렸다.

흡사 인간의 초라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어두운 광휘는 사력을 다해 빚어낸 요하나의 섬광을 짐어삼켰다.

모로스는 여전히 스페라의 가죽을 힘겹게 파고들고 있었다.

이 속도로 스페라의 심장을 꿰뚫으려면 십여 분은 걸릴 것이다.

"..."

요하나의 너덜거리는 팔에서 피가 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잠깐의 침묵 후.

스페라가 요하나의 허리를 걷어찼다.

뻐어억!!!!!!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방어 아티펙트가 요하나의 허리가 양단되는 것을 막았다.

"누님!!"

방해만 될 것이 뻔해 차마 전투에 개입할 수 없었던 데런이 공중에서 요하나를 붙잡았다.

자신의 몸으로 착지의 충격을 받아낸 데런이 지면을 미끄러지며 소리쳤다.

"쥬세핀!!! 요하나 챙겨!!!"

쥬세핀이 반문 없이 데런에게서 요하나를 받아 들쳐업었다.

요하나는 아직 의식이 조금 남아있었으나 더는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쥬세핀은 곧장 몸을 돌려 도망가기 위해 땅을 박찼다.

스페라가 쥬세핀의 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성검을 들어 올리자, 데런이 재차 소리쳤다.

"붙잡아!!!"

붙잡아. 그게 데런의 명령이었다.

엑스퍼트 급 기사인 마일스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스페라를 향해 달려들었고, 마법사들은 마법 술식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초라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스페라가 마일스의 목을 베어낸 순간,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했다.

헌데.

마법사들이 발현해낸 불덩이는 스페라를 향하지 않았다.

콰아앙!!!!!

불덩이가 벽면에 착탄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 공간에 처음 진입했을 때, 제국의 조사대는 혹시라도 함정이 없나 공간의 구조를 빈틈없이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구조를 파악해두었으니, 어디에 화력을 집중시켜야 이 공간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데런의 '붙잡아'라는 명령은 이 공간을 통째로 주저앉히라는 신호였다.

쿠웅-!

천장에서 암석 파편이 쏟아진다.

마법사들은 스페라가 접근하든 말든 벽면에 화력을 집중시켰고, 결국 벽면 일부가 주저앉으며 연쇄적인 붕괴를 일으켰다.

쿠구구궁!!

누군가는 이곳에서 살아나가야 했다.

살아나가서 스페라의 위험성을 알리고 스페라를 막아내야 했다.

그렇기에 남은 자들이 희생했다. 그들은 하다못해 자신의 죽음이 가치있기를 바랐다.

"쥬세핀...!"

간신히 눈을 뜬 요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광장을 바라보며 쥬세핀을 멈춰 세우려 했다.

허나 쥬세핀은 무시하고 달렸다.

그꼴을 보며, 스페라가 귀찮다는 기색으로 머리 위에 떨어지는 거대한 암석을 쳐내며 쥬세핀을 쫓으려 했다.

헌데 걸음을 옮기는 스페라의 앞을, 데런이 막아섰다.

요하나가 미친 짓거리 하지 말라고 데런의 이름을 외쳤다.

"데런...!!!!"

뒤에서 들려오는 요하나의 목소리에 데런이 착잡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누님, 무사하세요."

쐑!!

앞을 막아선 데런을 향해 스페라가 성의 없이 성검을 찔러넣었다.

그 성의 없는 일격을 막아낼 힘이 데런에게는 없었다.

데런은 의미도 없는 방어는 포기한 채 배에 구멍이 뚫리는 걸 방치했다.

푸욱!!

성검이 내장을 짓이기며 파고든 순간.

데런은 도리어 앞으로 돌진했다.

"으아아아아!!!!!"

배가 갈라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데런은 코어의 마나를 쥐어짰다.

데런의 재능으로는 오버드라이브 같은 최상위 기술을 레이나 요하나처럼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데런은 그냥, 스페라에게 몸을 내던지며 되는 대로 체내의 마나를 폭발시켰다.

퍼억!!

근본 없는 몸통 박치기.

데런의 무의미한 발악에 스페라가 몇 걸음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 준 건 스페라의 변덕에 가까웠다. 요하나와 함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서, 데런의 마지막 발악에 잠깐 어울려주었다.

데런은 스페라와 부딪친 반동 탓에 뒤로 튕겨져나갔다.

찢어진 허리에서 피와 내장 조각이 비산했다.

데런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이미, 무너진 천장 탓에 쥬세핀이 요하나를 들쳐업고 도망간 출구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하아..."

데런은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조소를 머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 됐어."

방황하고.

번민하고.

떠나지도 못 하고.

마음을 다잡지도 못 한 채.

그렇게 죽지 못 한 삶을 억지로 이어가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 결말이면 충분하다고, 데런은 자조했다.

"..."

내가 꿈꿨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시야가 점점 더 어둡게 물든다.

데런은 자신이 다시 눈을 뜨지 못 할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전했다.

*

"..."

천장이 무너지고 길목이 막혔다.

허나 막힌 길 따위는 스페라가 손아귀를 몇 번 휘저으면 뚫어낼 수 있었다.

조사대원들의 마지막 발악은 무의미했다.

스페라는 도망간 쥬세핀을 쫓아가기 전, 데런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성검을 들어 올렸다.

툭!

"..."

휘둘러지던 성검을 사령검이 막아섰다.

스페라가 옆을 돌아보더니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려고 온 거야?"

"..."

"안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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