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6화 (376/446)

외전 - 대관식 [8]

[8]

대관식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남부에서부터 매우 충격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의 주인공은 스페라 프리슬란이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 받은 스페라 프리슬란은 혼돈에 빠져 방황하던 이들을 결집시키고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리고 악의가 번져나오며 마경이 확장되는 와중에도 수많은 피난민들을 이끌고 안전 지대까지 '무사히' 이동했다.

이 '무사히'라는 건 과장된 수식 같은 게 아니었다.

스페라는 정말로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은 무사히 안전 지대까지 대피시켰다.

"..."

성녀, 엘-람의 대행자, 남부의 수호자, 제국의 등불, 베르펜의 기적... 그 외에도 수많은 이명들이 스페라 프리슬란의 기적적인 위업을 상징했다.

스페라는 자신의 위업을 토대로 영향력을 급격히 확장시켰다.

그렇게 인근의 세력을 결집시킨 스페라는, 신성 교단을 재건하고 대륙을 뒤덮은 악의를 몰아내겠다고 천명했다.

수많은 이들이 스페라를 엘-람의 현신이라 추앙하며 눈물을 흘렸다.

성국(聖國). 스페라가 영향력을 확보한 지역을 벌써부터 그리 칭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을 향한 갈망이 강해지고, 광신에 불이 붙기 쉬운 법이었다.

"..."

현재 스페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침식이 빗겨간 남부의 곡창지대를 비롯해 몇 군데 핵심적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명분이나 혈통이나 상징성이나 전부 다 확실했기에 스페라를 향한 여론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신성 교단의 재건을 대대적으로 천명한 것이 스페라의 지위를 더욱 신성불가침하게 강화했다.

"..."

루나는, 찬탈자이자 학살자였다.

그럼에도 수많은 세력이 루나에게 굴종을 택한 것은,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거세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구심점이 등장했다. 루나와 스페라가 지닌 세력의 격차는 까마득했으나, 그럼에도 새로운 구심점의 등장은 모든 이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 작은 파문은 얼마든지 거대해질 수 있었다. 이미 루나에게 굴종한 이들도 다른 선택지가 나타난 이상 언제든지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세력과 기반이 없는 루나였기에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귀찮아 졌다.

당장에야 스페라의 세력이 하찮아 보여도 불안 요소가 증가할수록 루나는 황성에 발이 거의 묶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스페라를 향한 여론은 호의적이다.

뭐, 그런 여론 따위 무시하고 스페라의 세력을 괴멸시키는 것도 가능은 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간 얼마 남지 않은 곡창지대가 박살이 나고 루나를 향한 반감이 더욱 치솟을 확률이 높았다.

자원의 불필요한 소모로 인해 전황이 나빠지면 결국 루나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해야 했다.

그건 루나에게 있어 되도록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루나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수록, 레이에게 약속했었던 '해피 엔딩'은 늦어진다. 너무 늦어진다면 아예 불가능해졌다.

더군다나 루나와 레아에게 반감을 가진 이가 넘쳐나는데 황성을 자주 비우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

새로운 제국과 스페라의 세력은 양립 불가하다. 서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륙이 절멸의 위기에 놓인 현재,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충돌을 뒤로 미루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확장되는 마경을 옆에 두고 대규모 내전이라도 벌인다면 자멸한다는 걸 다들 빤히 아는 상황에서, 무리한 충돌을 감행하려 한다면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거셀 터다.

어차피 루나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기에, 삼파전 구도를 만들고 안정화시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게 정녕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삼파전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기적..."

스페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마경이 확장되며 마족들이 날뛰기 시작했으나, 그 끔찍한 마족들마저 스페라가 수호하고 있는 피난민들은 감히 해치지 못 했다.

스페라가 성검을 쥐자 엘-람께서 광휘를 일으켜 어둠을 불사르고 죄 없는 자들을 구원했다라...

웃기는 소리다.

마족들이 엘-람이 내린 광휘가 두려워 그들을 해치지 못 했다고? 그럴 리가.

그들은 빛을 증오하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페라가 아무리 엘-람의 축복을 몸에 둘렀다고 해도 그곳에서 피난민을 대피시키려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혈투를 벌여야 했다.

하지만 스페라는 말 그대로 기적을 이루었다.

루나는 남부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취합하며 일련의 사태를 덤덤하게 평했다.

"...독을 풀었군."

이건 기적으로 포장된 극독이었다.

대륙을 내부에서 좀 먹기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종양이었다.

그리 결론내린 루나가 은색 눈동자를 어둡게 침전시켰다.

스페라가 일으킨 기적은 루나를 충분히 거슬리게 했지만, 또한 루나에게 '확신'을 부여했다.

내가 향하는 방향이 옳다는, 그런 확신을 말이다.

루나가 침묵을 이어가던 무렵.

헤이든이 루나를 찾아왔다.

헤이든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았다.

벌써부터 스페라의 약진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물론 헤이든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건 루나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헤이든은, 루나의 분노가 너무 파괴적인 형태로 표출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루나가 자신에게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면, 장기적으로 루나 개인은 무사할 수 있을 테지만 대륙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헤이든의 염려를 읽어낸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하지 마."

