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91화 (391/446)

외전 - 혐오 [7]

[23]

"스페라 프리슬란!!!!"

비명처럼 내지른 요하나의 고함이 지하를 울렸다.

격양된 요하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페라는 조소를 머금었다.

성검을 둘러싼 어두운 광휘는 엘-람과 악신의 야합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본래 엘-람은, 상당한 출혈을 감수한다고 해도 성검의 독립된 시스템을 임의로 개변시킬 수는 없었다.

성검을 이루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영육이 그 독립된 시스템의 근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별빛 너머 초월자들의 야합이 이 세상에 저주스러운 기적을 발현시켰다.

이제 성검은, 스페라에게 어두운 광휘를 내려주는 핵심적인 매개이자 스페라의 육신을 유지시켜주는 중추였다.

그러나 성검의 지원만으로는 인간의 육신으로 어두운 광휘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스페라가 어두운 광휘와 진정으로 동화될 수 있게 할 마지막 조각이 지금 손에 들어왔다.

"..."

스페라는 약간의 감회를 느끼며 성검의 검신을 쓸어보았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 초월적인 힘을, 이제는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었다.

스페라가 어두운 광휘를 손아귀에 응집시켜보며 만족해하던 찰나.

몸을 가속시킨 요하나가 스페라의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검이 맞부딪치고, 요하나가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를 토해냈다.

"스페라...! 네가 감히 어떻게...!!"

요하나의 목소리가 충격과 참혹함으로 인해 잘게 떨렸다.

요하나는 오랫동안 스페라를 만나지 못 했다. 그렇기에 요하나의 기억 속 스페라 또한 여전히 고귀하고 강인하고 명예로우며 약간은 순진한 귀족 영애로 남아 있었다.

헌데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질책과 실망이 깃든 요하나의 목소리에, 스페라가 언짢은 기색으로 요하나의 손에 쥐인 모로스를 눈짓했다.

"요하나, 네게 그런 건방진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아."

그드드득!

요하나는 온 힘을 다해 스페라를 찍어누르려 했다.

하지만 스페라는 한 손으로 성검을 쥔 채 가볍게 요하나의 전력을 받아냈다.

자기 검이 밀려나는 걸 느낀 요하나가 스페라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정신 차려, 스페라...!! 이게...! 이게 네가 말한 명예야...?"

"하아, 요하나... 못 본 사이 왜 이렇게 멍청해졌어?"

스페라가 한숨을 쉬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최초에 성검을 손에 쥔 것은 스페라 자신의 선택이었다.

성검을 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음에도 스페라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성검을 쥐었다.

그건 결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이미 일그러진 건 돌이킬 수 없다고 했잖아."

이미 일그러지고 무너져내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꿈꿔왔던 찬란한 미래는 사라졌고, 대륙은 광휘로부터 버림받았다.

이미 너무나도 깊이 일그러진 세상은 결코 과거의 모습을 되찾지 못 할 것이다.

그저 종말이 찾아올 때까지... 더더욱 끔찍하게 변질되어만 갈 것이다.

그건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다.

"과거의 영광 따위는 빛을 잃은 지 오래야. 네가 감히 내 앞에서 명예의 가치를 운운할 만큼, 쓰레기가 되었지."

이 혐오스러운 세상 위에서.

이제 필멸자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짓밟힐 것이냐. 혹은 짓밟을 것이냐.

"그러니까 요하나... 나는 결코 짓밟히지만은 않을 거야. 의미를 잃은 과거의 영광에 목매다가 멍청하게 짓밟혀서, 그렇게 초라한 패자로 기록되지는 않을 거야."

그런 굴욕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스페라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며, 그게 스페라 프리슬란에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일그러지든, 나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볼 거야. 영광이란... 그런 거야. 승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신 데펜시오 변경백께서도 잘 알잖아?"

카드득!!!

성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어두운 광휘가, 요하나가 발현한 검강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하나..."

스페라는 너무나 쉽사리 요하나의 검을 찍어누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나도 화풀이는 해야지?"

