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80화 (380/446)

외전 - 만남 [1]

[12]

시간이 흘렀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마경과의 경계선과 대륙의 세력 구도는 점차 고착화되었다.

물론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대륙의 인력과 물자는 끊임 없이 소모되는 중이었다.

삐끗하면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정한 줄타기였다.

하지만 그 줄타기를, 대륙은 아직까지 잘 견뎌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

전황은 얼핏 보기엔 긍정적으로 보였다.

마경의 확장은 성공적으로 저지되었고 새로운 황제와 제국을 중심으로 한 체제 또한 기틀이 잡혀갔다.

제국과 성국 사이의 긴장감 또한 초기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적어도 초기처럼 정면에서 무력적으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루나에게 있어 성국과의 긴장감이 완화되었다는 건 결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성국과의 긴장이 완화되었다는 건 결국... 제국이 성국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집단에 침식되고 있음을 뜻했다.

이 종교적 침식은 갈수록 심화될 터다. 허나 그렇다고 엘-람을 추앙하는 성직자들을 모조리 박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전장에서 입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신성력이라는 '기적'이 필수불가결했다.

더군다나 물자의 소모만큼이나 이 시기를 견디는 이들의 정신적인 소모도 가팔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을 겪으며 지쳐가는 심신을 달래기 위해 종교에 깊이 기대는 이들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마족들의 공세가 남부가 아닌 동부 쪽에 집중되고 있는 것에 대해 수군거림이 꽤 잦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국을 견제한다고 신성 교단을 작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도리어 악화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종교 박해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발이 발생해 상황이 아예 통제 불능에 놓일 가능성까지 있는 이상 손을 쓰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성직자나 종교에 심취한 자들이 성국의 입장이나 움직임에 동조하지 못 하도록 간접적으로 통제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고, 루나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힘으로만 찍어누르는데 한계가 있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안소니우스의 움직임이 아직까지 잠잠한 편이라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안정적으로 상황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었다.

이건 모두에게 시간 싸움이었고, 수십 개의 시한 폭탄이 타이머를 째깍이며 종국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한폭탄이 터지는 시점은, 여전히 루나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

"..."

당장은 상황이 안정되었다.

그러니 첫 번째 폭탄이 터지기 전에 미뤄두었던 만남을 가져야겠다고, 루나는 결론내렸다.

차갑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가 황실 마탑이 존재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

마경과 인접한 전선에서.

한동안 마물이나 마족 따위와 피를 튀기며 전투를 수행하던 요하나는 루나에게 귀환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선에서 몸을 뺄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그다지 달가운 연락은 아니었다.

요하나는 마경과 인접한 전선에서 앞만 바라보고 검을 휘두르는 게 편했다.

이곳은 뒤통수를 맞을 걱정도 비교적 적었고, 명암과 선악이 분명했기에 검을 휘두르는데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전장에서 검을 휘두를수록 안색은 메마르고 피폐해져 갔으나, 어쨌든 요하나는 이곳이 좋았다.

"돌아... 오라고..."

휴식을 좀 취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일을 맡길 게 있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요하나는 전선에서 걸음을 돌렸다.

연락을 받고 황도로 돌아가는 길에서.

요하나는 엉켜 있는 목걸이를 품에서 꺼내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보석이 복잡하게 얽혀 꽃봉오리를 만들어내는 이 목걸이는, 품에 잘 넣어놓아도 조금만 격하게 움직이면 심각하게 엉켜버리고는 했다.

요하나는 자주, 하루 일과의 마지막을 엉킨 목걸이를 풀면서 보내고는 했다.

레이가 굳이 관리하기 불편한 목걸이를 선물한 것은 이 목걸이에 요하나가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하나의 시선은 여전히 자그마한 목걸이의 보석들과 함께 엉켜 있었다.

"..."

그렇게 요하나가 마차에 탄 채 목걸이를 풀고 있는 사이.

반대편에 앉은 쥬세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받은 쥬세핀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히죽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흥~ 흐흥~"

제국에서 입지가 좋았던 가문의 직계들은 현 제국에 굉장히 감정이 안 좋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다보니 믿고 쓸 수 있는 실력자가 굉장히 적었는데, 쥬세핀은 그나마 현 제국이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쥬세핀은 출신 가문 또한 한미했고 이지스 입학 전까지는 제국 중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쥬세핀은 전장에서 요하나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며 대외적으로는 빠르게 출세했으나, 출세했다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쥬세핀처럼 제국 주요 인사의 측근 역할을 하는 이들은 꽤 자주 암살 위협을 받고는 했다.

쥬세핀은 벌써 몇 번이나 '역적과 붙어먹었다'며 칼 들고 덤비는 이들과 마주친 경험이 있었다.

황도에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또 새로운 암살 위협에 시달리겠지만, 그럼에도 쥬세핀은 전장보다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훨씬 기대되는 듯했다.

"..."

요하나는 쥬세핀의 콧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 황도에 도착했다.

황도는 여전히 재건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재건이라기보다는 요새화에 가깝지 않아 싶었지만, 어쨌든 과거의 기능을 복구하는 것은 그리 원활하지 못 한 듯싶었다.

