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만남 [2]
[13]
황성에서 생활을 시작하고부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벨라는 자꾸만 메말라 갔다.
호화로운 음식과 호화로운 침실을 두고도 벨라의 눈동자에 진 그늘은 짙어져만 갔다.
벨라와 함께 생활한 레아의 기억 속에서, 벨라는 자주 소리 없이 울었다.
벨라는 우는 모습을 되도록 레아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음울한 안색은 숨기고자 한다고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아가 오빠를 보고 싶다고 칭얼거린 날에는 벨라는 특히 자주 울먹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레아 또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막연하게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레아가 품기 시작한 막연했던 불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형태를 갖추어 갔다.
레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입에 담지 않았다.
오빠를 찾을 때마다 분위기가 어두워졌고, 오빠는 여전히 레아에게 얼굴을 비춰주지 않았다.
아직 너무나 어렸던 레아라 해도... 오빠를 더는 만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죽음이란 개념은 레아에게 너무나 멀리 있는 것이었다.
레아는 오빠가 그저 멀리 떠났으리라 믿으려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무사히 출산한 카렌과 알레시아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레이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카렌은 혼절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혼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알레시아 또한, 카렌보다는 꿋꿋했다고는 하나 한동안 충격을 잊지 못 하고 하루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통곡이 참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카렌이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되고 얼마 안 가.
레아는 한동안 소식이 없던 카렌이 황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카렌을 찾아갔다.
카렌 언니 카렌 언니, 레아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카렌을 만나러 갔다.
레아에게 카렌은 가족들 다음으로 가장 믿을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렌은 레아를 보자마자 비명을 내질렀다.
카렌의 비명을 듣고 화들짝 놀란 레아가 가만히 굳어있는 동안.
카렌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전부 삼키지 못 하고 가슴을 붙잡은 채 끅끅거렸다.
"왜...! 어째서...!"
레이는 레아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레아를 위해 삶을 버렸고 레아를 포기하지 못 해 이제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곧 태어날 아이가 있지 않았던가. 아이뿐만이 아니라, 레이를 사랑했고 레이를 존경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지 않았던가.
헌데 어째서 그들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고, 레아를... 레아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그렇게 홀로 떠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
카렌은 처음으로 레이에게 강한 원망을 품었다.
레이에게 그런 선택을 내리게 한 레아 또한,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카렌은, 차마 어린아이에 불과한 레아에게 가슴에 이는 원망을 쏟아내지는 못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렌의 흐느낌에서 번져 나오는 그 끓어오르는 감정의 편린이, 레아에게 참 무섭게 다가왔다.
그날 레아는 카렌에게서 도망쳤다.
레아는 그냥 무서웠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 감당치 못 할 책임을 직감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일을 겪은 뒤, 레아는 용기를 억지로 끌어모아 지미에게 오빠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지미는 오빠는 하늘나라로 갔다고, 레아에게 그리 답해주었다.
레아는 지미의 대답을 듣고 하루종일 울었다. 다음 날도 울었다. 아마 그 다음 날도 울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다시 흘러, 레아는 본격적으로 여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때로는 루나가, 때로는 면식도 없던 귀족 아저씨가 선생이 되어 레아를 가르쳤다.
학문, 예법, 교양 검술,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배워야 할 덕목들을 레아는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레아였지만 영민한 두뇌를 지닌 덕에 배움이 빨랐다.
배움을 이어가며 레아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용혈'이 지니는 무게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 오빠가 간간이 보여주었던 그 애증 어린 시선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탄생이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며, 내 존재가 오빠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을... 흐릿하게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레아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어렸다.
그럼에도 레아는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오빠가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빠를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으며 자랑스러워 했었다.
엄마도 아빠도 카렌도 요하나도 알레시아도 모두가 오빠를 많이많이 사랑했다.
레아가 아는 모든 이들이 오빠를 사랑했고, 그게... 레아를 두렵게 했다.
사실 카렌마저도, 레아가 도망간 다음날 다시 찾아갔을 때 엉엉 울면서도 레아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심일까. 겉으로 꾸며낸 가짜 애정 너머에, 오빠를 죽게 만든 나를 향한 증오와 원망을 가득 품고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아는 지나치게 영민했기에, 그런 두려움을 외면하지 못 하고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머금은 뒤부터... 레아는 함부로 울지 못 했고, 함부로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걸 망설였다.
모든 사람들이 레아를 존중해주었지만 레아는 마음을 편히 가지지 못 했다.
