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8화 (378/446)

외전 - 마찰 [2]

[10]

"그라니아?"

"예, 그렇습니다."

그라니아는 제국에 있어 가장 변방 지역 중 한 곳이었다.

그라니아에 있는 워프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다면 황도에서 왕복하기 쉽지 않았다.

잘못되면 고립될 수 있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나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없는 인물들을 절반 이상 파견했다.

그게 자신감의 발로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허나 기회는 기회였다. 루나가 신뢰할 수 있는 몇 없는 인물들을 뭉개버릴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생포하라고 하셨다고?"

"...혹여 마주치더라도 목숨을 거두지는 말아달라고 성녀님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

이해가 가긴 했다.

루나의 측근을 죽여버리면 바로 확전이다.

정면에서 부딪치면 가루가 되는 건 성국 쪽이었고 말이다.

인질의 값어치까지 있는 인물들을 죽이는 건 분명 헛짓거리였다.

"..."

남자가 손아귀를 으깨질 것처럼 강하게 말아쥐더니,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다 간신히 진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에 맞춰 '루체른'으로 집결시킬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

루나의 요청을 수락한 요하나는 그라니아로 향했다.

지미, 디디에, 데런, 그리고 헤이든이 요하나와 동행했다.

물론 다섯 명이 전부는 아니었다. 일행 중에는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문의 인물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요하나는 비밀스럽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럴 형편이 안 됐다.

현재로선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정보가 샐 게 뻔했다.

레아를 앞으로 내세운 루나가 제국을 제대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결국 요하나의 일행은 아예 공개적으로 일정을 잡고 움직이기로 했다.

황도를 떠나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요하나의 일행은 '루체른'이라 불리는 도시에 도착했다.

루체른은 제국 남부와 서부를 잇는, 일종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도시 중 한 곳이었다.

변방에 위치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크게 낙후된 도시는 아니었다.

요하나가 루체른에 도착하자 루체른의 행정을 담당하는 알리앙 자작이 요하나의 일행을 환대했다.

"반갑습니다."

알리앙 자작은 꽤 살갑게 요하나의 일행을 맞이했다.

허나 인사를 받은 헤이든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성국에 적을 둔 인사들을 직무에서 배제하고, 전부 내보내시오."

헤이든의 요구에 알리앙 자작은 그저 웃었다.

그러자 헤이든의 어조가 조금 더 강경해졌다.

"제국과 척을 질 생각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체른은 명실상부 제국령이며, 저 또한 제국에 충성하는 제국의 귀족입니다. 다만..."

숨을 길게 내쉰 알리앙 자작이 침중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어려운 시기이지 않습니까. 이런 시기일수록 믿음과 화합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도 제국은 교단을 품고 함께했거늘, 어찌 반목하려고만 드십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었으나 결국 성국에 협력하겠다는 소리였다.

헤이든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지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그리 나오면 재미 없을 텐데."

전혀 귀족 같지 않은 어투로 중얼거린 지미가 알리앙 자작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라니아에 연락해서, 피 보기 싫으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성국 녀석들은 알아서 자리 비워 놓으라고 해."

"..."

"그리고 루체른도 미적거리면서 간 보지 말고 확실히 '정리'해 놔. 우리가 그라니아에서 일 보고 돌아올 때까지 마무리지어야 할 거야. 역적으로 찍히기 싫으면."

"...!"

지미가 역적을 운운하자 알리앙 자작의 표정에 금이 갔다.

허나 금세 표정을 되돌린 알리앙 자작이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흠, 오해가 있으신..."

알리앙 자작은 조금 더 의논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헤이든은 2시간 뒤에 그라니아로 출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표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이들 또한 갈 길이 바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들이 전부 사라지자, 그제야 알리앙 자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비천한 놈이 감히..."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지미가 면전에서 시건방을 떨며 역적을 운운한 것만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역적 놈... 더군다나 못 배워 먹은 티가 줄줄 흐르는 천한 용병 놈에게 아양을 떨어야 했다는 게, 알리앙 자작에게 있어서는 쉬이 잊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 건방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보지."

*

루체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하나의 일행은 그라니아로 향할 채비를 서둘렀다.

상황이 급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루체른은 절대 요하나의 일행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괜한 불안을 감수해가며 루체른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요하나는 무장을 점검하며 지미에게 물었다.

"...루체른이랑 그라니아에서 성국 사람들이 얌전히 물러날까요?"

"내가 볼 때는 아니야. 물러날 거면 진즉 물러났겠지."

알리앙 자작의 언행을 보니 물러나기는커녕 대놓고 무력 충돌조차 불사하겠다는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겉으로 얌전한 척하는 것은, 상대가 먼저 주먹질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도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야 명분이 서니까 말이다.

"..."

이미 루체른은 성국의 세력권에 편입되기로 결정한듯 싶었다.

지미는 어째선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채 자기 뺨을 연거푸 매만졌다.

요하나는 그런 지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가요."

루체른에서 그라니아까지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요하나의 일행은 말에 올라탄 후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중간부터 정령의 도움을 받아 이동할 예정이었다.

