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혐오 [6]
[22]
스페라 프리슬란.
성국의 중추이자 제국 중심의 대륙 통합에 균열이 가게 한 원흉.
이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해도 스페라가 현 제국에 품은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분명 강한 증오나 그에 준하는 감정을 품고 있을 터다.
결국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현 제국과 스페라가 이끄는 성국은 장기적으로 양립 불가능했다.
"..."
요하나가 스페라에게 품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은 꽤 복잡했다.
때로는 증오가, 때로는 죄책감이 요하나의 마음을 사로잡고는 했다.
허나 그와 별개로 요하나는 스페라와 갈라설 수밖에 없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루나가 추가적인 언질을 하지 않았더라도, 요하나는 스페라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개인 전력은 요하나가 스페라에 비해 명백히 우위였다.
목숨을 도외시하며 혈전을 치러온 요하나의 기량은 만개하는 중이었고 장비 또한 최상급이었다.
물론 스페라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탁월한 검술의 기량은 물론이니와 성검이라는 최강의 성물을 보유하고 있었고 신성력 또한 사용할 수 있는듯 싶었다.
허나 요하나를 상대로는 성검과 신성력의 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일대일로 맞붙으면 분명 요하나가 스페라를 찍어누를 수 있었다.
"..."
스페라를 제거하려 한다면 조사대의 성직자들까지 배제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거기까지도 감수할 수는 있었으나... 요하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일단 스페라가 대체 어떤 경로로 이곳에 나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뒤에서 쫓아왔는지 다른 통로로 들어온 것인지... 대체 어디 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스페라가 이곳에 혼자 온 것인지,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은 있는지, 그 외에 다른 변수는 없는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만약 이곳에서 스페라를 제거한다고 해도 외부에 정보가 새면 골치 아팠다.
먼저 스페라를 공격해놓고 스페라를 제거하는데 실패까지 한다면 그 후폭풍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요하나가 먼저 움직이지 못 하고 가만히 스페라를 응시하고만 있자, 스페라가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여기는 왜 왔어?"
"글쎄?"
"...혼자 왔어?"
"궁금해?"
다시 침묵이 일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공기를 차갑게 굳혔다.
조사대의 대원들이 바짝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그때, 요하나가 한 발 물러서며 스페라에게 경고했다.
"유물은 우리가 회수할 거야. 욕심내지 마."
요하나의 경고에 스페라는 그저 싱긋 웃었다.
요하나는 스페라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기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조사대 내에 스페라에게 협조 중인 배신자라도 섞여 있나 의심됐지만, 지금 그런 것들을 먼저 조사하고 결론 내리기는 어려웠다.
요하나는 일단 배신자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스페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대놓고 손을 맞잡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조사대에 스페라까지 임시로 합류하자 마족들은 더는 수작을 부리지 못 했다.
현존하는 인류 중 한 손에 꼽히는 강자만 두 명이 모여 있는데 어설픈 수작이 통할 리가 없었다.
스페라의 임시 합류 이후 제국의 조사대는 수월하게 지하를 탐색하며 전진해 나갔다.
조사대원들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는 와중에도 스페라를 훔쳐보듯 눈을 흘깃거리고는 했다.
이 어두운 지하 속에서 스페라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광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스페라는 요하나와 몇 걸음 떨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다 입을 열었다.
"변했네."
"너도."
날을 세우고 있는 요하나에 비해, 스페라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스페라는 성검을 장난스레 한 바퀴 돌려 잡으며 요하나에게 물었다.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널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거든."
"..."
"이렇게 필사적인 이유가 뭐야? 너희의 그 새로운 황제 폐하가 그렇게 소중한가?"
이건 스페라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적어도 요하나는 자신의 생존이나 영달을 위해 필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요하나의 행적을 고려하면 그건 확실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투쟁을 이어가는가.
"누구를 위한 희생이야? 레이가 죽기 전에 너한테 부탁이라도 남겼어?"
"..."
잠시 발걸음을 멈춘 요하나가, 짧게 대꾸했다.
"...레이는, 돌아올 거야. 나는 기다릴 거야."
"...?"
스페라는 요하나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의문스러운 얼굴로 요하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스페라는 여전히 요하나가 진심으로 레이를 잊지 못 하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음... 실망인데."
스페라가 진심으로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요하나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헛된 희망을 잡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 미련한 아집이 요하나가 지닌 필사의 근원이라는 걸 알게 되자, 스페라는 정말로 요하나가 실망스러웠다.
"요하나, 이미 무너진 것은 되돌릴 수 없어. "
이미 무너진 것을 다시 쌓는다고 해도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너진 것은 되돌릴 수 없었고, 일그러진 것은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더욱 더 일그러질 뿐이었다. 그게 세상의 순리였다.
그 일그러짐 속에서 누군가는 먼저 일그러지는 것을 택했고, 누군가는 미련하게 버텨내다 무너지는 길을 택했다.
허나 요하나는 그 둘 중 무엇도 아니었다. 요하나는 그저 과거에 자신을 가두었을 뿐이었다.
"..."
스페라의 시선을 받은 요하나가 뭐라 대꾸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공기에 깃든 어둠이 점점 더 뚜렷하게 변하고 있었다.
