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3화 (373/446)

외전 - 대관식 [5]

[5]

루나가 알리모로 움직일 것이라는 정보가 유출됐다.

루나가 황성을 비운다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얼마든지 황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허나 그 틈을 노리고 여러 세력이 협력하여 조직적으로 기습을 감행하기엔, 루나가 알리모로 향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쳤다가는 언제 다시 황성을 탈환할 수 있을지 몰랐기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이들도 존재했다.

그로 인해, 루나가 황도를 떠난 순간 각기 다른 세력에 속한 집단이나 개인이 서로의 존재도 확인하지 못 한 채 우르르 급습을 감행했다.

급습을 감행한 이들의 동기나 목적은 조금씩 달랐다.

다만 황도를 점거한 반역도들을 반드시 척살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의견이 일치했다.

콰아아앙!!!

황도의 곳곳에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도에 들이닥친 침입자들의 숫자는 최소 수십에 이르렀다.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황도와 황성의 방위 시스템으로는 침입자들을 제대로 저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시간을 조금 끌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결국 침입자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검을 맞대고 전투를 치러야 했다.

"..."

수적으로는 황성을 점거하고 있는 '반역자'들이 침입자들에 비해 한참 열세였다.

어리거나 경험이 적다고 뒤로 물러나서 보호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데런 또한 무장을 갖추고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방위 시스템의 기능 몇 개가 작동하는 덕분에 침입자의 대략적인 위치는 전달받을 수 있었다.

황성의 동쪽으로 움직인 데런은 얼마 안 가 복도 한가운데서 침입자 한 명과 마주쳤다.

갑주를 착용한 침입자는 데런과 마주치자마자 검을 휘둘렀고, 데런 또한 물러서지 않고 침입자와 충돌했다.

카가각!!

서로의 검기가 맞부딪치며 거칠게 진동했다.

검을 감싸고 있는 검기의 위력은 서로 비등했다.

상대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한 데런과 침입자가 코어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검기의 위력을 강화했다.

카가가가가각!!!

무자비하게 상대의 살갗을 갈라내기 위한 검격이 연거푸 맞부딪친다.

자비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은, 어떻게든 상대의 목을 잘라내기 위한 격돌이었다.

격돌이 이루어진 직후에는 데런이 약간의 우세를 가져갔다.

침입자는 과하게 흥분한 탓인지 동작이 필요 이상으로 거칠었고, 데런은 그 허점을 차분하게 파고들고자 했다.

처음에는 분명 데런의 노림수가 잘 먹혀드는 듯했다.

하지만 전투가 길게 이어질수록, 도리어 침입자가 데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카가각!!

"후욱! 흡...!"

검기가 충돌하며 섬광을 쏟아낼 때마다 자꾸만 데런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데런이 그려내는 검의 궤적 또한 난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흐트러진 호흡을 신속히 안정시키고 차분함을 되찾아야 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상대의 검술을 파악해서 전투의 흐름을 다시 끌어와야 했다.

그래야만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데런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데런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만 더욱 급급해졌다.

"흐읍! 헉!"

데런은 이제까지 익힌 검술을 제대로 활용하기는커녕 겁먹은 아이처럼 움츠러들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교육 기관인 이지스에서 훈련 받은 생도라기엔 데런이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끄윽...!"

이 전투는, 데런에게 있어 사실상 첫 실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데런은 지금 이 순간 생전 처음으로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첫 실전에서 지나치게 긴장하여 제 역량의 반의 반도 보여주지 못 하고 고꾸라지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했다.

하지만, 데런이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형편없이 무너지는 건...

결코 첫 실전의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헉! 허억!"

카각!!

검격이 맞물리며 섬광이 번쩍인다.

그리 검을 맞댈 때마다 데런은 상대의 격양된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분노, 원망, 증오, 혐오, 그리고... 확신.

내가 지금 행하는 투쟁이 명예롭고 정의롭다는 확신.

그 올곧고 견고한 확신이 침입자의 눈동자에서 형형히 빛나며 데런을 향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의지를 마주하기가 데런은 너무나도 힘겨웠다.

카가가각!!!

전투의 균형추는 계속해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결국 침입자가 일방적으로 데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이는 데런을 앞에 두고, 침입자는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격분을 목소리에 담아 쏟아냈다.

"이 추악한 변절자가...!!!"

"..."

침입자의 격분은 깊고 짙었다.

그 격분에 짓눌릴수록, 데런은 나아갈 길을 잃고 헤맸다.

추악한 변절자. 데런은 그러한 모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데런은 그저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영웅을 믿고 따랐을 뿐이었다.

레이. 데런이 가장 믿고 따르던 자. 그는 분명 영웅이었다.

그는 데런의 영웅이었고, 제국의 영웅이었으며, 더 나아가 대륙의 영웅이었다.

역사에 새겨져 오랜 시간 칭송될 위대하고 위대한 영웅이었다.

분명, 분명 그럴 터였는데...

"..."

이곳은 제국의 황성이다.

황성을 나서면 쑥대밭이 된 황도가 보였다.

황도를 벗어나면 잿더미가 되어 무너져 있는 도시들이 보였다.