필립스 백작령에서 평생을 사랑받고 살아온 레아는, 황성에 이르러 우아한 관을 쓴 채 고독함이란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레아는 여전히 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레아는 과거 황좌로 쓰였던 공간에 오빠가 안치되어있다는 이야기를 우연찮게 듣게 되었다.
알레시아와 카렌의 짧은 대화를 훔쳐 들은 레아는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열심히 물어본 끝에 오빠가 황좌에 안치되어있음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레아는 오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레아가 황좌에 다가가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아직은 안 된다면서, 그렇게 레아에게서 황좌를 숨겼다.
결국 그래서 레아는 오늘, 요하나에게 어렵사리 부탁을 건넸다.
"오빠를... 보러 가요?"
"..."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요...?"
"..."
요하나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억지로 마음을 추스린 요하나는 살짝 굳어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봐서... 뭐하게요...?"
"그냥... 오빠를 보고 싶어요."
이제는 오빠의 얼굴이 그다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영민하다고 해도 어린아이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었고, 레아가 떠올린 오빠의 얼굴은 이제 뿌옇기만 했다.
모두가 오빠를 기억하는데 나 홀로 오빠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한다는 게, 레아를 더욱 고독하게 했다.
레아는 오빠가 보고 싶었다. 막연하게나마 오빠와의 만남이 위로가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느꼈다.
"같이... 가도 돼요?"
미약한 기대감이 어린 레아의 얼굴을 보고, 요하나가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는...!!"
레이는... 거기까지 외친 요하나가 턱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걸 몇 번이나 마음 속에 되새긴 요하나가 다시 레아를 마주 보았다.
"지금은... 지금은 안 돼요..."
황좌에 앉은 레이의 모습은 과거와 같았다.
일그러지고 뭉개지고 잘려나간 투쟁의 흔적들이 그 육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레아에게 보여줘 봤자... 널 위해 레이가 이토록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고 힐난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나이 어린 레아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요하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중에... 조금만 더 나중에 봐요..."
요하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천천히 레아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안 본 사이 참 많이 성장한 레아를 끌어안은 채, 요하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 괜찮으니까... 조금만 더 나중에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레아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요하나의 아픔이 레이의 죽음에서 비롯되었고, 레이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레아의 마음을 너무나 힘겹게 짓눌렀다.
레아는 괜히 눈물이 나와 요하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레아를 달래서 보낸 후.
요하나는 황좌를 앞에 두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하나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레이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역시, 레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던 게 옳은 판단인 것 같았다.
온 몸이 헤집어진 채 팔이 잘려나가고 가슴까지 휑하게 뚫려 있는 레이의 모습은 결코 레아에게 위로가 되지 못 했을 터다.
"있잖아, 레이..."
요하나는 전장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주섬주섬 입에 담았다.
만날 칼질하고 피가 튀기는 전장의 이야기는 그리 다채롭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라 해봤자 등 뒤에서 칼질하려던 첩자 놈을 잡아서 족쳤던 경험 정도였다.
홀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요하나는 문득 입을 멈추고 레이를 다시 보았다.
"...레이, 네가 없으니까 다 불행한 것 같아."
요하나는, 레이가 이런 선택을 내리게 한 레아를 원망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레아를 동정하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하게 사랑만 받으며 뛰어다니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아이답지 않게 항상 그늘이 진 얼굴로 다른 이의 표정을 살피는 데 급급하다.
우아한 관을 쓰고 세상에서 제일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해도, 레아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요하나가 음울한 조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네가 있어야 해, 레이."
레이는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 했다.
하다 못해 벨라와 레아조차 구원하지 못 했다.
레이의 희생으로 벨라가 행복해졌던가? 레이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레아의 삶이 과연 행복할 터인가?
레이는 그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와야 했다. 레이가 바랐던 구원은, 레이가 돌아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요하나는 고단함이 맺힌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요하나는 자리에 앉은 채 루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황실 마탑에 가봐야 해."
"...너가?"
"응."
"하... 알겠어."
황실 마탑에 다녀오는 사이 황성이나 지켜달라는 뜻이었다.
요하나까지 굳이 부른 것을 보니 며칠 정도는 자리를 비울 듯 싶었다.
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확인 차 물었다.
"황실 마탑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야?"
"만나야 될 존재가 있어."
"누구?"
"망령."
600년 전의 망령.
그리고 파멸의 시작점 중 하나.
그게 루나가 만나고자 하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