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82화 (382/446)

외전 - 만남 [3]

[14]

5년 전처럼 황성의 방위가 빈약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체제가 비교적 안정화되었기에 예전처럼 쉽게 황성을 급습하기는 어려웠다.

필립스 백작령의 주요 인력도 황성으로 이주해 머물고 있었고, 황도 인근의 방위 병력도 소수나마 재건 및 증강됐다.

황성에 내재된 방위 시스템은 여전히 제대로 이용하기 힘들었으나, 루나가 새롭게 구축해놓은 방위용 결계 덕분에 적은 인원으로도 효과적으로 황성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제국 황제의 안위를 수호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전처럼 막무가내의 급습을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딱 그 정도였다.

루나라는 범접 불가의 존재가 없다면 불안한 요소도 분명 존재했다.

그렇니까 루나가 만약을 대비해 나를 불렀으리라고, 요하나는 생각했다.

실제로 루나는 만약을 대비할 겸 요하나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그녀를 귀환시켰다.

루나는 그런 속내까지는 세세히 늘어놓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다녀올게."

"바로 출발할 거야?"

"...6시간 뒤에."

루나는 요하나와의 인사를 길게 끌지 않고 등을 돌렸다.

요하나는 굳이 루나를 붙잡지 않았다. 루나가 6시간의 유예를 둔 것은 요하나에게 숨을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요하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를 잠시 바라보고는, 손을 흔들어 보았다.

"..."

레이는 역시나 어떤 대답도 건네주지 않았다.

레이는 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레이에게 웃음을 한 번 머금어주고는 황좌를 떠났다.

"..."

일단 모두에게 인사부터 해야겠지.

요하나는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카렌이 주로 생활했던 구역으로 들어서자 익숙하고 포근한 살내음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요하나는 얼마 안 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카렌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여전히 카렌의 안색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창 때 만개한 아름다움을 퀭한 눈가가 어둡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카렌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요하나가 그리워했던 것과 같은 과거를 바라보고 있을 터다.

요하나는 카렌이 보고 있을 풍경을 상상하며 카렌이 과거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요하나가 그리 가만히 서 있자, 이내 카렌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 요하나... 왔구나..."

의자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카렌이 얼른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카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초췌하게 메마른 요하나를 마주 보았다.

요하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카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거듭 반복해 중얼거린 카렌이 요하나를 꼭 안아주었다.

카렌은 요하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하나... 다행이야... 그리고... 미안해..."

"..."

"내가...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요하나가 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투쟁하는 사이 자신은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휴식만 취하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

요하나는 굳이 카렌의 속내를 묻지 않은 채 그저 마주 안아주었다.

요하나가 생각하기에, 이곳이나 전장이나 요하나나 카렌에게 있어 끔찍한 공간임은 마찬가지였다.

"...애들 많이 컸더라."

"하하하..."

아이들의 이야기에 그제야 카렌이 웃음을 머금었다.

"엘리는 갈수록 기운이 넘쳐. 갈수록 활발해지는 것 같아. 잠깐 안 보이면 사고 치고 있고. 혼내도 뒤돌면 제자리야."

"엄마 닮아서 그래."

"카니아는 원래 얌전했는데... 요즘 엘리 따라다니면서 같이 말썽이야. 물들었나봐."

"너도 어릴 때 얌전하지는 않았잖아. 독점욕도 셌고. 너 닮았네."

요하나는 카렌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때, 복도 끝자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하나가 돌아왔구나!"

알레시아가 활짝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알레시아의 손에는 원래부터 요하나에게 줄 생각이었는지 꽤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받거라!"

알레시아가 얼른 커다란 꽃다발을 요하나의 품에 안겨주며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괜찮아요."

"고생이 많았겠구나!"

"저는 거기가 편해요."

"으음... 내가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아..."

알레시아 또한 요하나가 전장에 있는 동안 안전한 곳에서 지낸 것이 부끄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보며 요하나가 피식 웃었다.

"우리 아가씨는 못 본 사이에 철이 좀 들은 것 같네요."

"철이 들었다니! 나를 너무 애 취급하는 것 같구나!"

"아가씨는 원래 애 같았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엘리는 완전 알레시아 님 2호고요."

"...!"

요하나의 폭언에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리더니 이미 준 꽃다발을 뺐겠다고 팔을 허우적댔다.

알레시아는 열심히 팔을 허우적댔지만, 현격한 육체 능력의 차이로 인해 단 한 송이의 꽃도 되찾아오지 못 했다.

전력을 기울인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알레시아는 결국 흐물흐물하게 변해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보며, 요하나는 황성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진실되게 웃었다.

"하하... 아가씨는... 변하지 않아서 좋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서, 좋아요."

요하나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진실된 만큼이나 씁쓸해 보였다.

그 씁쓸한 웃음을 빤히 바라보던 알레시아는 요하나에게 목욕 좀 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려 했다.

하지만, 알레시아가 무언가를 권하기도 전에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요하나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요하나의 반응에 알레시아와 카렌 또한 요하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알레시아가 왔던 복도의 반대쪽에서 세리아가 나타났다.

