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0화 (370/446)

외전 - 대관식 [2]

[2]

황실 마탑의 중추, 오벨리스크.

루나는 황도에서의 전투에서 오벨리스크 내부 시스템의 보조를 받았다.

이제 루나와 오벨리스크의 연결은 차단되었다.

하지만 오벨리스크에는 루나가 시스템을 활용한 기록이 비교적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황실 마탑의 수뇌부는 이 기록을 확인했고, 그 덕분에 루나라는 마법사의 역량을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내릴 수 있었다.

루나의 재능은 황실 마탑 수뇌부들의 시선으로도 불가해한 수준이었다.

그 불가해한 재능이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는 않았으니, 루나와 적대하게 된다면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일을 매듭지어야 했다.

어설프게 시간이 지연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음을 그들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국 남부가 황도 탈환에 적극적이었기에 시간이 과하게 지연되는 일은 없으리라 예상됐다.

헌데 황도 탈환을 위한 작전이 구상되던 중에 제국 남부의 주력이 붕괴하였다.

알렉산데르는 전사하였고 안소니우스는 실종되었다.

거기다 신성 교단의 수뇌부는 아예 전멸하다시피 했으며 황자의 생존 유무도 확인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과연 대륙의 혼란을 수습하는 게 가능할까 의아한 수준이었다.

헌데 그도 모자라 마경의 확장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황실 마탑의 수뇌부는 본래 보유하고 있던 정보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또한 냉철한 마법사 집단답게 신속하게 의견을 수렴했다.

현재로서는 대륙의 혼란을 잠재우고, 마경의 확장에 대처하고, 반역도들이 점거한 황도의 탈환까지 동시에 실행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구심점이 될 만한 힘과 상징성을 지닌 집단이 거의 다 붕괴한 탓에 더는 과거 '마경 원정' 때와 같은 통합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건재함이 확인된 로드 급인 루나와 적대하는 것은 인류의 자멸을 확정짓는 선택에 가까웠다.

생존을 위해 협력이 필요한다. 감정을 배제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황실 마탑의 수뇌부는 내놓았다.

저벅!

그리고 헤이든은, 황실 마탑을 대표하여 황도를 찾아왔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헤이든은 무너져 내린 황도의 풍경 사이를 거닐면서도 썩 여유로워 보였다.

실제로 헤이든은 자신이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재 입장이 아쉬운 것은 황실 마탑만이 아니었다.

루나는 오벨리스크 시스템의 접근에 차단당한 상황이었고, 황실 마탑이 협력하지 않는 이상 오벨리스크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루나의 '마스터 코드'가 없으면 황실 마탑의 마법사들 또한 오벨리스크 시스템의 활용이 제한되었으나, 헤이든은 굳이 이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루나가 로드 급이라 해도 '개인'이 지닌 한계라는 것은 존재했다.

오벨리스크의 시스템에서는 차단되었고 황도의 방위 시스템은 대부분 파괴되어 기능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루나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황도 아래 흐르는 영맥의 마나 정도였다.

그렇기에 루나는 황도를 함부로 벗어날 수 없었다.

루나가 황도를 벗어나는 순간 황도를 기습할 이들이 넘쳐났음은 물론이고, 영맥의 마나 없이 그녀 혼자 고위급 전력이 득실거리는 군단과 부딪치는 것은 그녀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 말이다.

저벅!

헤이든은 마침내 황성 앞의 광장에 도달했다.

헤이든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황성의 정문에 서서 한참 높은 눈높이에서 헤이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해."

환영인사 따위는 없었다.

루나는 짧게 헤이든의 목적을 물었다.

헤이든은 냉기가 흐르는 듯한 은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무심코 어깨를 한 번 떨었다.

허나 헤이든은 직감이 보내오는 경고를 자각하지 못 한 채 본래의 계획대로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는 당신을 후원할 용의가 있소."

"..."

루나는 침묵했고, 헤이든은 루나의 침묵을 개의치 않았다.

루나의 역량이라면 마경의 확장이 시작되려함을 이미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터다.

굳이 헤이든이 복잡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아도 루나는 대략적인 대륙의 정세를 쉽사리 꿰뚫어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헤이든은 루나가 어련히 알아들을 것이라 단정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재앙이 다가오는데 불필요한 소모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소."

꾸드득!

헤이든의 손가락으로부터 흘러나온 마나가 지면을 움직여 의자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헤이든은 의자에 몸을 앉히며 침묵하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피차 서로가 아쉬운 처지다.'

황실 마탑의 협조가 있어야만 루나는 오벨리스크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

지금처럼 황도에 고립되어 있는 처지에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황실 마탑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피차 아쉬운 처지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굽히고 들어가봤자 우습게 보이기만 할 터.

그렇기에 헤이든은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와 협력할 용의가 있소? 원치 않는다면 이만 돌아가겠소."

"...너희에게."

루나가 침묵을 깼다.

침묵을 깬 루나는, 여전히 무감정하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헤이든에게 향한 채 순수하게 의문을 표했다.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었나?"

"..."

트득!

마나가 움직인다.

루나의 의지에 감응한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헤이든은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루나가 지금처럼 위력을 행사해 압박을 가할 수도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헤이든은 되도록 의연하게 루나의 위력 행사를 견뎌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헤이든의 지나친 오만이었다.

트드득!

루나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다섯 개의 서클이 전조 없이 개방되었다.

다섯 개의 서클에 휘감긴 마나는 삽시간에 해일이 되어 헤이든이 앉아 있던 공간을 집어삼키려 했다.

