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4화 (374/446)

외전 - 대관식 [6]

[6]

터엉!!!

검강이 맞부딪친다.

지미는 검을 맞댄 충격을 옆으로 흘려내며 뒤로 미끄러졌다.

사각에서 지미를 노리고 쏘아졌던 검기가 지미의 코끝을 스친 순간, 이번에는 뜨거운 열기가 지미의 머리 위를 덮쳤다. 마법이었다.

콰아아앙!!!

지미는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아티펙트를 내던져서 쏟아져 내리는 불덩이를 막아냈다.

아티펙트가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지 못 하고 바스러지는 사이, 지미는 곧장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사방에 피어오른 불길이 잠시 지미의 뒷모습을 가려주었다.

"후우... 후우..."

지미가 옆구리의 자상을 짓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황성을 무사히 지켜내기에는 침입자들과 전력 차이가 너무 컸다.

그나마 이번 공격이 급조된 습격이었기에 침입자들 간의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한꺼번에 밀고 들어왔으면 답이 없었겠어.'

지미를 비롯한 '반역도'들은 흩어져 있는 침입자들을 각개격파하거나 치고 빠지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러한 전술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개격파 당하던 침입자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후 서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는 시간을 끄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후우... 후우..."

현재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들의 전력이라 해봤자 기껏해야 그래듀에이트 급 둘과 엑스퍼트 급 몇 명이 끝이다.

완연한 열세 속에서 지미는 계속해서 후퇴하면서도 최대한 침입자들의 전진을 지연시키려 했다.

지미는 정말 필사적으로 침입자들을 물고 늘어졌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여기서 더 물러날 수는... 없어.'

도주하던 지미가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더욱 굳혔다.

지금보다 더 물러났다가는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이들이 전투의 후폭풍에 휘말릴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지미에게 있어 사수해야 하는 한계선이었다.

"..."

곤경에 처한 지미가 다리를 멈춰선 채 어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순간.

침입자들의 시야를 잠시 혼란시켰던 황성의 내부 결계가 깨져나갔다.

쩌엉!!!!!

깨져나간 결계 너머로 검강을 발현한 침입자가 지미를 향해 다가갔다.

지미는 일대일이라면 지금 다가오는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또다른 침입자들이 이곳에 당도할 게 분명했다.

검 자루를 만지작거린 지미는, 결국 물러나지 않고 검기의 다발로 검신을 옭아맸다.

콰가가각!!!

지미가 침입자와 검을 맞댔다.

지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공세를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침입자가 한 명이라도 더 이곳에 도달하는 순간 목이 날아갈 사람은 지미였다.

지미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로 자기 삶의 끝자락이 될 수도 있겠다고 되뇌었다.

불길한 예상을 긍정하듯 가까운 거리에서 침입자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헌데 그 찰나.

거대한 진동이 지면을 울렸다.

쿠웅!!!!!!!

"..."

"..."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공명을 영맥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극히 한정됐다.

루나. 그녀가 황도에 돌아왔다. 이는 침입자들에게 있어 제한된 시간이 모두 지났음을 의미했다.

침입자들은 루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목적을 완수해야만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지미와 검을 맞대고 있던 침입자가 천천히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듯 얼핏 덤덤해 보이는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고는, 지미를 다시 마주 보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

"네놈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끔찍한 재앙을 불러온 것이냐."

죽음을 앞둔 침입자는 하다못해 대륙을 비탄에 잠기게 한 이들의 목적이라도 명쾌하게 들어보고 싶었다.

허나 불행히도 지미는 침입자의 소박한 바람을 이뤄줄 수가 없었다.

"글쎄..."

잠시 멀거니 선 채 침묵한 지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풍파에 휩쓸려 열심히 발버둥친 종착점이 결국 이곳이더군."

참 빌어먹을 일이야.

지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

루나가 알리모에서 귀환하였다.

황실 마탑의 소요 사태는 일단 가라앉았고, 황도를 급습한 침입자들도 목적을 이루지 못 했다.

지미와 요하나를 비롯해 황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은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루나가 황실 마탑의 협조를 얻어 데려온 성직자들이 마뜩잖다는 기색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일이 좀 정리되고 나자, 루나를 따라 황도에 재차 방문한 헤이든이 황성에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메테오를 이 이상 활용하면 '대륙'이 버티지 못 할 겁니다."

물론 메테오를 수십 번 떨어뜨려도 대륙이 통째로 가라앉을 일은 없다.

허나 대륙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땅덩어리만큼 단단하지 못 했다.

"자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마경이 확장되며 제국 남부의 곡창 지대가 박살이 나는 중이었다.

이미 식량을 비롯한 물자 문제가 가시화되고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질 터다.

헌데 메테오는 그 파괴적인 위력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야기했으며, 메테오의 후폭풍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 중에는 기후 변화 또한 존재했다.

600년 전 리실로테가 메테오를 두 번 사용했을 때도 기후 변화가 발생해 대륙의 식량 생산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었다는 연구 결과가 남아 있었다.

