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혐오 [1]
[17]
대의 없는 투쟁.
생존을 위한 학살.
검을 휘두를수록 꿈꿔왔던 이상과는 멀어지기만 한다.
그 암담한 현실이 데런에게 항상 짙은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데런은 자주 검을 내려놓고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고 해도, 그저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그럼에도 데런은 떠나지 못 했고, 짙은 자괴감에 휩싸인 채 이제까지 검을 휘둘렀다.
데런이 떠나지 못 한 것은 요하나 때문이었다.
부질 없는 희망을 붙잡고 삭막한 투쟁을 이어가는 요하나의 뒷모습이 너무나 위태롭게 느껴져서, 그래서 결국 멋대로 떠나지 못 했다. 기껏해야 그 정도 이유였다.
데런 또한... 인간 간의 싸움보다는 마족들과 충돌하는 게 심적으로 조금 더 편했다.
허나 온갖 괴이한 힘을 다루는 마족들과 혈전을 벌이는 게 결코 만만할 리 없었다.
데런은 마경과 인접한 전장을 전전하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심신 또한 많이 피폐해졌다.
그런 데런을 향해, 요하나는 인간끼리 칼질을 해야 할 수도 있는 전장에 함께 갈 것이냐고 물었다.
"너는, 같이 갈 거야?"
"..."
데런은 요하나를 잠시 마주 보았다.
요하나의 눈가에는 망설임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장을 전전하며 계속해서 육신을 혹사한 것은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데런보다 더욱 맹렬하게 육신을 혹사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휴식을 외면하고 다음 전장을 향해 기계처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데런은 그런 요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도 갈게요."
"따라와서 징징댈거면 그냥 여기 있어."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요."
데런이 확답했으나 요하나는 데런이 못 미더운 눈치였다.
그때, 요하나와 데런의 대화를 지켜보던 루나가 탁자의 지도를 옆으로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정보를 더 모아야 해. 준비되면 부를게. 쉬고 있어."
"응, 알겠어."
요하나와 데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루나가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자, 이윽고 헤이든이 루나를 찾아왔다.
헤이든이 예를 갖추자, 루나는 헤이든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맡겼던 프로젝트는?"
"보고 드렸던 대로 현재까지는 큰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아직 준비 단계인 프로젝트인 만큼 크게 차질을 빚을 만한 사건은 없었다.
프로젝트에 함께 할 인재를 구하는 것과 보안유지가 까다롭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원활했다.
허나 그와 별개로, 헤이든은 현재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과연 충분히 실용적일까 의문이었다.
'신성력의 배제라...'
루나는 헤이든에게 '신성력'을 배제한 의료 체계를 새롭게 정립해보고, 필요한 기술이 있다면 새로 개발해서 실증하라고 명령했다.
꽤 재미난 시도이기는 했다. 허나 헤이든은 이 프로젝트가 그리 유의미한 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치료사들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새로운 의료 기술과 기기를 개발한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했다.
신성력은 '기적'이다. 획기적인 기술의 진보를 이룬다고 해도 신성력이 내리는 '기적'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길고 긴 대륙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의학의 중심은 신성력이었고, 그 외의 요소들은 신성력이 내리는 기적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헤이든은 의문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루나가 크게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편하게 물었다.
"오랜 시간 막대한 예산을 투자한다고 해도 신성력을 대체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 사료됩니다만..."
"..."
"혹시 성국과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도..."
"..."
확실히 현 제국과 성국은 껄끄러운 관계였다.
제국의 중심 중 한 명인 루나는 심지어 신성 교단을 병균에 비유하고는 했다.
허나 엘-람을 모시는 신성 교단은 국가를 넘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종교였기에, 이들을 전부 박해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언젠가 성국과 전면전을 치르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성직자들은 성직자들 대로 대우해주어야 체제 유지가 가능했다.
말인즉슨 제국은 성국을 궤멸시키는 게 아니라 흡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다.
헤이든이 생각하기에, 신성력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고위 성직자들을 미리 회유해서 아군으로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어차피 힘의 우위는 제국에 있으니,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면 천천히 압박을 가해 성국을 잠식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허나 루나는 헤이든의 의견을 부정했다.
애초에 루나는 성국과 전면전이 발생했을 때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못 할까 두려워 그런 프로젝트를 헤이든에게 맡긴 것이 아니었다.
"너희 모두가... 언젠가는..."
"..."
"족쇄가 되어버린 기적 없이, 홀로 서야 할 거야. 그게 너희가 감수해야 할 자유의 대가야."
"...?"
헤이든은 루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루나는 의아함을 내비치는 헤이든을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네게 맡긴 것은... 그날을 위한 안배야."
*
"..."
쥬세핀은 의자에 앉은 채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만에 마음 놓고 취하는 휴식은 정말이지 꿀보다 달콤했다.
금방이라도 단잠에 들 것처럼 눈을 길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쥬세핀이, 근처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 백작님...!"
쥬세핀은 요하나를 그렇게 불렀다.
요하나는 현재 변경백 신분이었다.
