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83화 (383/446)

외전 - 만남 [4]

[15]

'저게 맞나...?'

요하나와 지미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울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울트가 과자 가루가 묻은 손을 어색하게 털었다.

울트가 겸연쩍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울트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레시나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레시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요하나와 지미가 무언가 불결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울트를 바라봤다.

울트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음...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라고 할 것도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일단 말을..."

"허허, 괜찮습니다."

"아니, 일단 들어보시고..."

"허허, 괜찮다니까요."

지미는 굳이 울트의 변명을 길게 듣고 싶지 않았기에 손을 휘휘 저으며 벽을 쳤다.

요하나가 그 꼴을 보며 여전히 떫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옆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뮤."

"?"

"?"

"?"

세 사람이 동시에 레시나를 돌아보았다.

쿠뮤라는 게 엘프의 만능형 욕설이라는 건 세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거진 시발에 대응되는 욕설이었는데, 세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자 레시나는 미간을 콱 찌푸린 채 지미에게 쏘아붙였다.

"저기요."

"...?"

"나는 연애도 못 해요?"

"...예?"

"나는 연애도 못 하냐고요!"

"..."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엘프가 연애도 못 하냐고 묻는데 거기서 못 한다고 답하는 것도 웃긴 짓이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지미가 식은땀을 흘리며 요하나와 울트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지미가 그렇게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레시나는 지미를 계속해서 타박했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요? 내가 당신보다 몇 배를 더 살았는데!"

"..."

"병신된 채 살면서 까먹은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간신히 연애 좀 해보려니까 왜 방해해요!! 나는 연애도 못 해?!"

사실 레시나도 후손이 있기는 했다.

근데 하이엘프는 교접 없이도 후손을 남기는 게 가능하고 그게 일반적인지라, 레시나의 후손 또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됐다.

말인즉슨 레시나는 연애 경험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헌데 수백 년만에 썸을 좀 타보려는데 옆에서 쓸데 없는 방해가 들어오니 제대로 신경질이 났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참견하려 드는데요!!"

"..."

지미가 돌처럼 굳어 눈만 끔뻑거렸다.

사실 지미와 요하나는 매우 당황하는 중이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레시나는 600년 전 신화에 나오는 영웅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레시나에 대한 이미지는 고상하고 고결하고 고고한 엘프에 가까웠다.

실제로 레시나는 하이엘프답게 평범한 인간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기는 했다.

허나 600년 전부터 레시나는 세계수의 신기를 독단으로 들고 날랐을 정도로 엘프치고는 왈가닥 기질이 강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레시나는 '그 구역의 미친년' 수준이었으니, 인간들이 동화책을 읽고 상상한 것 만큼 고상하고 고결하고 고고한 엘프는 결코 아니었다.

더군다나 레시나는 수백 년만에 간신히 저주에서 벗어나 이제 좀 삶을 즐겨보려던 차였다.

근데 난데없이 방해가 들어왔으니 신경질이 나는 게 당연했다.

"쿠뮤, 뭐가 문제인데요? 쿠뮤!"

"..."

지미와 요하나는 영 할 말이 없었다.

레시나의 주장이 정론이기도 했고, 심지어 레시나와 울트의 서사는 나름 로맨틱하기도 했다.

한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평생을 떠돌아다닌 남자와, 죽기 직전에 결국 저주에서 풀려나 삶을 되찾은 여자의 연애 서사 아닌가.

뭐, 유일한 문제라고 하면 역시 여자의 외형이었다.

"..."

요하나가 자기보다 눈높이가 상당히 낮은 레시나를 내려보았다.

이게 참 따지기는 뭐한데 그냥 웃어주고 넘기기에도 뭐한 껄끄러움이 혀끝을 맴돌았다.

물론 지미는 레시나와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기에 빠르게 사과했다.

"예... 죄송합니다..."

지미가 까닥 고개를 숙이자 요하나도 지미를 따라 까닥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레시나는 시원찮다는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한편, 식당의 반대편 문에서는 미네르가 자기 조상님의 히스테리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조상님에 대한 악평은 엘프의 영역에서 살 때 익히 들었던 터라 큰 충격은 없는 듯했다.

어쨌든 사과를 들은 레시나는 폴짝 뛰어서 울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재차 헛기침을 한 울트가 어색한 걸음걸이로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에야 요하나를 돌아본 지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

"가디 자작님도 계시니까 마음 놓고 쉬어."

울트 정도의 핵심 전력이 황성에 머물고 있다면 요하나도 편하게 휴식 정도는 취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요하나가 벨라의 안부에 관해 짧게 물었다.

"...벨라는 괜찮아요?"

"...잘 지내지. 네 덕분에."

잘 지낼 리가 있나.

요하나는 지미의 대답이 거짓에 가깝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긴장이 조금 풀린 요하나는 피곤함에 찌든 눈동자 위를 매만지며 잠시 눈을 감았다.

"..."

투쟁의 시간이 흐른다. 삶을 이어가는 모든 순간이 모두에게 투쟁이었다. 레이가 남긴 흔적은 그만큼이나 깊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아는데, 레이 혼자만 그걸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

마스터 코드의 해석은 이미 완료됐다.