고위 마법사인 헤이든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끄드드드득!!!

헤이든을 조여오듯 몰아치는 마나의 해일이 점점 더 압축되어 밀도를 높였다.

헤이든의 뺨이 당혹을 드러내며 살짝 일그러졌다가 되돌아갔다.

헤이든은 보는 것 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방대한 고밀도의 마나를, 루나는 너무나도 간단히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윽!"

헤이든이 의자에 앉은 채 휘청였다가 허리를 다시 세웠다.

주변에 흐르는 마나의 밀도가 너무나 높아진 탓에 헤이든의 서클에 깃든 마나마저 더욱 밀도 높은 마나와 공명해 들썩이려 하고 있었다.

헤이든은 자신이 오판했음을 알아챘다.

황도에 진입하기 전 헤이든은 루나의 역량을 충분히 높게 가정하고 위력 행사에 대비했다.

허나 직접 마주한 루나의 역량은 헤이든의 빈곤한 상상력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

헤이든은 구역질을 간신히 삼키며 턱에 힘을 주었다.

비록 루나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라고는 하나 헤이든이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의 협력이 아쉬운 상황에서 위력 행사에 밀렸다고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었다.

츠즉!

헤이든도 서클을 운용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루나의 역량이 아무리 상식을 벗어나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단순한 압박만으로 헤이든을 해칠 수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서클을 활성화시킨 헤이든은 약간이나마 여유를 되찾고서 호흡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헌데 그 찰나.

헤이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벽처럼 쌓아올려가던 마나의 기류가 살짝 흔들렸다.

"...?"

일순 헤이든은 자신이 마나를 제어하다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경험해보지 못 한 초고밀도의 마나가 흐르는 공간에서 서클의 마나를 통제하다 보니 작은 실수가 있었다고, 그리 착각했다.

헌데 헤이든이 실수라고 여겼던 그 현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헤이든이 만들어내려던 마나의 방벽은 자꾸만 반복해서 삐걱거렸다.

'어째서...?'

너무나도 기초적인 술식이 반복해서 흐트러진다.

헤이든은 순간적으로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을 떠올렸다.

마나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라면 지금처럼 기초적인 술식조차 흐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곳에 소드마스터는 없었기에, 헤이든은 마나의 기류가 자꾸만 흔들리는 원인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트득!

그리고, 온 정신을 집중시킨 끝에.

헤이든은 간신히 눈앞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루나로부터 발현된 기이한 힘.

헤이든이 통제하던 마나에 그 기이한 힘이 간섭한 순간, 극소량의 마나가 본래의 흐름을 거슬러 역행했다.

자꾸만 마나의 기류가 뒤틀렸던 건 그 탓이었다.

"..."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헤이든과 같은 경험을 겪었을 때 그저 힘으로 찍어눌러졌을 뿐이라고 단순하게 결론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헤이든은 제국에서도 귀하다고 여겨지는 천재였기에.

자신이 마주한 현상의 본질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슬렀다.'

루나가 자아낸 알 수 없는 힘에 간섭받은 극소량의 마나는 '이미 발생한 변화'를 역행하여 모습을 바꾸었다.

그 광경은 본질적으로, 불에 탄 나무토막이 불이 붙기 직전의 모습으로 거슬러 간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

이건 마법이 아니다.

이건 마법과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비록 너무나도 극미해서 존재를 눈치채기조차 힘들었으나, 이건 분명...

권능이라 칭해야 하는 힘이었다.

"..."

헤이든은 자신이 완전히 오판했음을 깨달았다.

루나라는 불가해한 재능을 타고난 존재는 이미, 불가해한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경계선에 서 있었다.

한 없이 초라한 헤이든의 재능으로는 루나라는 존재가 대체 어떤 영역에 발을 들이려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나와 적대해야 한다면 지금 이 시점이 마지막 기회였다.

반드시 루나가 다음 걸음을 내딛기 전에 제거해야만 했다.

그게 불가하다면.

남은 것은 굴종이었다.

파가가각!!

헤이든이 전개한 어설픈 방벽이 붕괴한다.

그와 동시에 헤이든을 휘감고 몰아치던 마나의 해일이 소멸했을 때.

루나는 헤이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너희에게."

루나가 다시 물었다.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었나?"

레이는 기존에 대륙을 지탱하던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강력한 힘과 상징성으로 대륙의 구심점이 될 존재들을 무너뜨렸고, 막지 못 할 재앙을 유도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레이는, 루나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런데도 너희에게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었느냐고... 루나는 그리 묻고 있었다.

이건 무언가를 흥정하고 협의할 사안 같은 게 아니었다.

명예롭게 파멸을 받아들이든가, 혹은 굴종할 대상을 정하면 끝날 문제였다.

한 걸음 더 헤이든에게 다가간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해."

"..."

헤이든은 코와 입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헤이든은, 고개를 들고 루나를 마주 본 채 입을 열었다.

"제 우둔함을..."

몇 없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용서하십시오."

헤이든은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택했다.

*

마경의 확장을 억누르던 힘이 약화되었다.

붉어져 가는 하늘 아래, 악신의 축복이 대륙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오직 마경에서의 삶만을 허락받은 존재들이 악신의 축복이 스며들기 시작한 대지 위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땅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였다.

쇳덩이를 긁어대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경쟁이 시작됐다.

다수의 마족들이 육지로 이어진 경로를 택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움직였다.

제국이 아무리 쪼개지고 약화되어 붕괴 단계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들에게는 바다 건너의 국가가 더욱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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