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7화 (377/446)

외전 - 마찰 [1]

[9]

루나는 지도를 눈에 담지 않았다.

대륙의 지도 정도는 굳이 다시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머릿속에 재현해낼 수 있었다.

대륙을 전부 집어삼킬 것처럼 번져나오던 마경의 확장 속도는 다시 빠르게 감소하는 중이었다.

이는 세계수가 남은 역량을 다하여 대륙을 적극적으로 수호하기를 택했다는 걸 뜻했다.

어머니가 이 대륙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엘프의 긍지는, 결국 그릇되지 않았다.

곧 마경과 대륙의 새로운 경계선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균형이 무너진 이상 이 경계선은 과거보다 훨씬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계선을 방치한다면 마족들 하나하나가 침식의 매개체가 되어 마경을 확장시킬 터다.

마족들은 끊임없이 더 넓은 대륙으로 진출하여 종국에 대륙 전부를 뒤덮으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은 마경도 아니고 대륙도 아닌 그 경계썬에서, 무수한 투쟁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방어선을 구축하고 악신의 추종자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경 내에서라면 모를까, 마경 밖에서라면 대륙의 전력이 분명 우위였다.

대륙이 마경 원정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로 인해 고위 전력을 형편 없이 날려먹기는 했지만, 악신의 추종자들 또한 준 로드 급 이상의 전력이 박살 난 상황이었다.

현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전황을 뒤짚어 엎을 수 있는 독보적인 전력을 지닌 개체는... 안소니우스 정도였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악신들의 계약을 이끌어낸 유례 없는 최악이자 최강의 사도.

허나 그 타락한 사도는 교황청을 붕괴시킨 뒤 아직까지 움직임이 잠잠했다.

루나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상쇄가 불가능한 힘을 지니고도, 침묵하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버텨줄까..."

루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안소니우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품은 증오와 그가 품은 의지가, 과연 언제까지 안소니우스를 안소니우스로 있게 할 것인지는 루나 또한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 시점은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었고, 혹은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었다.

"..."

당장은 마경과의 경계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안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지리상 남부 방향의 방위는 스페라의 세력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방위에 나설 터다.

그 덕분에 제국은 부담을 덜었다. 전선이 넓긴 했으나, 일단 붕괴한 알리모에서 쏟아져 들어올 악신의 추종자들을 막아내는데 주력해야 했다.

루나가 현재 결론내려야 할 것은 스페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확장을 어디까지 용인해주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깔짝대며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은 당장은 적당히 겁박하고 찍어누르는 것으로 대처 가능했다.

허나 정면충돌을 감안해서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역이 있었다.

"...그라니아."

그라니아.

사막 외곽에 위치한 도시다.

루나는 레이와 함께 그라니아를 찾아갔었다.

"..."

그곳을 지나 엘프를 만나고 세계수를 만났다.

그리고 레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불태울 것이라 결심했다.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강하게 떠오른 루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

어쨌든.

그라니아는 황폐화된 도시였으나, 그곳에는 가장 중요한 전략 시설인 워프게이트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그라니아를 확보하고 있어야, '엘프'와의 교류 및 협력이 가능했다.

헌데 애초부터 제국 중앙의 영향력이 약했던 그라니아는 스페라의 성국에 협력하길 택했다.

그라니아뿐만이 아니라 남서부에 위치한 그 인근의 도시들은 본래부터 제국 중앙보다 남부와 친했고, 이제는 해당 지역이 통째로 스페라의 영향력 내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 지역이 생산력이 뛰어난 지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막화의 영향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그쪽을 내어주면 유사시 세계수의 영역에 지원을 파병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세계수의 수호를 스페라와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에게 믿고 맡긴다?

루나마저 조소를 머금게 할만큼 어이 없는 헛소리였다.

"...수복해야지."

기어오르는 것들에게 선도 그어줄 겸.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

"시간이 필요해."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요하나는 황좌에서 눈을 돌려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과거에 부족했던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저 너머에 닿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해."

저 너머에 닿는 것만으로 레이를 구할 수는 없다.

허나 레이를 구하기 위해서 저 너머에 닿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루나가 대륙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록 저 너머에 닿게 되는 시점은 늦어진다.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 더군다나 루나가 생각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세계수의 축복이 서린 대륙이 아니었다.

이건 서로에게 있어 시간 싸움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요하나."

루나가 다시 한 번 같은 부탁을 입에 담았다.

누군가는 루나를 대신해 피비린내가 가득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그 대리자는 루나가 신뢰할 수 있어야 했으며, 또한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재앙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야 했다.

요하나는 길고 긴 어둠 속을 걸어달라 부탁하는 루나를 마주보며 단 한가지만을 요구했다.

"약속, 지켜."

"...응."

그래, 그거면 됐다.

요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해?"

"그라니아."

"아, 거기?"

레이와 루나가 갔었던 곳이다.

레이를 따라가지 못 해 내심 섭섭한 감정을 품었던 곳이다.

언젠가 루나처럼 레이의 곁에 서고 싶다는 그 마음을,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 해 툴툴대게 만들었던 곳이다.

요하나는 그라니아에 존재하는 레이와의 작은 연결고리를 느끼며 약간의 만족감을 내비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준비하고 있을게. 알려줄 거 있으면 출발하기 전에 알려 줘."

