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혐오 [4]
[20]
"새로운 진입로를 찾았다고..."
요하나는 새롭게 올라온 보고를 확인했다.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지면의 틈새에서 새로운 진입로를 확인했다는 보고였다.
아직 진입로의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진입로 안쪽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간다면 분명 오래 전진하지 못 하고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통로에 가로막힐 게 뻔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정보는, 진입로 안쪽에서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정보였다.
바람이 통한다는 건 그 내부가 완전히 끊겨있는 밀실은 아니라는 걸 뜻했다.
중간중간 통로가 무너졌다고 해도 바람이 통하는 틈을 확장시켜 전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요하나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요하나에게는 밍기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현재 이 일대에서 제국과 성국은 마족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만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경쟁 관계에 가까웠다.
요하나는 반드시 성국보다 유물을 먼저 확보해야 했고, 그렇기에 되도록 정보가 새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
요하나에게는 귀찮게도 제국 조사대 내부의 정보 보안은 썩 믿음직스러운 수준이 못 됐다.
악신의 유물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하는 만큼 조사대에 성직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직자들은 아무리 자기 신분이 제국에 속해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성국에 우호적이었다.
제국이 웬만큼 걸러내고 뽑아낸 성직자들 중에서도 그런 '경향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 한 부류가 다수였다. 제대로 된 실력자들의 경우 특히 더 그랬고 말이다.
그렇기에 성직자들은 성국의 움직임에 간접적으로 협조하고는 했고, '새로운 진입로'에 관한 정보도 벌써 성국 쪽에 새어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요하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데런은 요하나의 결정에 공감하면서도 걱정을 내비쳤다.
"누님, 위험하지 않을까요? 급하게 전진하다가 통로가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소수 정예로 들어갈 거야. 대처할 수 있어."
통로가 수백 미터 지하에 있었다면 좀 더 신중히 판단했을 터다.
수백 미터 지하에 있는 통로에 들어갔다가 파묻힌다면 거슬리는 부상을 입거나 탈출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으니까.
허나 고작해여 십여 미터 지하라면 탐색 도중 붕괴된다고 해도 충분히 대처 가능했다.
막말로 통로가 무너지면 그냥 머리 위를 파헤치고 밖으로 나가면 됐다.
"정보가 새기 전에 바로 움직이자."
요하나의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데런과 쥬세핀은 더는 반문 없이 요하나의 명령에 따를 준비를 했다.
*
제국의 조사대가 움직였다.
요하나를 필두로 편성된 조사대의 고급 전력들이, 갈라진 지면의 틈새에 도달한 후 내부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내 제국의 조사대원들이 순차적으로 지면의 틈새로 몸을 감추었다.
그 광경을, 스페라가 거리를 벌린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요하나는 성국을 의식했기에 충분히 신속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새로운 진입로를 탐색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페라는 이미 새로운 진입로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요하나의 판단과 움직임은 스페라의 예상대로였기에 스페라는 긴장감 없이 제국의 조사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가늘게 좁혔다.
스륵!
붉은색 고리가 스페라의 황금색 눈동자를 감쌌다.
개안을 이룬 스페라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스페라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개안을 이룬 눈으로 바라보았음에도 유의미한 이상이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중얼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스페라가 슬며시 자기 목을 매만져보았다.
자기 목에 닿았었던 그 강렬했던 살기를 상기해본 스페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직 완전히 장악된 것 같지는 않던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으려나?"
흥미로운 변수의 출현에 스페라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
"후우..."
새롭게 발견된 진입로에 들어선 요하나가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진입로에 들어선 제국의 조사대는 요하나를 포함해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소수 정예였다.
소수 정예로 편성된 조사대의 구성원은 기사 다섯, 마법사 셋, 템플러 셋, 그리고 연구원 하나였다.
이들 중 한두 명만 공백이 생겨도 조사를 지속하는 게 곤란해질 수도 있었기에 서로를 잘 지켜내야 했다.
다들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호흡을 정돈했다.
요하나가 허공에 발광 아티펙트를 띄워 시야를 밝히며 대원들에게 경고했다.
"되도록 큰 기술을 자제하도록 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지하에서 화력이 강한 기술을 썼다가는 통로의 붕괴를 유발할 수 있었다.
또한 성국의 인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만큼,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해도 외부에서 감지 가능한 강력한 기술들은 되도록 자제하는 게 옳았다.
요하나의 주의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나가 손가락을 뻗어 진입로 안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격적인 탐색이 시작됐다.
"..."
내부는 조용했다.
통로의 벽에는 괴이한 형태의 무늬나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오랜 시간 퇴색이 진행된데다 지진으로 인해 손상을 입은 탓에 제대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투둑...!
"..."
걸음을 걸을 때마다 쩍쩍 갈라져 있는 천장과 벽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다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다들 긴장한 와중에 템플러들이 특히 더 주변을 경계했다.
요하나가 템플러에게 짧게 물었다.
"어때?"
"최악은 아니다."
작전을 수행 중이니만큼 템플러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답했다.
"침식이 진행되고 있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지만... 이 구역이 침식을 매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말인즉슨, 이 인근 지하 어딘가에 있는 악신의 유물만 성공적으로 회수한다면 일대의 침식을 복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긍정적인 소식에 몇몇 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었다.
그렇게 억지로 밝힌 어둠 속을 계속해서 전진한 끝에.
