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2화 (372/446)

외전 - 대관식 [4]

[4]

"...!"

길란트가 루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루나의 무감정한 은색 눈동자는 길란트에게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길란트는 과거에 금지된 숲 근방에서 만났던 룬이라는 자와 루나를 겹쳐 보았고, 그 직감은 정확했다.

한편 루나를 시작으로 몇 사람이 더 워프게이트를 넘어왔다.

그중에는 황실 마탑의 최고 위원, 헤이든도 있었다.

헤이든이 자신을 소개하자 알폰소 4세가 반색했다.

"이리 마중까지 나와주어 고맙소."

"옥체가 무사하여 다행입니다."

알폰소 4세는 헤이든과 인사를 나눈 후 당연하게 워프게이트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헤이든이 알폰소 4세의 앞을 막아선 채 입을 열었다.

"전하, 죄송하오나..."

"...?"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전하를 마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황 파악과 워프게이트의 안전한 폐쇄를 위해서입니다."

"...알겠소. 잘 부탁하오."

워프게이트가 멀쩡하게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가면 예상치 못 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헤이든이 워프게이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워프게이트의 폐쇄야 알폰소 4세가 워프게이트를 넘어간 후 진행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헤이든은 슬쩍 비켜 지나가려는 알폰소 4세의 앞을 재차 막아서며 웃음을 머금었다.

"전하께서는 워프게이트가 아닌 육로를 활용하시면 됩니다."

"...?"

알폰소 4세는 헤이든이 대체 무슨 의도로 육로를 활용하라는 요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장 빠르고 안전한 피난길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알폰소 4세는 노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워프게이트를 앞에 두고 어찌 육로를 권하는가!"

"전하께서 워프게이트를 활용해 모습을 감추시면, 알리모의 국토에 남은 자들을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대가 신경 쓸 바가 아니네! 또한 짐의 충직한 신하가 짐을 대리해 병력을 이끌 터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알폰소 4세가 짜증을 담아 쏘아붙이고는 어서 비키라고 눈짓했다.

허나 헤이든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전하, 이는 권유가 아닌 통보입니다."

"이런 건방진!!"

알폰소 4세가 발작했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니 기사들이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가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하지만 헤이든을 향한 관심은 오래가지 못 했다.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루나가, 알폰소 4세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루나로부터 번져나온 막대한 위압이 공간을 찍어눌렀다.

쿠웅!!!

"...!!!!!"

대기가 진동한다.

경악한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내 루나를 겨누었다.

그러자 공간을 찍어누르는 위압이 한 층 더 강해졌다.

끄드드드드득!!

지면을 밟고 선 기사들이, 루나를 중심으로 번져 나오는 막대한 마나의 기류를 견디지 못 하고 점점 더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저항을 해보아도 제자리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기사는 극소수였다.

기사들이 그리 발악하는 와중에도, 기이하게 알폰소 4세가 서 있는 공간만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알폰소 4세가 당혹을 숨기지 못 한 채 얼을 타는데 루나가 입을 열었다.

"국토를 전부 잃고도, 그 알량한 권위를 내세우고 싶다면."

"..."

"너의 효용을 증명해."

루나는 알폰소 4세에게 어떻게든 피난 과정에서 알리모의 가치 있는 인력과 물자들을 최대한 확보하고 보존하여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국가의 땅덩어리를 전부 잃고도 왕 대접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라도 너의 효용을 증명해보라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

루나의 언행은 일국의 왕에게 감히 범할 수 없는 무례였다.

허나 알폰소 4세를 능멸하는 소녀를 앞에 두고도, 알리모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인 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 하고 있었다.

알폰소 4세는 목소리만 계속 높여봤자 상황을 타개하기 힘들다는 걸 알아챈 후, 정말 어렵사리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항변했다.

"저주받은 존재들의 군세가 지척에 이르렀음을 그대는 모르는가...! 무리를 크게 이루어봤자 피해만 늘어날 뿐이거늘...!"

평범한 인간의 걸음걸이보다 악신의 축복이 대지를 뒤덮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알폰소 4세가 어설프게 피난을 지휘하겠다고 시간을 끌며 이동을 늦췄다가는 도리어 몰살당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알폰소 4세의 주장이 아주 근거 없지는 않았으나, 루나는 알폰소 4세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짐의 뜻은...!"

알폰소 4세가 항변을 이어가려 했다.

허나 그보다 앞서 루나가 다섯 개의 서클을 전부 활성화시켰다.

츠즈즈즈즉!!!

대기에 흐르던 마나가 루나의 서클과 공명하며 섬광을 뿜어냈다.

뇌전이 되어 하늘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한 마나의 기류는 금방이라도 지면에 떨어져내릴 것처럼 번쩍였다.

"큭..."

헤이든은 몸을 짓누르는 막대한 압력에 못 이겨 비틀거리면서도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불가해한 가능성을 타고난 존재가 발하는 경이는 헤이든에게 황홀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소리 없는 경악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루나는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

저 너머에서,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마물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경의 심부에서 악신의 축복을 먹고 자란 마물은 이제 알리모의 하늘을 유영하며 마경의 확장을 한 층 더 가속시키고 있었다.

워낙 거대한데다 존재감이 뚜렷한 마물이라 한참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표적으로 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유영하는 마물을 소멸시키고 그 일대를 초토화시킨다면 시간 벌이쯤은 가능하리라.

콰가가각!!!

휘몰아치던 마나의 기류가 점차 술식을 그려나가며 더 높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길란트는 과거에 느꼈던 섬찟함을 다시 한 번 코앞에서 마주해야만 했다.

