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만남 [5]
[16]
엘-람과 악신들.
그들의 관계는 분명 적대적이었다.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했다.
거기다, 악신들이라고 묶여서 분류되는 존재들 또한 서로에게 언제나 협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경만 해도 각각의 악신을 따르는 세력들이 영역을 나누고 있었다.
리실로테는 그 점을 지적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가 별빛 너머의 영역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별빛 너머의 영역을 유영하는 존재들이 상호 견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 가능했다.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견제하고 있기에,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함부로 '출혈'을 감수할 수 없었다.
안이하게 출혈을 감수했다가는 표적이 되어 더욱 크게 물어뜯길 테니까 말이다.
이는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다른 차원에 간섭하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제약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다른 차원에 무리한 간섭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로 인한 출혈은 그들에게 큰 부담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라도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한시적으로라도 충돌을 멈춘다면... 그로 인해 과거보다 훨씬 쉽사리 출혈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여파가 가벼울 리 없었다.
"네 존재는 충분히 위협적이야. 그들을 야합하게 할 만큼, 자극적이지."
리실로테가 루나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다.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합의 아래 출혈을 감수하기 시작한다면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겠지. 6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그때보다 더욱. 그리고 분명..."
이미 시작했을 것이라고, 리실로테는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야합은 영속될 수 없으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암묵적인 합의를 어기고 서로의 뒤를 칠 수 있는 이상, 그들은 끊임 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해야만 할 터였다.
설령 루나를 배제하기 위해 일시적 야합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상호 간의 신뢰 아래 무한히 출혈을 감수하는 것을 불가했다.
그러니 이건 본질적으로, 눈치 싸움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너의 '추이'를 지켜보며 이 세상에 개입하려 할 거야."
리실로테가 입에 담은 '추이'는 루나의 성장 속도를 의미했다.
리실로테가 루나에게 잘 숨겨보라고 했던 대상 또한, 루나의 성장 속도였다.
"네가 별빛 너머에 닿을 그 시점을, 잘 숨겨야 할 거야. 네가 초월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극단성 또한 점차 심화될 테니... 착가하게 만들어야지. 방심시켜야지. 네가 초월을 이루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면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리실로테가 가볍게 조소했다.
"내가 굳이 조언해주지 않아도, 너는 이미 잘 인지하고 있겠지만."
"..."
루나는 5년 동안 황성의 시스템을 장악하는데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황성과 황도에 내재된 시스템만 성공적으로 복구하고 장악한다면 운신의 폭이 상당히 넓어짐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를 뒤로 미뤘다.
루나가 우선순위를 그렇게 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황성에 새겨진 시스템의 근간에는 시조룡의 권능이 개입되어 있고, 시스템을 적합한 수단이 아닌 우회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결국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권능을 변형시켜야 했다.
별빛 너머의 초월자가 아닌 드래곤의 것이라고는 하나 권능은 권능이었다.
이를 변형시키는 건 현재의 루나에게 있어서도 가능하다고 확답 불가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권능의 변형을 시도해서 성공시킨다면 드래곤에게 권능을 내린 주체인 엘-람에게 반드시 탐지되게 된다.
그렇게 대놓고 루나의 가파른 성장 속도를 드러낸다는 것은, 별빛 너머의 존재들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별빛 너머의 존재들을 자극해서 초래될 결과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루나가 황성의 시스템 장악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분명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리실로테가 오벨리스크의 심부를 새삼스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황성이 아닌 오벨리스크를 중추로 활용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일 테고."
오벨리스크를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이 그럭저럭 도움이 됐다.
이러나저러나 오벨리스크를 설계하고 이제까지 운용한 것은 리실로테와 그녀가 남긴 원념이었다.
대략적이나마 루나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는 리실로테는,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앞에 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의 처분을 너에게 맡기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통을 곱씹으며, 충실한 종이 되어 네게 협력하지."
리실로테는 오벨리스크를 제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의 통제권을 루나에게 양도했다.
이제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
루나는 목표한 바를 이룬 듯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오벨리스크의 심부를 떠나려는 루나를 향해, 리실로테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실패하지 마."
600년 전 리실로테는 실패했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무력하게 잃었다.
되찾지 못 할 과거를 되새기며 끔찍한 공허와 증오를 가슴에 품고서 제자리를 맴돌았다.
방향을 잃은 맹목은 끊임 없이 방황하며 리실로테를 망령으로 만들었다.
리실로테가 남긴 망령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하염 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그날의 고통을 곱씹으며 그저 방황했다.
그 망령은... 제국을 증오하고 대지 위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혐오했으나 그들을 적대하지 못 했고, 망상 속에서 복수를 꿈꿨으나 별빛 너머의 존재들이 대륙을 유린해가는 모습을 그저 무력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 오래된 광기와 아집이 결국 대륙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트리거가 되었다.