현 시점에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면 한두 명 죽고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마경 확장에 의한 곡창 지대 상실과 붉은 하늘의 악영향, 그리고 기후 변화의 타격까지 겹치면 대륙의 식량 생산량이 반의 반의 반토막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인류의 절반 이상이 굶어 죽어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인류가 국가 단위의 집단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군주가 집단의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최소한의 인프라와 자원 생산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에 반해, 악신의 추종자들은 이런 제약에 있어 훨씬 자유로웠다.

'집단의 통제력을 상실한 채 마족들과 수십 년 단위의 장기전을 치르는 건 불가능할 터.'

일단 헤이든의 상식으로는 그러했다.

물론 루나가 헤이든의 조언을 무시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이든이 자신의 생각을 밝힌 후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루나가 짧게 답했다.

"알아."

루나도 알았다.

현재로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메테오의 활용은 대륙에게 더 독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루나가 알리모에서 메테오를 구현한 것은 짧은 시간 안에 마족들의 전진을 지연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륙의 다른 이들에게 명확한 '존재감'과 '메시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목적은 이뤘어."

황도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루나'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 전까지 의구심을 품는 자들이 많았다.

불가해한 역량을 지닌 마법사가 아무 전조 없이 등장해 황도를 파괴했다는 소식은 쉽사리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루나'라 칭해지는 존재의 실체나 역량에 대해 여러 뜬소문이 대륙에 돌고 있었다.

허나 루나는 알리모에 직접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유언비어를 완전히 짓밟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마경이 확장된다.

알리모는 이미 멸망했고 대륙 절반이 마경화될 터다.

멸절의 위기 앞에서 황실 마탑이 루나에게 협력하기 시작했고, 루나는 단신으로 끔찍한 파괴를 행할 수 있는 불가해한 존재였다.

또한 루나가 황도를 비운다고 해도 어설픈 특공으로는 황도를 탈환하는 것이 힘들다는 게 일련의 사태로 증명됐다.

그로 인해 드디어 '새로운 황제'를 모셔야 한다는 디오리카의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대관식, 준비해."

이제는 대륙의 모두가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 선택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선택을 망설이기에는 이미 하늘은 너무나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 일정이 대륙 전역에 공표되었다.

제국의 남부가 무사했다면, 그리고 마경이 확장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대륙의 모두가 대관식을 치르겠다는 루나의 선언을 비웃고 지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대관식을 치르겠다고 선언하자 호응을 보내는 제국의 귀족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륙의 정세는 여전히 살얼음판과 같아 언제든 무너져내릴 것처럼 불안정했으나 단 하나만은 명확했다.

이제 대륙의 정세를 주도하는 건, '루나'라고 불리는 단 한 명의 마법사였다.

"..."

루나가 탁자 위에 놓인 자그마한 관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루나는 오래도록 침묵한 채 레이가 내린 마지막 선택을 돌아보았다.

'레아'를 구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도... 그날 레이에게는 분명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갈림길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레이는 그날 어설픈 희망과 낙관에 기대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끝난 뒤에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이 세상에 서 있을 곳을 남겨주기 위해...

레이는 이제까지 세상에 베풀었던 모든 기적을 스스로 거둬가고자 했다.

"..."

레이는 그날 안소니우스에게 성검을 되돌려주며 안소니우스의 상징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진실을 안소니우스에게 고백하며 사령검을 함께 건네주었다.

레이의 그 선택이, 인류의 구심점 중 하나였던 교단의 중심부를 붕괴시키고 긴 시간 동안 대륙을 지켜주었던 시스템을 파멸시켰다.

"..."

레이는 안소니우스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변수들까지 전부 완벽하게 예상하고 계산하지는 못 했을 터다.

레이에게는 다행히도, 대륙의 운명은 레이가 유도하고자 했던 방향으로 흘렀다.

대륙은 유례없는 절멸의 위기를 맞았다.

제국이 무너졌고 신성 교단이 붕괴했다.

별빛 너머 초월적인 존재들의 악의를 끌어안은 최악의 사도가 탄생했고, 마경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끔찍한 악몽이 목을 졸라오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

인류에게 남아 있는 로드 급은 이제 루나 하나였다. 루나가 유일했다. 레이가 그렇게 만들었다.

레이는 그렇게 해서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을 향한 복종을, 그리고 생존을 위한 굴종을 강제하려 했다.

그게 오직 단 한 사람의 소망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가며 그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

루나의 앞에 놓인 '레아를 위한 관'은 레이가 선택한 결말의 종착점이었다.

루나는 그 자그마한 관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레이... 이제 만족하나요...?"

공허한 물음은 다른 이에게 전해지는 일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루나가 관을 손에 쥐고 걷기 시작했다.

레이가 선택한 종착점은 이곳이었다.

그리고 루나가 선택한 종착점은, 조금 더 오랜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붉은 하늘 아래.

곧 새로운 황제를 위한 대관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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