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대관식 [3]
[3]
금지된 숲.
알리모에 존재하는, 악신의 영향력에 잠식된 영역.
현재 알리모는 금지된 숲의 경계선에 병력을 배치하여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가 감시하고 있었다.
금지된 숲을 감시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마경 원정을 위해 차출된 병력의 공백이 상당했기에 금지된 숲의 경계선에 투입 가능한 전력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알리모는 금지된 숲의 황폐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을 다수 고용해 경계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어차피 금지된 숲은 메테오가 떨어진 이후 완전히 황폐화 되어 시야가 확보됐기에 그 내부를 감시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용된 용병들은 첨탑 따위에 올라 지평선 너머를 교대로 감시하는 등의 간단한 임무만 수행하면 되었다.
한동안은 비교적 잠잠한 시간이 이어졌다.
간간이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금지된 숲의 경계선에 배치된 대부분의 병력은 따분할 정도로 반복된 하루를 보냈다.
허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달라졌다.
"...?"
악의가 짙어진다.
금지된 숲의 경계선을 지키던 용병들은 불길한 변화를 단번에 감지했다.
알리모에서 고용된 용병들 대다수는 금지된 숲이 황폐화되기 전에 그 내부를 헤집고 다녔던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금지된 숲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짙어졌던 그 불쾌한 감각이, 지금 이 순간 용병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뭐야...?"
동요가 번져나갔다.
이상을 알아챈 것은 비단 용병들만이 아니었다.
조금 늦어졌을 뿐, 경계선을 지키던 모든 이들이 얼마 안 가 위험한 변화를 알아챘다.
쯔즈즉...
악신의 축복이 번진다.
침식이 일어나며 마경의 영역이 확장된다.
방금까지 평범한 대지였던 곳이 악신의 축복이 깃든 일그러진 영역으로 변질되어 간다.
갈수록 짙어지는 악의에 용병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려 했고, 용병들의 동요는 다른 병사들에게까지 번져 삽시간에 혼란을 키웠다.
병력이 와해되려는 상황에 직면한 순간.
다행히도 현장 지휘관은 병력의 대열을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하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금지된 숲 인근의 도시는 이전에 메테오가 떨어졌을 때 파괴되어 아직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지켜야 할 것이 적으니 병력을 뒤로 물리기도 쉬웠다.
"..."
하지만.
문제는 과연 '어디까지' 물러나야 하냐는 것이었다.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덕에 병사들의 동요는 잦아들었으나, 어째서인지 금지된 숲과 열심히 멀어져도 대지를 잠식하는 악의는 짙어지기만 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현장의 지휘부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사이.
금지된 숲 너머에서 실체화된 악의가 붉은 하늘을 등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
뒤틀린 악의가 금지된 숲을 넘었다.
마경에서 건너온 악의는 전열조차 갖추지 않고 금지된 숲을 넘어 질주하기 시작했다.
금지된 숲의 경계선을 지키던 병력들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는 악신의 추종자들과 가장 먼저 맞닥뜨렸다.
악신의 추종자들을 두 눈으로 확인한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부터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괴이하게 변형된 육신을 지닌 마족들이 악의를 쏟아내며 다가오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미리부터 저런 존재들과의 투쟁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해도 공포를 이겨내기 어려웠을 터다.
하지만 금지된 숲의 경계선을 지키던 이들은 그 어떤 각오도 되어있지 않았다.
저항한다는 선택지는 떠올리지조차 못 한 병사들이 비명을 연거푸 내지르며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휘부가 병력을 제대로 통솔할 기회조차 없이 대열은 무너졌고, 곧장 학살이 벌어졌다.
물론, 기적적으로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한 마음이 되어 저항하길 택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촤아악!!!
갈려나간 인간의 살점이 지면을 적시고 또 적셨다.
마족들과 최초로 조우한 병력은 너무나도 쉽사리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 소식이 전해진 직후, 알리모는 금지된 숲을 넘어온 악신의 추종자들을 저지할 채비를 갖추고자 했다.
허나 악신의 추종자들을 잠시라도 저지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얼마 못 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미친...!!"
촤악!!
기사가 검기를 발현한 검으로 마족을 양단했다.
허나 떨어져 나간 마족의 하체는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더니 불길한 점액질이 되어 기사를 향해 쏟아졌다.
기사는 주저 없이 몸을 날려 점액질을 피해냈다.
헌데 기사가 괴상한 마족을 상대하느라 정신을 뺏긴 사이, 후방에서 전장을 지원하던 마법사의 가슴 한가운데서 검은 칼날이 치솟았다.
푸욱!!!
"...!!"
연기처럼 변해 기습을 가한 마족에 의해 마법사가 목숨을 잃었다.
저런 기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귀중한 전력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급 전력이라 해도 악신의 축복을 가득 품은 마족들의 '괴이'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들었다.
설령 대응할 수 있다고 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전투의 손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열조차 갖추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마족들을 상대로도 그 꼴이었다.
"망할...!!!"
점점 더 악신의 축복이 가득해져 가는 대지 위에서 마족들이 미친듯이 날뛰었다.
기사는 여기서 병력을 소모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허나 무작정 퇴각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퇴각한다고 해도, 과연 어디까지 물러나야 하는가 기사는 알 수가 없었다.
"버텨라...!!"
어쨌든 마족들의 전진을 지연시키기는 해야 했다.
후방의 군단이 전열을 가다듬고 가까운 도시의 피난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 정도는 벌어야 했다.
하지만, 점차 끈적해지는 악의 속에서 그조차도 요원한 일이었다.