요하나는 한참 전에 작위와 함께 '데펜시오'라는 성을 받았다.
물론 요하나는 그 허울뿐이라고 느껴지는 작위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쨌든, 꾸벅꾸벅 졸던 쥬세핀이 얼른 일어나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다 끝난 겁니까?"
루나가 오벨리스크를 방문한 후 귀환할 때까지 쥬세핀은 황성에서 대기해야 했다.
근데 루나도 오벨리스크에서 돌아왔으니 이제야 휴가를 즐길 수 있겠다고, 그리 생각한 쥬세핀이 환히 웃었다.
허나 요하나가 입에 담은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마이센에 가봐야 해. 성국과 접경 지역이고 마경과도 인접해 있어. 대비 단단히 하고 있어. 무장 점검 끝내 놓고."
"...!!"
쥬세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한 쥬세핀이 살짝 비틀거리더니, 요하나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물었다.
"가, 각하... 이제 막 돌아왔는데... 일정을 조금만 미루면 안 되겠습니까...? 중요한 작전이라면 더욱... 체력을 비축해두어야..."
"쥬세핀."
"옙...!"
"까불지 마."
"..."
칼 같은 요하나의 거절에 쥬세핀이 축 처졌다.
체력이 고갈되었다는 건 결코 쥬세핀의 엄살이 아니었다.
마경과 대륙의 경계선에서 오랜 시간 전투를 수행하다 귀환했는데 몸이 멀쩡한 게 도리어 이상했다.
하지만,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인 쥬세핀은 까라면 까야하는 위치였다.
결국 쥬세핀은 끙끙거리면서도 무장을 점검하기 위해 움직였다.
*
마이센으로 떠나기 전.
요하나는 벨라와 잠시 만남을 가졌다.
벨라는 오래된 고목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메마른 벨라의 눈두덩이에는 생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는 벨라를 마주하며, 요하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응..."
"식사 제대로 하시고요. 레이가 되돌아왔을 때, 자기 엄마가 이렇게 야위어 있으면 얼마나 걱정하겠어요."
"...응, 그렇지. 알았어."
요하나는 레이가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고, 벨라는 그렇지 못 했다.
기실 레이가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는 이들은 루나와 요하나를 제외하고는 몇 없었다.
그럼에도 벨라는 레아를 위해, 그리고 레이가 돌아올 것이라는 불가능한 희망에 의지해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력했기에 벨라는 요하나 앞에서 억지로나마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요하나는 서로에게 불편한 자리를 굳이 길게 가져가지 않고 짧게 끝냈다.
벨라와 헤어진 뒤, 요하나는 레아와 마주쳤다.
요하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레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레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폐하."
"요하나 언니..."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으세요."
요하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펼쳐 레아의 뺨을 살짝 잡았다.
갑작스러운 요하나의 행동에 레아가 당황했다.
허나 요하나는 개의치 않고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레아의 뺨을 한 번 흔들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폐하, 저는 폐하가 부러워요."
"..."
"페하를 질투했어요. 폐하를 위한 레이의 헌신을 곱씹어보면서, 나도 레이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질투했어요."
"..."
"음...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레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요. 항상 헌신적이었어요. 우리 모두에게 말이에요."
얼어죽거나 반병신이 되기 직전인 꼬맹이를 굳이 주워다가 아득바득 키워냈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연을 지키겠다고 사투를 벌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푸른 하늘을 선물하고자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갈아내기도 했다.
요하나가 레이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레이는 한결같이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걸 알 수 있을 만큼 요하나도 철이 들었다.
"그러니까 폐하, 두려워하지 마세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단지... 레이에게 받은 헌신을 돌려주고 싶을 뿐이니까요."
"..."
가만히 굳어있던 레아가 얼마 못 가 울먹이기 시작했고, 요하나는 울먹이는 레아의 뺨을 문지르며 활짝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데런이 표정을 굳혔다.
"..."
레아를 향한 요하나의 이해심은 언뜻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데런에게는 요하나가 보여주는 이해심이 위태롭게 느껴지기만 했다.
요하나의 이해심은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에, 자신의 감정과 고통을 억누르고 외면할 수 있었기에 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5년 전부터 요하나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낭떠러지를 따라 걸으며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맹목적으로 쫓을 뿐이었다.
그 위태로운 요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데런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
꾸득!
검은 철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안면을 파고들었다.
안면을 파고든 손가락은, 이내 안면을 덮고 있던 투구의 앞면을 거칠게 뜯어냈다.
투구의 앞면은 얼굴에서 뜯어져 나가며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
투구의 앞면을 뜯어낸 안소니우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이 안소니우스의 두 눈동자에 비쳤다.
몇 년만에 자신의 눈동자로 하늘을 보았거늘, 뜯겨져 나간 투구의 앞면은 벌써 안소니우스의 손아귀를 타고 올라 뺨을 덮어가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했나."
변화를 감지한 안소니우스가, 얼굴이 완전히 투구에 뒤덮이기 전에 낮게 속삭였다.
"레이..."
남부를 궤멸시킨 마왕이 육신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