"...?"

"불필요한 학살은 지양할 거야. 나는, 착한 마법사가 될 테니까."

헤이든은 그게 꽤 세련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

기적을 일으킨 후.

스페라는 인근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는 물론이고 학식 있는 귀족들 또한 엘-람의 대행자라 여겨지는 스페라의 목소리에 이끌렸다.

정확한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자들은 스페라에게 협력하는 것이 자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허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와 현명함을 지닌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로는 스페라와의 협력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자들도, 스페라가 이루어낸 기적을 목도한 후 이성과 실리 따위를 '믿음'보다 앞세우기 쉽지 않았다.

스페라는 당연히 루나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루나가 직접 움직인다면 이곳도 얼마 못 가 붕괴할 터다.

허나 이 근방에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루나가 스페라를 직접 찾아오기 위해서는 황성을 이틀은 비워야 했다.

루나는 내부 단속에 한계를 느낀 탓인지 일단 스페라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당장은 루나가 관망을 택했다고는 하나 언제 머리 위에 불덩이가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스페라는 아주 당당하게 자기 행보를 이어갔다. 그녀의 자신감이 사람들을 더욱 끌어모았다.

영향력이 강화될수록 스페라는 자신의 권위를 명확히 정의내려야 했다.

"우리도 할까?"

저쪽도 대관식을 치렀다고 하니 우리도 대관식 한 번 치르자.

스페라는 참 가볍게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물론 스페라는 왕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어둠이 걷힐 때까지 엘-람의 대행자이자 선지자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할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스페라의 대관식은 그리 포장되었다.

레아가 치렀던 보잘 것 없던 대관식과는 다르게, 남부에서 진행된 스페라의 대관식은 경건함과 광휘가 가득했다.

대관식이 시작되고, 스페라는 미리 제작되어 있던 관 앞에 가서 섰다.

으레 대관식은 특정한 권위를 대행하는 자가 무릎을 꿇은 계승자의 머리에 관을 씌워주었다.

허나 엘-람의 대행자를 자처하는 스페라를 감히 무릎 꿇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대행자이자, 선지자이자, 지도자로서 아주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자기가 직접 관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씌운 것이다.

그건 참으로 오만한 행위였으나 그 누구도 스페라의 오만을 지적하지 않고 도리어 감격하고 기뻐했다.

환호 속에서.

스페라는 관의 무게를 느끼며 얼마 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

무너진 교황청에 묻혀 있던 성검을 손에 쥐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숨이 막힐 만큼 끔찍하고 강렬한 증오를 품은 '그것'이 스페라를 찾아왔다.

그것은 빛을 증오했고 빛을 몸에 두른 스페라를 증오했다.

"..."

스페라는 그것과 마주쳤을 때의 섬찟함을 되새기며 자기 목을 매만져 보았다.

그것은 그때 세상을 뒤덮을 만큼의 증오를 쏟아내면서도 스페라의 목을 베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베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거지."

스페라의 입꼬리가 잠깐 뒤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스페라는 두 눈을 개안시킨 채 성검을 바라보았다가, 대관식에 참석한 이들을 향해 성검을 들어올려 찬란한 광휘를 비춰주었다.

대관식의 환호가 한 층 더 거세졌다.

*

모든 게 마무리 된 줄 알았다.

사명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평화롭게 영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과거의 모습으로 역행하려 하고 있었다.

"..."

세계수의 축복이 가득한 엘프의 영역 안에서 울트는 레시나를 바라보았다.

레시나를 괴롭히던 저주는 이제 사라졌으나 레시나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교황청이 붕괴하고 악신의 축복이 대륙을 침식하기 시작했기에, 대륙이 완전히 악신의 축복에 뒤덮이는 걸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 세계수의 부하를 나누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레시나가 견뎠던 역할이었다.

레시나는 간신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그 끔찍한 굴레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목을 옥죄는 것을 두려워 했다.

울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 불안을 함께 곱씹던 울트와 레시나에게, 세계수의 수호자 중 한 명인 아퀴타스가 찾아왔다.

"레시나, 인간, 따라와라."

"..."

울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시나와 함께 아퀴타스를 따라 움직였다.

레시나의 곁에 바짝 붙어 움직이던 울트는 답답함과 껄끄러움을 참지 못 하고 아퀴타스에게 물었다.

"레시나 님은 사명에서 해방되신 것 아니었나?"

"..."

아퀴타스는 아주 옅게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가, 불안해 하는 레시나를 보고는 울트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챘다.

"레시나에게 부여됐던 사명은 이제부터 내가 이행할 것이다."

"뭐라고...?"

"레시나의 육신은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나약해졌다."

덤덤하게 울트의 오해를 풀어준 아퀴타스가 다시 앞서 걷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인간,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서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라."

"...?"

"어머니는 이 대지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그것만은 의심치 마라."

다른 침략자들과는 다르게, 어머니는 이 대지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그것만은 분명한 진실이었으며, 또한 아퀴타스를 비롯한 엘프의 영원한 긍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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