모두가 경악과 경이로움을 품고 뒷걸음질 치는 순간.

길란트만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소리쳤다.

"잠깐...! 아직 피난이...!"

마족들이 경쟁적으로 날뛰어대며 난전이 펼쳐진 탓에 전선이 균일하지 않았다.

저 너머에 아직 피난이 진행 중이거나 반쯤 고립되어 있는 지역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저 너머에 메테오를 떨어뜨린다면 기사급은 몰라도 평범한 육체를 지닌 이들은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던 길란트는 목소리가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리고, 섬광 속에서 루나는 길란트의 외침에 답해주었다.

"도움이 되지 않아."

"...?"

"그들의 생존은 불필요한 소모만 유발할 뿐이야."

"...!!"

악신의 축복에 잠식된 대지는 최소 수십 년은 회복 불가하다.

땅을 잃고 물자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알리모에서 발생한 난민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물자 부족으로 인한 혼란만 급증한다.

그렇기에 즉시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 아니라면, 적당히 '걸러내는' 편이 실리적이었다.

물론, 모두를 구하기에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여의치 않기도 했다.

지금 희생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 망설였다가는 피해만 훨씬 키울 확률이 높았다.

더군다나 루나는 지금 알리모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 수가 없었다.

"..."

길란트는 루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호소를 이어가지 못 하고 턱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쿠우웅!!!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라 붉게 물들어가던 하늘을 헤집었다.

다섯 개의 서클, 오벨리스크의 우주 지도, 그리고 헤이든이 지원한 황실 마탑의 아티펙트들.

하늘을 열기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춰진 상황에서, 루나는 다시 한 번 알리모의 하늘을 열었다.

트득!

파열음과 함께 하늘이 깨져나간다.

곧이어 별빛이 반짝이는 어둠을 넘어 거대한 운석이 비스듬한 각도로 대기권 내에 진입했다.

운석은 불덩이가 되었고, 찰나의 순간 긴 궤적을 그려낸 불덩이는 하늘을 유영하던 거대한 마물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지면과 충돌했다.

!!!!!!!!!!!!!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을 닮은 광구가 피어올랐다.

그 뒤를 이어 열풍과 지진이 찾아와 지면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목적을 이룬 루나는 은색 눈동자를 여전히 무감정하게 빛내며 뜨거운 바람을 등졌다.

우웅-!

루나가 알리모에 발을 들이기 위해 통과했던 워프게이트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메테오의 후폭풍 탓에 워프게이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워프게이트는 루나가 메테오 마법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리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헤이든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황실 마탑에 소요 사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당황할 건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니까.

*

황실 마탑은 일종의 연합체로 보아도 무방했다.

제국의 황실은 황실 마탑을 안정적으로 제어해야 했고, 그렇기에 다양한 계열의 인사들이 황실 마탑에서 활동하며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

황실 마탑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최고 위원 9명 중 2명 이상은 비마법사여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을 정도였다.

황실 마탑은 본래도 제국의 최중요 시설 중 하나였고, 황도가 초토화된 이후엔 시설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렇기에 제국의 굵직한 세력들은 황실 마탑을 보호하겠다며 각자 병력을 파병했었다.

그런데, 황실 마탑의 최고 위원들이 황성을 점거한 반역도들과의 협력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라지만 정보가 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당연히도 강력한 반발이 일었다.

본래라면 정보가 샌 순간 황실 마탑의 최고 위원들은 분노한 제국의 기사들에게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황실 마탑이 외부 세력에 점거당하고 오벨리스크가 파괴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나에 관한 정보가 샜을 때는 이미, 마경의 확장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마경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대륙의 모든 이들이 패닉에 빠졌다.

모두가 혼란 속에서 세력을 결집시키려 했고, 황실 마탑에 파병되었던 병력들 또한 본대의 부름을 받고 대거 빠져나갔다.

그 시점에서 황실 마탑의 수뇌부가 반역도들과 접촉했음이 드러났고, 이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쏟아내며 황실 마탑을 지탄하는 세력들은 많았으나, 다들 자기 발등 위의 불길 먼저 꺼트려야 하는 상황이어서 힘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이나 실리 따위보다 명예, 신념, 그리고 복수를 우선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최고 위원들의 독단적인 결정에 관해 황실 마탑 내부에서도 격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결국 루나가 워프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사이 황실 마탑에서 내부자들에 의해 소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물론, 황실 마탑의 소요 사태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끌기 위한 양동에 가까웠다.

루나가 잠시나마 알리모로 떠났다는 건 황성이 비었음을 의미했다.

기회를 포착한 자들은 복수를 위해, 황성을 탈환하기 위해, 혹은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황도로 진입했다.

황급히 급조된 기습이었기에 준비가 충분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들의 결의만큼은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

"..."

삑! 삑!

요하나의 옆에 놓인 아티펙트가 붉게 점멸했다.

황도 내부에 침입자가 감지됐다는 경고였다.

아티펙트는 계속해서 점멸하며 경고음을 울렸지만, 요하나는 멀거니 앉아 메마른 눈동자로 황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거기에 앉아 침묵하고 있는 레이를 바라보며, 요하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레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온 몸이 헤집어지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레이는 죽었다. 요하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루나는, 레이에게 온기를 되돌려 줄 것이라고 요하나와 약속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희망이었다.

요하나는 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에 속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거짓말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도저히 지면을 딛고 일어설 수 없었기에.

요하나는 레이가 돌아오리라 믿기로 했다.

그러니까, 레이.

"이제는 내가..."

요하나가 손을 뻗어.

"너를 지킬게."

제국의 신검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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