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대관식 [7]
[7]
디오리카가 가문을 대표하여 황도를 방문했다.
다른 이를 보내라고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었으나 디오리카는 굳이 가주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황도에 방문한 디오리카는, 앞으로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세리아와 재회할 수 있었다.
"...세리아 경."
세리아는 이제 알슈테인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디오리카는 낯선 호칭으로 세리아를 불렀다.
디오리카는 세리아를 마주보기가 참... 어색했다.
당장 세리아를 앞에 두고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디오리카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
얼마 전 디오리카는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서 세리아의 처형을 막았다.
루나 또한 이를 호의를 베풀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세리아의 마음은 다를 수도 있는 법이었다.
세리아는 현재 힘줄과 코어가 손상되어 장시간의 재활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가해를 가한 것은 알슈테인 공작가였다.
이에 대한 증오나 원한을 세리아가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
세리아는 디오리카와 재회한 후에도 말 없이 창문 너머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씁쓸한 불편함 속에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
"이번에도."
디오리카의 말을 잘라낸 세리아는 여전히 창문 밖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곁에 있어주지 못 했어."
"..."
디오리카는 한숨을 삼켰다.
세리아의 과거를 알고 있는 디오리카는 세리아를 동정했지만, 그렇다고 제국을 망가뜨린 원흉의 죽음에 함께 슬퍼해 주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디오리카는 형식적인 호응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유감입니다, 세리아 경."
"곧 태어나."
"...?"
"조카의 아이."
"..."
"그 아이들의 곁에 있을래. 그냥... 그러고 싶어."
"..."
디오리카는 재차 한숨을 삼켜야 했다.
생전에 레이는 세리아를 향해 조카에게 얽매이지 말고 세리아 본인의 삶을 살아달라 부탁했었다.
헌데 레이는 그런 부탁을 입에 담아놓고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죽음을 택했고, 결국 세리아를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 처박았다.
디오리카는 역시나, 레이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 줄 수가 없었다.
"..."
디오리카는 세리아가 바라보던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하늘이 붉어진 이후로 시간의 흐름이 과거보다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음을 문득 자각한 디오리카가 입을 열었다.
"세리아 경, 이제 일어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일정이 다가오고 있으니 미리 채비를 해놓아야 했다.
세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디오리카를 마주보고는, 옅게 불만을 드러냈다.
"평소처럼 불러."
"평소처럼..."
디오리카에게는 곤란한 요구였다.
허나 듣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디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모님."
세리아가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붉은 하늘 아래서.
제국의 대관식이 치러졌다.
제국의 대관식이라기에는 너무나 수수하고 조용한 대관식이었다.
대관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굳은 표정을 잘 지워내지 못 했다.
얼마 안 가, 황성에서 대관식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천진난만할 시기의 어린 아이였다.
그 아이가 대관식의 주인공이었고, 또한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염색을 지워내고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레아를 향해 루나가 무릎을 꿇었다.
"이제 당신이... 제국의 주인입니다."
루나가 레아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붉은 하늘 아래서 치러지는 대관식은 레아를 위해 준비된 어른들의 연극 놀이 같았다.
허나 그토록 콧대 높은 귀족들이 함께 어울려주고 있음에도 레아는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레아는 일단 루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서도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레아가 찾는 오빠는 영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레아는 손가락을 꼬물대면서 오빠에 대해 물어봐도 되는지 루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
간소화시켰다고 해도 대관식을 몇 분만에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대관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관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참여자가 예상보다 적다.'
대륙에는 새로운 황제를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이들도 존재했다.
비굴하게 기어봤자 반드시 숙청당할, 황도를 점거한 찬탈자들과는 결코 양립이 불가한 세력이 분명 존재했다.
그들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으리라는 건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헌데 그들 외에도... 회색지대에 놓여있다고 평가받던 세력들 중 상당수가 황도에서 열린 대관식에 가문의 대리인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의아한 일이었다.
설령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해도, 일단 대관식에 사람을 보내 간을 보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건 새로운 황제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고, 이는 결국 루나와 적대하겠다는 걸 의미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대륙이 유례없는 절멸의 위기를 맞이한 이때, 대체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지를 고른단 말인가.
갑자기 단체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이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세력들을 하나로 끌어모은 '구심점'이 존재함을 의미했다.
대관식에 이는 잔잔한 동요를 감지한 루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너희만이 아니지."
루나가 지닌 맹목과, 루나가 지닌 불가해한 재능은 별빛 너머의 영역에까지 일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제 별빛 너머에서 루나를 적대하는 것들은 '악신'으로 분류되는 존재들만이 아니었다.
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스페라는 아도이아의 의견에 따라 남부로 오게 되었다.
황도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 들은 스페라는, 남부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힘들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봤자 얻을 게 있을까 싶어 스페라는 더욱 멀거니 시간을 보냈다.