황도의 공기는 여전히 탁하고 씁쓸했다.

"...후우."

황도에 도착한 요하나가 한숨을 짧게 쉬었다.

황도에는 요하나의 마음을 번잡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게 해서 가슴을 옥죄게 만드는 존재들이 너무 많았다.

잠시 구역질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낀 요하나는 천천히 호흡을 다잡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황성 안으로 들어선 요하나가 복도를 걷고 있자니, 복도가 꺾이는 지점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숨어서 요하나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

요하나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다시 걸었다.

저벅 저벅 걸어 모퉁이를 도는 지점에 거의 도착한 순간.

모퉁이 옆에서 꼬물대던 인기척이 불쑥 튀어나왔다.

"와!"

"와...!"

인기척의 정체는 엘리와 카니아였다.

두 꼬맹이는 갑자기 튀어나오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는 요하나가 깜짝 놀랐으리란 기대를 내비치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

요하나는 아직 젖살이 빵빵한 두 꼬맹이를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

이제 다섯 살쯤 되었었나. 두 아이 모두... 레이의 아이였다.

요하나는 똘망똘망한 눈빛의 엘리와 카니아를 내려보며 자기 뺨을 잠시 매만졌다.

이 아이들은 요하나에게 때로는 비참함을, 때로는 초라함을, 때로는 위로와 추억을 건네주는 존재였다.

먼 옛날, 오늘과 같은 하루가 계속되리라 여겼던 그 철 없던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존재였다.

내가 얻지 못 하였고, 한때 막연하게 꿈꾸었던 그런 존재들을 바라보며... 요하나는 초라함과 아픔과 후회를 곱씹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두 팔을 벌린 채 꿋꿋이 자세를 유지하던 엘리가 불쑥 외쳤다.

"요하나 이모!"

아이씨.

이모라는 호칭에 요하나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야!! 내가 왜 이모야?!"

요하나는 엘리가 입에 담은 '이모'라는 호칭에 진심으로 짜증을 느꼈다.

요하나가 생각하기에 이모라는 호칭은 너무 늙어 보였다.

계속된 혹사 탓에 요하나의 몰골이 많이 초췌하긴 해도, 워낙 이른 나이에 높은 경지에 올라 겉모습은 여전히 소녀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요하나였다.

그런데도 엘리가 이모를 운운하자 요하나는 괜히 짜증을 느꼈다.

물론 요하나는 알레시아나 카렌과는 자매와 같은 관계에 가깝기는 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아이인 엘리와 카니아가 요하나를 '이모'라고 칭해도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하나는 이모라고 불리기는 확실히 싫었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편지에 분명 써놨지?!"

콩!!

"악!!"

요하나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엘리가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끙끙거리며 정수리를 열심히 비빈 엘리가 고개를 쳐들며 빽 소리쳤다.

"엄마한테 이를 거야!"

어쭈?

엘리의 시답잖은 겁박에 요하나가 쏘아붙였다.

"니 엄마보다 내가 훨씬 쎄거든?"

"...!"

예상치 못 한 요하나의 반박에 충격을 받은 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흐물흐물하게 변해 축 처졌다.

"울 엄마 너무 약해..."

"..."

얘는 왜 벌써부터 흐물거리냐.

요하나는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활개치고 다녔던 알레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알레시아는 두려울 것이 없는 필립스 백작령의 공주님이었다.

만날 천민 천민 노래를 부르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기도 했었다.

잠시 과거를 되돌아본 요하나가 축 처져있는 엘리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자꾸 까불래?"

"아우아우..."

복잡해 보이는 눈으로 엘리의 뺨을 매만진 요하나는 이내 웃음을 머금으며 두 아이를 안아 들었다.

"카렌이랑 알레시아는... 괜찮아?"

"응."

"응!!"

다행히 어디 다치거나 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카렌이야 여전히 음울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있겠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알레시아는 카렌보다 회복이 빨랐었다.

알레시아 또한 카렌 못지 않게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일어서서 꾸역꾸역 앞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요하나는 처음으로 알레시아에게 강인함을 느꼈었다.

"...이따 또 보자."

요하나는 두 아이를 적당히 달래서 내려놓고는 다시 혼자서 걸음을 옮겼다.

헌데, 얼마 안 가 요하나는 그다지 원치 않았던 만남을 가져야 했다.

"...폐하."

레아였다.

요하나가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레아를 확인하고 걸음을 멈추자, 레아가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요하나 언니... 잘 다녀왔어요?"

"...예. 폐하께서는 강녕하셨나요?"

"네, 저야 당연히..."

"다행이네요. 그리고 말씀 낮춰주세요."

레이의 혈육이자 레이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아이.

그리고, 레이가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게 한 원인.

요하나는 레아에게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하고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사실은, 쏟아내고 싶은 감정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억지로 눈을 돌리고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요하나는 레아를 향해 그저 웃음을 머금은 채 형식적인 예를 갖추고 지나치려 했다.

헌데 그런 요하나를 레아가 붙잡았다.

"오빠를... 보러 가요?"

"..."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요...?"

"..."

요하나가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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