조사대는 마침내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
"..."
지면에 생긴 균열의 틈새에서 발견된 집입로는 두 개였다.
하나의 통로가 끊기면서 드러난 진입로이니 두 개인 것이 당연했다.
각각 '진입로A'와 '진입로B'로 칭해졌는데, 진입로A에서는 공기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았고 진입로B에서는 공기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요하나가 들어선 진입로는 진입로B였으나, 역시 지진으로 인해 통로가 붕괴되어 앞이 막혀 있었다.
'반대쪽에서 공기의 흐름은... 느껴져.'
통로 일부가 무너져 있었으나 완전히 막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하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뚫자."
"잠시 기다려 주시오."
고위 마법사, 플리오가 붕괴된 통로에 접근했다.
반대편이 열려만 있다면 붕괴된 통로를 뚫어낼 화력 자체는 조사대에 충분했다. 무식하게 뚫어냈다가 더 큰 붕괴를 불러오는 꼴만 주의하면 됐다.
그렇기에 일단 마법사가 통로에 가해지는 하중을 덜어줄 구조물을 마법으로 만들어내야 했다.
그 뒤에 기사들이 나서서 검기나 검강의 절삭력을 활용해 막힌 통로를 뚫어내면 됐다.
츠즈즉!
플리오가 얼음 마법을 기반으로 마법 구조물을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새롭게 돋아난 얼음 기둥이 하중만 잘 분산시켜준다면 더는 통로 무너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헌데 플리오가 주변 지형을 고려해 얼음 기둥을 완성시키려던 찰나.
요하나가 플리오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채서 뒤로 당겼다.
콰악!
"?!!"
촤악!!!
붕괴된 통로의 반대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류가 삽시간에 칼날의 형상을 이뤄 플리오가 직전까지 서 있던 공간을 할퀴었다.
플리오가 식겁하는 사이, 기습에 실패한 검은 칼날이 다시 연기처럼 변해 막혀 있는 통로의 틈새로 사라지려 했다.
조사대원들 다수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기겁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구르고 굴렀던 데런과 쥬세핀만은 침착하게 상황에 대응했다.
쐐액!!!
검은 기류를 향해 쥬세핀이 눈부신 속도로 검을 찔러넣었다.
쾌검에 특화된 검술을 익힌 쥬세핀은 늦지 않게 검은 기류를 타격했다.
하지만 쥬세핀의 공격은 검은 기류의 움직임을 잠시 방해했을 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 했다.
그때, 데런이 검기가 응축되어 찬란히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끄드득!
데런의 검기는 표면에 닿는 물질이나 기운을 더욱 끌어당겨 응집시키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도망가려던 검은 기류가 데런의 검기에 휘말려 끌어당겨졌다.
쥬세핀과 데런이 잠시 시간을 벌어준 사이.
상황을 파악한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했다.
마족과 마주친 이상 힘을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마법사들은 망설임 없이 서클을 활성화시켜 통로 주변에 삽시간에 수십 개의 얼음 기둥을 만들어냈다.
으드드득!!
얼음 기둥들 덕분에 이제 강력한 화력을 쓴다고 통로가 바로 무너질 걱정은 없었다.
얼음 기둥이 완성되자 요하나가 곧장 검푸른 검강을 발현해 검은 기류를 향해 휘둘렀다.
콰가가각!!!!!!
요하나의 일격은 그야말로 파괴적이었다.
막혀있던 통로가 바스러졌고, 그와 함께 검은 기류 또한 더는 형체를 이루지 못 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조사대에 기습을 가했던 위협적인 존재는 무력화되었고 막혀있던 길도 열렸다.
허나 조사대의 그 누구도 웃음기를 머금지 못 했다.
"마족...?"
"마족의 함정이라고?"
조사대원들은 물론이고 요하나조차 인상을 찌푸렸다.
'마족이 왜 여기 있지...?'
제국의 조사대가 얻은 정보가 성국도 아닌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새어나갔다? 그 짧은 시간에?
그건...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납득하기 힘든 가설이었다.
차라리 이 통로를 마족들이 먼저 발견하고 함정을 준비했다는 게 논리에 맞았다.
부정적인 기운에 익숙하고 민감한 마족들인만큼, 소수의 숫자로도 대륙과 성국의 조사대보다 이런 통로를 찾아내는 게 빨랐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다른 통로로 진입해서 이곳에 함정을 준비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
요하나가 한숨을 삼켰다.
정확한 상황이야 어찌됐든,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안쪽에 함정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유물을 악신의 추종자들이 먼저 손에 쥘 확률도 높았다.
만약 악신의 추종자들이 먼저 유물을 찾아냈다면 다른 수작을 벌이기 전에 처단해야 했다.
은밀히 움직이는 걸 포기한 요하나가 침묵하고 있던 수중의 아티펙트들을 활성화시키며 명령했다.
"따라와. 뭐가 됐든, 돌파할 거야."
요하나의 선택은 강행돌파였다.
조사대원들은 요하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전투를 준비했다.
선두에 선 요하나가 전진하기 직전.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귓가를 잠시 울렸다.
[키키키키키키키키키킥]
"..."
방금 요하나에게 당한 마족은 육신은 붕괴되었으나 어떻게든 생존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형체 없이 울리던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마족놈들의 지긋지긋한 괴이함에 짜증을 느낀 요하나가 거칠게 지면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