리실로테는 그저 모든 것을 잃은 실패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웃음을 공허했다.
그리고...
너는 실패하지 말라는, 리실로테의 그 증오스러운 격려를 듣고서.
루나가 발걸음을 멈춰 세운 채 답했다.
"나는, 너와 달라."
타고난 재능의 격이 달랐다.
딛고 서 있는 기반이 달랐다.
리실로테는 실패했기에, 리실로테가 자신의 실패를 후회하며 남긴 모든 것이 루나의 기반이 되었다.
루나는 리실로테의 끔찍한 좌절을 계승했으나, 그렇기에 리실로테와 모든 면에서 달랐다.
리실로테는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잡지 못 했고, 루나는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스스로 붙잡았다.
루나는 리실로테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다.
루나가 맞이할 결말 또한, 리실로테와는 다를 터다.
그러니까.
나는 너와 다르다는, 루나의 그 오만한 단언을 듣고서.
리실로테가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
리실로테와 만남을 가진 후.
필요한 일을 끝낸 루나가 오벨리스크의 심부에서 발을 돌렸다.
헌데 루나가 오벨리스크를 벗어나기도 전에 둔중한 울림이 공간을 울렸다.
쿠우웅---!
루나가 제자리에 선 채 눈가를 좁혔다.
오벨리스크가 계속해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지진이 일어난 듯 싶었는데, 문제는 지진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자연 발생한 지진이라면 차라리 대처하기 편했지만, 만약 이 지진이 대규모 마법의 여파라도 된다면 상황이 심각했다.
루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아프텔이 나타나 보고했다.
[마법의 여파는 아닙니다. 자연 발생한 지진이라 예상됩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허나 루나는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아프텔에게 물었다.
"진원지가 어디야."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정보가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현재 송신되는 데이터와 현장의 보고에 따르면 진원지는 마이센 인근으로 예상됩니다.]
"..."
루나의 눈가가 다시 좁아졌다.
마이센이라면 지리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었다.
제국의 영향권과 성국의 영향권이 겹쳐 있는데다, 마경과도 비교적 인접한 지역이었다.
하필이면 진원지라는 곳이 참 화약고 같은 지역으로 찍혔다.
단순한 우연인가? 그럴 리가 없다.
적어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서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생각해야 했다.
이미 움직이지 시작했을 거라고... 어쩌면 예상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라고...
리실로테가 건넨 그 경고를 상기하며, 루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한 후 의심스럽다고 판단되면 믿을 수 있는 전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루나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은 여전히 요하나였다.
루나는 오랜만에 복귀한 요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짧게 인상을 썼다.
*
황성에 복귀한 후 얼마 안 가.
루나는 요하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입을 열었다.
"...마이센 인근에 문제가 생겼어."
요하나는 지도를 빤히 바라보며 루나에게 물었다.
"이곳이면... 접경 지대야? 성국이랑?"
"맞아."
"마경과도 가깝네."
"맞아."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지진이 발생한 이후에 일대의 단층이 솟아올랐어. 이 선을 따라서 작은 산맥이 생성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산맥이 생겨? 황성에서도 며칠 동안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지던데, 진짜 엄청났나 보네. 그런데 문제가 뭐야?"
"우연의 일치일 수 있겠지만, 지진 이후 마이센 인근부터 마경의 침식이 강해지고 있어."
"너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
"아니."
루나가 단언하자 요하나는 의심 없이 납득했다.
"그러면 가서 조사하고 오면 되겠구나?"
"...맞아. 조사대에 참여해줘."
루나가 손가락을 움직여 이미 침식이 이루어진 지역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마경과 가까워. 고위 마족들과 충돌할 수 있어.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고."
"그건 괜찮아. 만날 싸우던 놈들인데, 뭘. 익숙해. 마경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걱정할 거 없어."
"그리고, 성국과 마찰이 발생할 거야."
"..."
요하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접경 지대에서 문제가 발생한 이상 크고 작은 마찰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굳이 영향력을 따진다면 마이센 인근은 성국의 영향력이 더 강한 지역이었다.
기싸움은 무조건 일어날 테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유혈사태도 감수해야 했다.
요하나는 이렇게 인간끼리 바짝 날을 세운 채 돌아다녀야 하는 환경이 싫었다.
성국과 깊게 엮인 지역은 아군이나 민간인의 움직임까지 계속 주시해야 했다. 혹시라도 배신할지 모르니까. 그건 언제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요하나에게 주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부탁을 해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요하나가 다녀오겠다고 답하며, 뒤에서 침묵하고 있던 데런을 돌아봤다.
"너는, 같이 갈 거야?"
"..."
요하나의 물음에 데런은 침묵했다.
인간끼리 또 칼질을 해야 할 수도 있는 전장.
요하나는 굳이 또 데런을 그런 곳에 데려갔다가 징징대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던 데런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