"...!!"

콰앙!!!!

요하나가 발현한 검강이 부드러운 치즈처럼 으깨져 버렸다.

검강이 깨져나가며 일방적으로 밀려난 요하나가 이를 악문 채 균형을 다시 잡았다.

검강을 발현하고도 이렇게까지 압도된 경험이 요하나에겐 생소했다.

당혹감이 찾아왔으나, 그럼에도 요하나는 멍청하게 주춤거리는 일 없이 곧바로 스페라에게 대항하기 위해 움직였다.

으드득!

가변형 코어가 변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묵빛 검강이 모로스를 휘감았다.

오직 강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검강을 발현한 요하나가 다시 한 번 스페라를 향해 가속하며 검을 휘둘렀다.

섬뜩한 무게감이 실린 요하나의 일격을 앞에 두고, 스페라는 피식 웃었다.

"음... 재밌는 기술이기는한데..."

스페라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는 뺨이라도 때리는 것처럼 모로스의 검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터엉!!

당연히도.

검강을 두른 검을 손으로 후려치면 손이 증발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지만...

스페라의 손찌검은 도리어 묵빛 검강을 일방적으로 찌그러뜨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 하고 몸이 휙 돌아가는 요하나를 향해 스페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 서커스 할 때나 써먹을 법한 잔재주로 날 상대하려고?"

"...!!!"

"이 힘에 정면에서 대응 가능한 건... 그래, 공간검 정도야."

뻐억!!

스페라가 요하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검강이 깨진 탓에 이미 균형이 흐트러졌던 요하나가 정강이를 차인 후 공중에서 세차게 회전했다가 지면에 처박혔다.

스페라가 성검을 흔들거리며 조소를 이어갔다.

"아, 증조부님께서라면 그래도 대응할 수 있으셨겠지. 그래서 그렇게 계승에 집착하셨는데..."

절대권역으로 최소한의 힘의 균형을 맞추고 두 번째 개안으로 상대의 특수성을 억제한다.

이 두 가지 전제가 함께 기반이 될 때 순수한 역량의 투쟁을 강요할 수 있게 된다.

허나 요하나는 이 두 가지 전제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 하고 있었다.

"요하나, 너는 실수한 거야. 임시방편으로 초월자의 축복에 대응하려 하니까 그렇게 잔재주만 늘지. 그 잔재주가 평생 통할 줄 알았어?"

모욕적인 힐난이었다.

허나 요하나는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큽..."

요하나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샜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 한 아득함이 요하나를 찾아왔고, 그 아득함은 이내 공포가 되어 요하나를 옥죄었다.

요하나가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강도의 검강이 단숨에 박살났다. ...스페라의 손찌검에 의해서 말이다.

상식 밖의 사태를 마주하자 아무리 요하나라고 해도 판단이 느려졌다.

모든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가변형 코어를 창조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눈앞의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혼란과 공포가 요하나의 호흡을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허나 그럼에도.

요하나는 몸을 먼저 움직였다.

제자리서 발을 멈춘다는 게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걸 혈전을 겪으며 수없이 반복해서 학습했기에.

요하나는 반사적으로 몸부터 움직였고, 그 다음에 생각을 다시 시작했다.

'...검을 맞대면 안 돼.'

성검을 둘러싼 어두운 광휘의 파괴력은 절대적이었다.

어설프게 맞상대할 생각을 버리고 철저히 회피해야 했다.

비단 성검만 신경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어두운 광휘는 스페라의 주먹에도, 무릎에도, 어깨에도 집약될 수 있었다.

치명적인 가시가 스페라의 온몸을 둘러싼 채 너울거리고 있었다.

요하나는 그 전부를 회피해서 빈틈을 찾아 공략해야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실패하면 여기서 죽을 테니까.

촤악!!!

요하나가 몸을 일으키며 검기를 흩뿌렸다.

유도 검기가 사방으로 솟구치더니 스페라를 향해 순차적으로 방향을 꺾었다.