후우우욱!!!
"...?"
갑작스러운 강풍과 함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낀 기사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하늘 위에 무언가가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구름은 아니었다. 햇빛을 가린 존재는... 넓적한 지느러미를 지닌, 참 현실감이 없을 만큼 거대한 마물이었다.
"..."
저런 거체가 땅 위에서 멀쩡하게 형상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기 무게에 압박되어 질식할 터다.
저런 거체를 하늘 위에 띄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추력을 계속해서 낼 수 있는 생물이 존재할 리 없다.
그럼에도 저 거대한 마물은, 하늘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
저 거대한 부유 마물은 마경에서만 생존을 허락받은 악신의 장난감이었다.
악신의 축복이 마물의 무게를 지워내서 저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마물이 하늘 위에서 노닐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저 거대한 마물은, 점차 마경화되어 가는 알리모의 국토 위로 몸을 움직여 햇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글렀군."
저렇게까지 압도적이고 경악스러운 광경을 앞에 두고 평범한 병사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임시로 구축한 방어 전선이 붕괴되어 가는 꼴을 보며 기사가 거칠게 입가를 비틀었다.
*
임시로 구축한 방어 전선이 붕괴됐다.
마경화되어가는 대지 위에서 악신의 추종자들을 막아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라는 게 너무나 분명해졌다.
전력의 차이를 따지기 이전에 군단을 제대로 통제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힘들었다.
뒤틀린 악의가 형상화된 마경의 마족들을 마주한 병사들은 대부분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공포에 잠식되어 스스로 무너졌다.
거기다 고급 병종으로도 악신의 축복을 뒤집어쓴 마족들의 괴이한 능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보니 이건 정말 답이 없었다.
결국 극심한 병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는 악신의 축복에 잠식된 대지를 벗어나 전선을 새로 구축해야 했다.
이는 명백한 정론이었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악신의 축복이 알리모의 국토 전부를 뒤덮을 기세로 번져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워프게이트를 활용할 수 있나?"
알리모의 국왕 알폰소 4세는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겪은 덕에 이번엔 비교적 차분하게 도망가자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마족들의 침공을 제대로 지연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피신 방법이 워프게이트였다.
궁정 마법사는 얼마 안 가 알폰소 4세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제국의 황실 마탑 측에서 워프게이트 연결에 도움을 주겠다고 합니다!"
"됐군!"
황도가 무너진 지금 황실 마탑은 제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 중 하나였다.
수직적인 명령 체계로 일원화된 조직이 아닌지라 하나의 조직이라기보다는 연합체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황실 마탑이 도움을 준다는데 마다할 게 없었다.
알폰소 4세는 크게 기뻐하며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그런 알폰소 4세의 결정에 정면에서 반발한 건 은십자 기사단의 기사단장, 길란트였다.
"전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아직 피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한 지역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육로를 이용하여 그들을 이끌어주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알리모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은 결국 알리모의 국왕 알폰소 4세였다.
국가 전체가 혼란에 잠겨 존망의 위기에 놓인 이때, 알폰소 4세가 육로를 이용해 움직이며 피난을 이끈다면 혼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터다.
허나 알폰소 4세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육로를 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짐의 안위를 가장 우선해야 할 자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알폰소 4세는 격앙된 목소리로 길란트를 질책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란트 경, 그대가 정녕 구국의 책무를 다하고 싶다면 엘버튼으로 향해 저주받은 마족들의 침략을 지연시키게."
엘버튼은 알리모의 수도와 인접해있는 도시이자 마족을 저지 가능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목이었다.
잠시 침묵한 길란트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자 알폰소 4세는 영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다시 왕명을 내렸다.
"워프게이트까지 짐을 호위한 후 짐을 대리해 엘버튼으로 향하게."
이러나저러나 길란트는 알리모에서 손꼽히는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갈 때 가더라도 호위는 해주고 가라고 명령한 알폰소 4세가 어서 피난을 준비하라고 다른 이들을 재촉했다.
끝까지 자기 안위를 우선하는 알폰소 4세에게 실망하는 이들도 많았으나, 적극적으로 항명하는 이는 없었다.
국가의 몰락을 코앞에 둔 이때, 알폰소 4세가 내린 결단의 방향성 자체는 대체로 옳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파천이 결정되어 알폰소 4세가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얼마 안 가 길란트는 알폰소 4세와 함께 워프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국왕과 고위 대신들이 워프게이트를 통해 피신했다는 소문이 번진 상황에서, 과연 군단을 통솔하여 후방 지역의 국민들이 피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인가.
길란트는 얼마 못 가 자신에게 찾아올 좌절의 순간을 잠시 곱씹었다가 워프게이트를 돌아보았다.
우우웅!!
마법사들에 의해 활성화된 워프게이트가 반대편의 워프게이트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알폰소 4세는 워프게이트가 완전히 열리기 전에 길란트의 용기를 치하하며 형식적으로 무운을 빌었다.
길란트 또한 형식적으로 알폰소 4세에게 예를 갖추는 순간, 워프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알폰소 4세가 길란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의무를 다하고 생환하기를 기원하겠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참으로 믿음직스럽군."
흡족하게 웃은 알폰소 4세가 어두운 안색의 길란트를 뒤로 하고 워프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알폰소 4세를 비롯한 알리모의 인물들이 워프게이트를 통과하기도 전에 워프게이트의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워프게이트에서 나타난 한 쌍의 은색 눈동자가 위압적으로 빛나며 공기를 긴장시켰다.
루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