제국의 황도를 붕괴시킨 원흉이 악신의 사도라도 되었다면 타오르는 증오를 품고 일어섰겠지만...
아도이아에게 황도에서 발생했던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페라는 자신이 대체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하는가조차 잘 알 수가 없었다.
스페라에게는 방황할 시간이 필요했다.
허나 세상은 잠깐의 방황조차 스페라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
거대한 굉음이 교황청 일대를 울렸다.
교황청이 통째로 붕괴했고, 거대한 전투의 후폭풍이 거쎄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로드 급에 이르는 강자들의 부딪침이 잦아든 뒤에도, 무언가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굉음은 계속해서 귓가를 울렸다.
남부에 집결했던 병력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도이아는 스페라에게 우선 피난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스페라는 귓가를 울리는 굉음을 들으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물에 붉은 물감을 조금씩 풀어 넣은 것처럼, 하늘에 옅은 붉은색이 번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지나가듯 경고했던 광경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스페라가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걸을게."
스페라가 향하는 방향은 무너진 교황청이 있는 곳이었다.
아도이아는 스페라를 말리지 않고 함께 걸었다. 아도이아는 어디까지나 조언을 하는 역할일 뿐, 선택은 스페라의 몫이었다.
"..."
스페라는 오랜만에 걸음을 옮기며 고민했다.
인간의 삶은 무언가를 지향하기에 의미를 갖는다.
스페라가 이 역경 속에서 다시 일어설 의지를 움켜쥐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향점을 품어야 했다.
헌데 대체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원한과 복수... 검술의 계승... 귀족으로서 부여받은 사명...
내세울 건 많았으나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스페라를 뒤덮은 끔찍한 허무감은 강렬했을 증오마저 빛이 바래게 했다.
이 끔찍한 현실을 되돌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존재했다면 오직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해 삶을 헌신했겠지만...
스페라가 꿈꾸는 희망 같은 건 불가능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
이미 세상은 이토록 뒤틀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는데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도 부질 없는 짓일 터다.
허나 스페라가 그걸 모를 만큼 우둔해서 지금까지 방황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는 사이 너무도 변해버린 세상을 마주하며, 스페라는 결국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삶을 이어갈 의욕을 느끼기가 힘들다.
허나 삶을 포기할 수 있다면, 무언가는 붙잡아야 했다.
스페라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며 추억으로 남은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요하나와 레이와의 만남은 스페라의 삶에 나이대에 걸맞는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허나 그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스페라는 본디 정점에 닿기 위해 제련된 존재였다.
스페라는 정점을 추구해야 했고, 무력함을 혐오해야 했다. 그렇게 제련된 존재였다.
그런데, 레이와의 만남이 스페라를 바꾸었다.
생전 처음으로 넘지 못 할 재능의 격차를 마주한 스페라는 평생을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강박을 내려놓았고, 에른스트 또한 그런 손녀의 선택을 나무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스페라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강박뿐이었다.
"하하..."
뒤틀려버린 세상을 바로잡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뒤틀린 세상에 무력하게 휩쓸려 땅을 기어다니는 꼴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굴욕을 감내할 바에, 차라리 세상과 함께 뒤틀릴 것이다.
세상을 뒤트는 주체가 되어서라도 정점에 올라 모두를 내려다볼 것이라고...
스페라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좋아."
스페라는 여전히 허망함에 절여진 표정으로, 그럼에도 두 눈동자에 열기를 담아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어울려줄게."
스페라는 어느새 무너진 교황청 앞에 다다라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지하까지 가라앉은 교황청 내부에는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스페라는 지각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인간의 영육과 광신으로 주조된 신화적인 병기와, 대륙을 정화하기 위해 소모된 수많은 소모품의 잔흔들이었다.
그리고, 흩뿌려져 있는 소모품의 살덩이에 기적이 깃들었다.
쩌엉!!!!!
부서진 성녀의 찌꺼기를 매개로 지상에 닿은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이 침묵하던 성검을 재활성화시켰다.
무너진 교황청 심부에서 빛이 터져나왔고, 그 직후 광휘에 휩싸인 성검이 지상을 향해 치솟았다.
허공에 떠오른 성검을 바라보며 스페라의 입꼬리가 더욱 뒤틀렸다.
성검이 주인을 선택하는 절차와 조건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가 대체 얼마나 막대한 출혈을 감내했기에 현실 차원에 이토록 극단적인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알 방도는 없었지만, 적어도 스페라는 지금의 기적을 일으킨 존재가 얼마나 조급해하고 있는지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콰악!!
성검을 거칠게 낚아챈 스페라가 두 눈동자를 개안시켰다.
"어디 들어볼까."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두 눈동자가, 성검 너머에 비치는 엘-람의 편린을 마주 보았다.
"무엇이 두려워 나를 이리 급하게 선택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