그 끔찍한 풍경을 피해 고개를 쳐들면 붉게 물든 하늘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추억 속에서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검붉게 눌어붙어 매캐한 연기만을 피워내고 있었다.

"..."

이 모든 재앙은 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이 끔찍한 학살의 책임을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리고 대체 어째서... 고결함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기사가 선명한 살의와 혐오를 품고 내게 검을 휘둘러 오는가.

데런은, 그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꾸득!

자세가 계속 흐트러진 탓에 무릎이 뒤틀렸다.

완전히 균형이 무너진 데런이 비틀거리자, 침입자가 곧장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데런을 찍어 눌렀다.

콰각!!!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네놈들을 전부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반드시...!!"

끄드드득!

침입자의 검이 데런의 검을 밀어내며 데런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갈라진 어깨에서 튀어나온 피가 데런의 뺨을 때렸다.

"..."

데런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침입자를 마주 보았다.

데런은 상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정녕 대륙을 비탄에 빠트린 재앙의 추종자라 생각되느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어깨가 찢어져나가고 있음에도 데런은 그게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데런이 마른 입술을 움직이기 전.

두 사람의 전투에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다.

콰각!

기척 없이 휘둘러진 검격이 침입자를 쳐냈다.

간신히 기습을 막아낸 침입자가 일단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기습을 가했던 요하나는 침입자가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침입자는 한 손으로 휘두른 요하나의 공격을 쉽사리 쳐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콰앙!!!

요하나가 검신에 파인 구멍 속의 마나를 폭발시켜 검을 가속시켰다.

허를 찌르는 쾌속한 강격이 침입자를 찍어눌러 균형을 무너뜨렸다.

공격을 받아낸 충격을 해소하지 못 한 침입자가 몸이 굳어버린 순간 요하나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파스스!

요하나가 움켜쥔 허공에서부터.

제국의 신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자가 제국의 신검을 알아보고는 격분했다.

"네년이 감히...!!!!!!"

침입자는 요하나를 찢어 죽일 기세로 고함을 토했다.

하지만 고함만으로는 요하나의 검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요하나가 그려낸 모로스의 궤적이 침입자의 허리를 파고들어 사선으로 빠져나왔다.

촤악!!!!

침입자의 육신이 양단된다.

절단면에서 비산한 피가 요하나의 머리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핏물을 뒤집어쓴 요하나가 얼굴을 대충 닦아내더니, 삭막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데런을 돌아보았다.

"...뭐 해. 일어나."

"..."

데런은 아직까지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 사람의 힘이 아쉬운 이때 어깨에 부상 좀 입었다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됐다.

대충 지혈만 하고 일어나서 다시 싸워야만 했다.

데런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멍하니 앉아 반 토막 난 시신을 바라보다 요하나에게 불쑥 물었다.

"누님... 우리는 지금... 뭘 위해 싸우는 거예요?"

"..."

"우리가... 하... 잘하는 거죠? 옳은 일을 하는 거죠? 그렇죠?"

데런은 빈말이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요하나에게 듣고 싶었다.

하지만 데런의 기분을 맞춰주기에는 요하나도 수많은 감정을 가슴 속에 억누르고 있었다.

"나도... 몰라."

아직 덜 닦인 핏물이 요하나의 뺨을 타고 흘렀다.

불쾌한 감각이었지만 요하나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느냐고? 옳은 일을 하고 있느냐고? 모른다. 관심 없었다.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나중에 물어보면 되잖아. 레이한테... 나중에 물어볼래."

"...형님은 죽었어요."

"다시 일어날 거야."

"..."

데런은 요하나의 헛된 소망을 부정하려 했지만,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요하나의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요하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목소리를 쥐어짜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다시 일어날 테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내가 레이를 지킬 거야."

츠즈즉!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진 검기가 제국의 신검을 타고 올랐다.

코어의 마나량이 부족해 검강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었던 요하나는, 모로스의 증폭 작용을 활용해 찬란히 빛나는 검강을 완성시켰다.

"나는 레이를 지키기 위해 싸울 거야. 그거면 충분해."

"..."

황성에 진입한 침입자들이 더 다가오고 있었다.

침입자들 중에는 고위급 전력에 해당하는 인물도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요하나는 그들과 맞서기 위해 데런을 두고 등을 돌렸다.

품에 넣어둔 목걸이를 만지작거린 요하나가 방어용 아티펙트를 뒤집어쓴 채 몸을 움직였다.

데런은 마지막까지 주저앉아서 요하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콰아아아앙!!!

얼마 안 가 굉음이 들려왔다.

검강이 충돌하고 금속이 찌그러지고 화염이 휘몰아치는 전장의 굉음이 데런의 귀를 꽝꽝 울렸다.

"..."

요하나는 레이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했다.

레이를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오물과 피비린내로 가득한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질 수 있다고 했다.

허나 데런의 마음은 요하나와 같지 못 했다.

출혈이 계속되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데런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형님."

데런은 레이가 보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믿음직하게 웃어주는 레이가 보고 싶었다.

데런은 널브러진 채 허공에 손을 뻗어 보았다.

허나 데런이 그리워하는 영웅은 이제 더는 손을 맞잡고 데런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하..."

데런이 조소를 흘렸다.

그 조소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데런도 알 수가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