"흠..."

데런은 말을 몰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도 인근에 존재했던 대도시보다는 훨씬 보잘 것 없었지만, 루체른도 볼거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도시의 사람들은 붉은 하늘 아래서 근심과 긴장을 떨치지 못 하고 표정을 굳히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데런은 루체른에서 생기를 느꼈다.

그때 지미가 데런을 불렀다.

"데런, 자꾸 여기저기 돌아보지 말고 앞만 봐."

"...?"

데런은 지미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미는 의아해하는 데런의 시선을 무시한 채 헤이든에게 짧게 물었다.

"일은 제대로 끝냈소?"

"시키신 대로 했지."

헤이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앞서 나갔다.

알리앙 자작은 친히 요하나의 일행을 배웅했다.

도시의 경계선을 넘은 직후, 요하나의 일행은 빠르게 그라니아까지 이동했다.

그라니아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에 모래가 섞였다. 눈이 따끔거리는 게 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천으로 얼굴을 둘둘 동여매고 바람 정령의 도움을 받아 나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니아가 지평선 너머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후우..."

지미가 눈가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이제부터 무력 충돌이 발생활 확률이 높았다.

역시나, 그라니아에 가까이 접근하자 수십 정도 되는 병력이 진을 친 채 대놓고 요하나의 일행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석적인 무력시위였다. 그들의 지휘관처럼 보이는 인물은 성검을 본뜬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고 신성력을 발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서로 대치한 채 기싸움이라도 좀 했겠으나, 요하나의 일행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지미가 명령을 내렸다.

"제압해. ...굳이 죽이지는 말고."

콰악!!

요하나가 가장 먼저 검을 뽑아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기싸움부터 할 생각으로 그라니아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성국의 병력들은 요하나의 일행이 갑자기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뭐 이런...!!"

이런 경우 없는 새끼들이 다 있나.

그 분통을 끝까지 내뱉기도 전에 서로의 병기가 충돌했다.

콰가가각!!!!

그라니아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성국의 병력들은 그 수준이 결코 높지 않았다.

그에 비해 요하나의 일행은 그래듀에이트에 고위마법사까지 존재했다.

수준 차이가 너무 났기에 요하나의 일행은 수월하게 적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해낼 수 있었다.

한편, 그라니아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국 소속의 마법사들이 우수수 무너지는 아군을 확인하고는 워프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럼 계획대로..."

마법사들이 워프게이트를 조작하기 위해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헌데 잠깐이면 끝날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 섬광이 떨어져 내렸다.

"?!"

콰아앙!!!!

섬광이 떨어진 자리에서 폭음이 일었다.

후폭풍에 밀려난 마법사들이 한참을 튕겨져나가 지면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검을 휘두르던 자들조차 뒷걸음질치며 상황을 살폈다.

섬광이 쏘아졌던 저 멀리서부터.

울트가 레시나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

"오랜...만이군."

울트가 요하나를 향해 떠듬떠듬 인사를 건넸다.

못 본 사이에 요하나는 인상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울트는 어색함과 심란함을 뒤로 미룬 채 안면이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울트가 간단히 예를 차리는 사이.

일방적으로 제압당한 성국 소속의 인물들이 몹시 분개한 기색으로 요하나와 지미, 그리고 울트를 향해 소리쳤다.

"이리 경우가 없을 수가!"

"제국을 자처하는 자들이 무력으로 핍박을 가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가?"

"엘프는 어찌하여 제국의 폭정에 협력하는가! 정녕 모든 엘프의 뜻이 그러한가?"

돌아가며 빽빽거리는 놈들을 두고 워프게이트를 살핀 헤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잠겨있군."

가동시키려면 최소 하루 이상 걸렸다.

그나마 울트가 중간에 개입하여 워프게이트가 완전히 봉인되는 것을 저지해서 그 정도였다.

"후우..."

지미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요하나의 일행은 이곳에 고립됐다.

요하나의 일행은 워프게이트 확보를 위해 무력 충돌까지 불사했다.

헌데 이곳을 지키던 성국 측 병력은 이상할 만큼 보잘 것 없었던 데다 워프게이트는 봉인되어 있었다.

결국 요하나의 일행은 불필요하게 선공을 가해서 상대 쪽에 명분만 내어주게 되었다.

"역시 함정인가..."

여기 있는 성국의 병력은 그냥 미끼였다.

진짜 성국의 본대는 지금쯤 루체른을 거점 삼아 병력을 움직이려 하고 있을 터다.

루체른과 반대 방향에 있는 사막의 거점 도시에도 성국이 심어둔 복병이 존재할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앞뒤로 포위당한다.

울트가 상황을 눈치채고 요하나의 일행들에게 피신을 권했다.

"엘프의 영역으로 잠시 피신하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현명해 보이는 선택지였다.

사막의 거점 도시에서 대기하고 있는 복병 정도야 엘프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었다.

허나 지미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묶여 있는 성국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새겨두었으면 좋겠어."

"...?"

"우리가 모시는 이는 그리 자비롭지 않다는 걸."

지미가 씁쓸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루체른이 존재하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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