이제 루나는 얼마든지 오벨리스크의 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헤이든과 함께 오벨리스크에 진입한 루나는 헤이든을 대기시킨 채 홀로 오벨리스크의 심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단한 돌발 상황이나 변수 없이, 루나는 황실 마탑의 중추, 오벨리스크에 존재하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리실로테가 남긴 최후의 사념이 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나는 리실로테의 환영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타협도 가능했을 텐데,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지를 택한 이유가 뭐지?"

리실로테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중 하나였으나 이 모든 사태를 완전히 예측하고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리실로테의 선택은 파멸적이고 불확실했다.

리실로테가 제국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그녀가 남긴 안배들로 유추 가능했으나, 단순히 그런 이유로 이런 선택을 내렸다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루나의 질문에, 리실로테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 아이의 육신과 영혼을 붕괴시키는 저주는, 엘-람과 맺어진 영속하는 계약이야."

"..."

"너도 이제는 알고 있겠지만, 그 아이의 소멸을 멈춰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엘-람을 소멸시키는 것뿐이야."

영육이 붕괴되는 계약의 주체는 레이와 엘-람이었다.

엘-람이 강제로 새겨넣었다고는 하나, 레이의 동의 하에 계약이 활성화됐다.

영육을 붕괴를 대가로 치러야 하는 강력한 계약인 만큼 한 번 활성화되면 계약의 주체가 되는 존재들 또한 철회는 불가능했다.

이 활성화된 계약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약의 주체 중 하나인 엘-람에게 소멸에 준하는 타격을 가하는 것뿐이었다.

계약에 의한 붕괴만 정지되면 그 다음부터는 레이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강구해낼 수 있었다.

권능이든 뭐든, 쓸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물론 시체나 다름 없는 레이를 되살리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리실로테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네가, 엘-람을 죽여야만 하는 동기를 갖추기를 원했어. 네 가슴에 반드시 엘-람을 찢어 죽여야 하는 강박을 새겨넣고 싶었어."

"..."

"너라면 가능해."

리실로테는 너라면 가능하다고 루나에게 말했다.

루나는, 리시로테가 원하는 것이 하르시아의 비원이 아니라고 리실로테를 지적했다.

그러자 리실로테가 천천히 입꼬리를 움직였다.

"그래, 맞아."

루나의 지적은 정확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별빛 너머의 소멸시키겠다는 리실로테의 갈망은, 하르시아의 비원이 아니었다.

리실로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그의 비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어."

리실로테는,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은... 이미 잃어버린 가장 소중했던 존재를 그리워하며 공허하게 웃었다.

"내가 원한 건 처음부터 복수뿐이었어."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 속에서 방황하는 그 존재는, 공허하게 웃다가 루나를 마주 보았다.

"너는 나를... 소멸시키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구나."

"...그래."

루나와 마주 보고 있는 존재는 리실로테가 아니다.

리실로테의 망령이자 리실로테가 남긴 원념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이 망령은 하르시아를,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을 잃었다.

이 망령에게는 소멸이 축복이었으며 존재의 영위가 고통이었다.

루나는 이 망령에게 소멸이란 축복을 선물해주고 싶지 않았다. 이 망령을 그리 쉽게 구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리실로테가 남긴 망령의 덩어리는 충분히 가치 있었다.

생전 그녀의 집념이 만들어낸 소울웨폰과 같은 고유한 계열의 병기들은 루나 또한 완벽히 재현해내기 어려운 수준의 신기였다.

이미 오벨리스크 시스템의 통제권을 손에 넣은 이상, 루나는 리스크를 제약한 채 리실로테의 망령을 필요한 곳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이리 활용도가 높은 존재를 화풀이를 위해 소멸시킬만큼 루나는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리실로테는 실로 합리적인 루나의 선택을 이해하고 만족스러워 했다.

"그래, 너는... 하르시아와 다르지. 그 미련한 멍청이와는 달라."

"..."

"하르시아를 죽음으로 유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그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으니까. 그 바보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지."

하지만 루나는 하르시아와 달랐다.

루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 따위가 아니었다.

루나의 갈망과 애정은 단 한 명의 존재에게 집약되어 있었으며, 또한 루나는 이 대지를 살아가는 이들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하르시아와는 달리 루나는 언제나 거대한 희생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별빛 너머의 '그들'에게 있어 너는 하르시아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야."

하르시아 때처럼 루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르시아는 홀로 고립되고도 대륙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자처했으나 루나는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루나라는 존재는 하르시아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주의해. 세계수라면 모를까, 엘-람은 언제든지 이 대륙을 버릴 수 있어. 이 대륙에 가지고 있는 애정이라 해봤자 소중한 장난감 수준이겠지."

별빛 너머의 존재들은 소중한 장난감을 지켜보겠다고 신변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용인할 존재가 아니었다.

리실로테가 그 점을 지적하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미 버릴 준비가 되었겠지. 그러니까... 너도 잘 숨겨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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