"...?"

세리아의 양손에는 무언가가 대롱대롱 들려 있었다.

...다름 아닌 엘리와 카니아였다. 엘리와 카니아는 세리아에게 목덜미 아래 부근을 붙잡힌 채 짐덩이마냥 대롱대롱 들려 운송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렌과 알레시아가 동시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물론 엘리와 카니아는 목덜미를 붙잡혀서 운송되는 와중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악꺄악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조잘거리는 중이었다.

"발이 안 닿아!"

"날고 있어!"

"피닉스!!"

"바람 정령!"

"..."

카렌과 알레시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근래 호기심이 왕성해진 엘리와 카니아는 툭하면 모습을 숨기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느라 바빴다.

세리아는 황성을 탐험하던 엘리와 카니아가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려 하면 항상 저렇게 뒷덜미를 붙잡아서 데려오고는 했다.

카렌과 알레시아가 세리아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하고는 딸아이를 넘겨받으려 했다.

헌데 세리아를 떠나 땅에 발을 디딘 엘리와 카니아가 동시에 카렌에게 달려가서 와락 안겼다.

알레시아가 뚱한 표정으로 엘리에게 물었다.

"엘리, 왜 엄마를 두고 카렌한테 가는 것이냐?"

"엄마보다 카렌 이모 찌찌가 더 크고 부드러워서 좋아!"

딱!

이제 다섯 살 된 딸의 도발에 알레시아가 일단 꿀밤부터 때렸다.

살짝 두드리는 수준의 꿀밤을 맞고 엘리가 떽떽거리기 시작하자, 카렌에게 엘리를 넘겨받은 알레시아가 엘리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누구를 닮아서 이리 말썽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에으아!"

바둥거리던 엘리는 어쨌든 엄마 품이 좋은지 이내 알레시아한테 꽉 안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요하나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알레시아에게 물었다.

"지미는... 지금 어디 있어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황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지미와 역할을 조율해 놔야 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황성이나 황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들어봐야 했고 말이다.

결국엔 일하러 가겠다는 요하나의 말에 알레시아가 잠깐 입을 우물거리더니 한숨을 짧게 쉬었다.

"지미 말이냐?"

알레시아는 지미를 편하게 불렀다.

사실, 현재 위치만 따지면 알레시아가 지미를 함부로 칭해서는 안 되기는 했다.

허울 뿐이기는 하나 5년 동안 제국의 이런저런 작위와 직급을 몰아받은 인물 중 하나가 지미인지라, 어지간한 고위 귀족이라도 지미를 존중해주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황성에서만큼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다들 과거처럼 서로를 칭하고 과거처럼 서로를 부르고는 했다. 그건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 약속에서 완전히 예외적인 존재는 제국의 황제인 레아 정도였고, 그게 때로는 레아에게 더욱 생생한 고독감을 안기고는 했다.

어쨌든, 알레시아는 여전히 요하나나 지미를 편하게 불렀다.

"지미는 아마 가디 자작과 함께 있을 것이다."

"...울트 님도 황성에 와 있어요?"

요하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울트 가디라면 대륙에 몇 없는 강력한 조력자 중 한 명이었다.

본래 세계수의 저주를 뒤집어 써 가며 대륙을 떠돌았던 울트 가디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저주가 사라진 후 '세계수의 눈물'과 같은 영약을 섭취하고 몸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요하나가 마지막에 보았던 울트는 회춘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과거보다 건강하고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울트는 이제 저주를 뒤짚어 쓰지 않아도 세계수의 신기인 게네시스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레시나의 도움이 있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게네시스의 위력 또한 전성기에 비해선 많이 약화되었으나...

그럼에도 울트는 현재 대륙에서 최상위 전력이었다. 울트를 압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전부 죽거나 쇠락했기 때문이다.

"그럼 가볼게요."

요하나는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어낸 후, 알레시아의 설명을 듣고 지미를 찾아 다리를 움직였다.

지미를 찾아 황성을 거닐던 요하나는 예상치 못 한 곳에서 지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

식당으로 쓰이는 시설의 문틀 옆에서, 지미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요하나는 대놓고 인기척을 내며 지미를 향해 다가갔으나, 지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지미라면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 했을 리 없다.

요하나는 지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인기척도 무시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나 싶어 지미 옆에 가서 섰다.

지미의 시선이 향해 있는 식당 안에는 울트와, 가디 가문이 오랜 시간 수호했던 엘프인 레시나가 함께 있었다.

울트와 레시나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울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레시나는 울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울트가 쿠키처럼 생긴 것을 집어주자 레시나는 낯부끄러워 하면서도 받아먹고는 했다.

보다보면 흡사 친밀한 부녀 관계처럼 보인다고... 하기에는... 둘의 분위기가 좀 많이 간질간질했다.

"..."

요하나가 묘하게 떪은 표정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떫은 표정을 지은 지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 네가 옳았어..."

과거 레이가 전했던 경고를 떠올리며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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