조사대가 걸음을 옮겨 조금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자, 마침내 악신의 추종자들이 건설했던 '제단'이 나타났다.
이 지하시설의 중심부인 만큼 견고하게 건설되었는지 지진을 겪고도 제단은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다.
수천년 전 이 제단에서 벌어진 종교적 행사의 흔적이, 어렴풋이나마 이 공간에 남아 있었다.
"..."
먼 과거와의 만남에 조사대원들은 약간이나마 고양감을 느꼈다.
비록 악신의 추종자들이 남긴 흔적이라 해도, 수천 년 전 사용된 시설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분명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
물론 조사대원들은 고양감을 느끼는 동시에 긴장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지하 시설의 심부이며, 마족들이 이곳에 먼저 진입했던 만큼 위험한 함정이 들끓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는 고요했다.
지금까지는 전진을 우선했던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탐색 마법과 신성 결계를 활용해 혹시라도 저열한 수작질이 존재하는지 확인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유물은 어디 있지...?"
어쩌면 이미 '유물'은 마족들에게 강탈당했을 수도 있었다.
유물을 확보한 마족들이 굳이 함정 따위를 만드느라 시간을 쏟지 않고 도주했다고 한다면 상황이 설명됐다.
만약에라도 마족들이 유물을 확보했다면 바로 추격해야 했다.
헌데, 조사대의 걱정이 무색하게.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인 '유물'은 제단에 무사히 남아 있었다.
"저건...!"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해골 하나가 제단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해골의 목에, 오래된 목걸이가 하나 걸려 있었다.
목걸이에 중앙에 존재하는 자수정을 닮은 보석은 길고 긴 어둠 속에서 제련된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허나 목걸이에서 뻗어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저 목걸이가 이번 침식 사태를 일으킨 악신의 유물이었다.
"..."
"..."
"..."
목걸이의 존재가 확인되자마자 조사대원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요하나와 스페라의 눈치를 보았다.
유물의 소유권 문제로 지금 당장 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조사대원들은 마족의 함정보다도 스페라와 충돌 여부가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마족들은 스페라와 요하나의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유물을 방치한 채 사태를 방관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지금 여기서 요하나와 스페라가 정면에서 충돌하면 잘못하다간 서로 목적도 이루지 못 하고 둘 다 병신 되는 결말을 맞을 수가 있었다.
조사대원들이 다들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와중.
요하나가 조사대원들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뭐해? 빨리 가서 확보해."
"..."
조사대원들이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유물을 향해 접근했다.
조사대의 성직자들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작은 관 형태의 성물을 짐에서 꺼냈다.
성직자들이 준비한 것은 악신의 유물을 담기 위한 성물이었는데, 현존하는 최상위 성물인 만큼 짧은 기간 정도는 악신의 유물이 발하는 악의를 중화시킬 수 있었다.
일단 악신의 유물을 성물에 담아 황제가 지정한 장소로 운송한 후 본격적으로 봉인 작업에 들어가면 됐다.
성직자들은 마지막으로 성물이 정상 작동하는지 점검했고, 데런과 쥬세핀은 조사대원들 중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는 없는지 경계했다.
그리고, 요하나는 대놓고 스페라를 경계하고 있었다.
허튼짓하면 바로 칼부터 휘두를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는 요하나를 향해, 스페라가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무엇을 모시던 곳인지 알아?"
"..."
요하나는 침묵했다.
이미 일천년도 전에 대륙에서 존재가 신의 이름을, 요하나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스페라는 요하나의 침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륙은 여기서 모시던 악신을 허무... 혹은 나태의 악마라고 칭했다고 해."
요하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성국에는 이 제단에 관련된 정보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교황청에 존재했던 금서 중에는 수천 년 전 기록이 적인 문서도 많다는 모양이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페라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요하나는 점점 더 표정을 굳혀야 했다.
"나태의 악마여서 그런지, 이 제단에서 모시던 악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는 소수였다고 해."
"..."
"축복을 받은 이들은 무언가를 '단절'하거나 '무효화'하는데 큰 힘을 발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들어도 잘 감은 안 잡히지?"
"..."
점점 더 살의를 띄어가는 요하나를 향해 스페라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조금 전에 여기는 왜 왔냐고 물었지? '이 힘'을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조각이 여기 있다고 하더라고."
요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굉음과 함께 요하나가 튕겨져나갔다.
유물을 확보하려던 조사대원들이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스페라를 향해 눈을 돌린 순간.
해골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스스로 풀려나더니 빛살처럼 쏘아졌다.
"?!"
이상을 감지한 데런이 뒤늦게 손을 뻗었으나 한참 늦은 손짓이었다.
스륵
빛살처럼 쏘아졌던 목걸이가, 다음 순간 스페라의 목 위로 부드러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스페라가 은은히 빛나는 목걸이를 톡톡 두드려 보며 요하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요하나, 기억하도록 해. 이미 일그러져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어. 너도, 나도 말이야."
츠즈즈즉!!
성검을 둘러싼 성스러운 광휘에 어둠이 융합된다.
600년 전 그러했듯, 빛과 어둠이 초월자들의 인도 속에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