요하나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다시 한 번 황좌를 돌아보고는 등을 돌렸다.

요하나가 자리를 비우자 루나가 제자리에 선 채 입술을 달싹였다.

"지미, 요하나와 같이 가 줘요."

"...그래."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던 지미가 한숨을 내쉬며 루나에게 물었다.

"위험한 곳이냐?"

"위험해요. 그러니까 요하나의 곁을 잘 지켜줘요."

단순히 전투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떤 놈이 등 뒤에서 칼을 꽂으려고 이빨을 들어낼지 모른다는 면에서 매우 위험했다.

차라리 이권이 걸린 일이었다면 미리 위험인자를 걸러낼 수 있을 텐데, 증오나 신앙에 빠져 있는 자들의 돌발 행동은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리고, 지미의 통찰력이라면 어쭙잖은 배신자들은 한 눈에 보고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랄 맞은 전장일 수록 지미의 통찰력과 경험은 빛을 발했고, 요하나는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루나가 지미를 바라보며 차갑게 주의했다.

"실패하지 말아요. 귀찮아지니까."

스페라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의 존속을 용인한 이상 이러한 마찰은 무조건 예견되어 있었다.

처음 확실하게 찍어누르지 못 하면, 그때부터는 아예 판을 다시 짜야 했다.

상황을 이해한 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니아의 워프게이트만 무사히 확보하면 되냐?"

"맞아요."

"하지만... 그라니아를 점거했는데 만약 워프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놨다면... 우리가 고립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건 괜찮아요."

그라니아만 확보한다면 인간뿐만이 아니라 엘프들의 협력도 쉽사리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 측에서 훼방을 놓는다고 워프게이트를 폭파시켜 놓기라도 한다면 요하나와 지미는 한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기는 했다.

주변 일대가 스페라를 추종하는 세력의 영향권인 이상, 정예병력이라 해도 소규모만 운용해 깊숙이 파고드는 건 많이 위험했다.

"어차피, 경고를 보내긴 해야했어요."

"...?"

의아해하는 지미에게 루나가 보석을 닮은 이십면체 형태의 아티펙트를 내밀었다.

지미가 아티펙트를 이리저리 매만져 보더니 루나에게 물었다.

"이건 뭐... 도망칠 때 쓰는 아티펙트냐? 아니면 사람이라도 부를 수 있어?"

"아니요."

루나가 건넨 아티펙트의 '원본'이라면 그런 것도 가능할 터다.

본래 에른스트가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은 스페라가 소유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그 아티펙트 말이다.

원본의 경우 특수한 권능이 깃든 드래곤하트가 사용된 정상급 아티펙트였고, 루나가 건넨 것은 원본이 지닌 성능의 반의 반도 구현하지 못 한 복제품이었다.

복제품을 제작하는데만 귀하디 귀한 자재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었지만 활용도가 전무한 결함품이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갖춰주어도, 찰나의 순간 생성된 불안정한 통로로 통과 가능한 물질의 사이즈가 과자 알갱이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루나에게 있어서도 이 아티펙트는 1회용 폭탄 이상의 값어치는 없었다.

*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대륙은 스페라를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을 성국이라 불렀다.

그리고 얼마 전, 제국이 처음으로 성국을 향해 분명하게 경고를 전달했다.

그라시아를 비롯한 남서부 일부 지역에서 손을 떼라는 경고였다.

워프게이트의 확보가 걸린 문제였기에 성국도 대충 양보하고 끝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물론 세력의 거대함에 있어, 성국은 제국에 비해 하찮기 그지 없었다.

대륙민들의 환심을 사는데는 성공한 성국이었으나 루나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성국이 박살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허나 성국에 속한 자들은 벌써부터 오만해져 있었다.

성국이 지닌 상징성을 침범하고 얼마 남지 않은 남부의 곡창지대를 잃는 것이 새로운 제국에게도 심대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세를 잡은 김에 그라니아와 워프게이트까지만 확보하여 명확하게 제국과 경계선을 긋자고, 그리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제국과 정면에서 기싸움을 하자는 그 선택은 합리보다는 광신에 치우쳐진 선택에 가까웠다.

성국이 목에 힘을 주자, 얼마 안 가 제국은 그라시아를 무력으로 수복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제국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는 성국에 쉽사리 들어왔다.

심적으로 제국에 반감을 지녔으며 성국에 호의적인 이들이 넘쳐나다보니 너무나 자연스레 정보가 샜다.

"요하나..."

스페라는 음울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나는 요하나를 비롯해 확실하게 신뢰 가능한 고위 전력을 움직여 그라시아를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과 무력 충돌을 끝까지 고집하고, 또한 제국을 엿 먹인다면...

루나가 훨씬 극단적인 수단으로 성국을 괴멸에 이르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스페라는 꿰뚫고 있었다.

그런 결말은 스페라의 입장에서, 썩 나쁘지 않았다.

"..."

어찌 대응할까 고민하던 스페라가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이르지."

광신이란 베일이 충분히 두터워져 안쪽부터 곪아가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니 벌써부터 대놓고 가시를 드러내면 안 됐다.

하지만 약간 등을 떠미는 정도는 괜찮을 터다.

"생존한 로얄가드 정도면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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