같은 순간, 요하나는 가변형 코어의 성질을 다시 한 번 변화시켰다.

'지금 필요한 건...'

속도와 변화.

츠즉!

황금빛 검강이 요하나의 검을 옭아맸다.

그와 동시에 요하나가 빛살처럼 스페라에게 뛰어들었다.

촤자작-!

요하나가 그려내는 검의 궤적이 삽시간에 수십 번 이상 꺾였다.

스페라가 눈가를 좁혔다.

스페라가 바라보는 시야 속에서, 요하나가 자아낸 두 갈래의 섬광이 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다 수십 갈래로 나뉘어졌다.

가변형 코어를 기반으로 한 요하나의 자유로움은 스페라조차 쉽사리 읽어내기 어려웠다.

요하나의 검은 분명, 한 갈래의 극한에 다가서 있었다.

스페라는 소름 돋도록 날카로운 예기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성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 순수한 검의 역량은 명백히 요하나가 스페라보다 우위였다.

허나 그 우위는 무가치했다.

으직!!!!!!

스페라가 힘을 개방했다.

사방을 뒤덮었던 유도 검기가 어두운 광휘에 맞닿자마자 무력하게 증발했다.

스페라는 그와 동시에 성검을 휘둘러 요하나가 그려내는 섬광의 궤적에 적당히 끼워넣었다.

서걱!!

요하나의 왼 손에 쥐여있던 검의 상단이 성검과 맞물리자마자 일방적으로 잘려나갔다.

성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주 정직하게 요하나의 어깨 위를 노리고 나아갔다.

"...!!"

요하나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요하나의 공격이 먼저 스페라에게 닿기는 했다.

하지만 요하나는 자신의 일격이 스페라에게 결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결국, 요하나는 스페라의 가슴으로 향하던 모로스를 끌어당겨 어깨 위로 다가온 성검을 막아냈다.

끄드득!!

제국의 신물답게, 모로스는 성검과 맞닿은 순간 검신을 감싼 검강이 단숨에 찌그러졌음에도 잘려나가지 않고 버텼다.

허나 모로스를 통해 전해진 충격은 요하나가 감수해야만 했다.

쩌엉!!!!!!!!!!

굉음과 함께 요하나가 지면을 굴렀다.

굴러가는 요하나의 몸이 위아래로 쾅쾅 튕길 때마다 지면이 찰흙처럼 뭉개졌다.

콰앙!! 쾅...!

지면을 부수며 굴러가던 요하나의 몸이 멈추었을 때.

요하나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저 정도 충격으로 죽었을 리는 없고, 잠깐 기절했으리라는 걸 스페라도 잘 알았다.

"흠."

스페라가 성검을 한 바퀴 돌려잡으며 요하나를 마무리 짓기 위해 움직였다.

스페라가 걸어가는 경로에는 템플러가 한 명 서 있었다.

템플러의 눈동자가 한없이 거칠게 떨렸다.

템플러는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구역질을 하려는 템플러를 향해, 스페라가 가볍게 살기를 드러냈다.

"...!"

살기를 느낀 템플러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템플러의 방패에는 신성력이 가득 깃들어 견고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력이 깃든 방패로 스페라를 막아서기에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퍼석!!

썪은 과일처럼 방패가 부서져 나갔다.

스페라를 감싼 어두운 광휘가 신성력을 그토록 가치 없게 만들었다.

스페라가 템플러의 허리를 양단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의 신이 너희를 버렸어."

물론, 아직은 그 사실이 밝혀지면 곤란했다.

성국은 대륙을 좀먹는 종양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대륙의 살점을 더욱 크게 좀먹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오늘 이 곳에서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무했다.

"그러니 경건하게 너희의 운명을 받아들이렴."

그분이 사도가 직접 너희의 운명을 영도하시니.

신앙이 진실된 자는 이 영예로운 은총에 감격하며 무릎 꿇을 지어다.

스페라가 그리 속삭이며 조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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